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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뎡 Oct 04. 2020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함께 그려낸 부부

책<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 정현주


 학창 시절 미술 시간으로 돌아가보자. 피카소, 반 고흐, 세잔, 밀레 등 기억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의 화가보다는 서양 화가들이 먼저 떠오른다. 애써 기억을 더듬어 한국의 화가를 떠올려보면 이중섭 작가가 생각났다. 그렇기에 당연히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도 그의 그림일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김환기 작가의 그림이다.


 


 2019년 한국 작가의 미술품 경매에서 처음으로 100억 원을 넘긴 김환기 작가의 '우주(Universe 5-IV-71 #200)'은 경매에서 약 130억 원에 팔렸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모르는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국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그는 입체파와 미래파 등 새로운 미술 경향을 익히고 추상미술을 시도했다. 해방 후부터 전쟁 전까지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로 있었고, 한국이 아닌 파리, 니스, 브뤼셀, 뉴욕에서도 전시를 열었고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여해 명예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빠질 수 없는 그의 아내, 김향안. 그녀의 본명은 변동림으로 김환기 작가를 만나기 전, 시인 이상의 아내이기도 했다. 병으로 이상을 잃은 그녀는 김환기 작가와의 재혼을 원했지만, 가족들은 아이가 있는 이혼남과의 재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족의 반대는 중요치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지성에 끌렸고 공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고, 그녀는 이름을 바꾼다. 변동림이 아닌, 그녀의 남편의 성과 호를 딴 ‘김향안’으로.




사랑이란 지성이다.
-김향안-


 사주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기에 맹신하진 않지만, 좋게 나오는 부분은 믿는 편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심심풀이로 봤던 사주와 친구들을 따라가서 듣게 된 사주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미래의 배우자에 대한 이야긴데, 부자를 만나 인생을 편하게 산다는 그런 풀이가 아니다. 상대와 내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성장하는 그런 사람을 만날 거란 예상, 그래서인지 김환기 작가와 김향안 선생의 이야기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은 한국의 격동의 시기를 살아내었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혼란의 역사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김환기 선생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했었다는 이력으로 보아, 그는 이미 국내에서 인정받는 화가였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더 넓은 세상을 원했다.


(p.39 - 40)

 어느 날 향안이 구라파에 가서 미술평론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향안은 한번 세운 뜻을 쉽게 접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자꾸자꾸 프랑스에 가자고 말하였다.

 그러다 어느 하루, 수화가 술에 취해서는 "나 파리에 가야겠다. 너도 데려고 가지."라고 말을 했는데 놀랍게도 향안은 다음 날부터 프랑스어 책을 사다가 혼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향안은 한국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도 프랑스어 책을 빼놓지 않았다.

 그들은 3년 만에 그립던 서울로 돌아왔다... 수화가 아내에게 말했다.

 "도대체 내 예술이 세계 수준으로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향안은 긍정적인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심플하게 대답하였다.

 "나가봐."

 어떻게 말이냐고 수화가 되묻자 향안은 이번에도 간단히 대답하였다.

 "내가 먼저 가볼게" 


 다음날 김향안 선생은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 비자를 받아왔고 2년 뒤 홀로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해 김환기 선생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전시 준비 중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해낸 일에 스스로를 대입해본다. 일단 불어를 못한다. 다행히 기술의 발달 덕에 구글 번역기를 활용하여 이렇게 저렇게 해본다면 의사소통은 가능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시대에는 번역기도 없었고,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방법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전시회 준비는 대화만 가능하다고 열리는 영역은 아녔을 것이다.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는 이미 많은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동양에서 온 화가의 전시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1년 만에 기회를 잡아내었고, 남편의 세상을 넓혀주었다. 


 재능이 있다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지는 않는다. 그 재능을 어떻게 활용할지, 어떻게 세상에 내보일지 또한 재능의 가치만큼 필요한 역량이라 생각한다. 김환기 선생은 그의 그림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김향안 선생이 없었다면 그의 세상은 한반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봤다. 한 사람은 방향을 제시했고, 다른 이는 그 길을 멋지게 걸어내었다. 




 두 사람은 이루어낸 업적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 또한 뜨거웠다. 책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가 함께 수록되었는데, 그의 그림과 함께 내용을 읽다 보면 김환기 선생이 김향안 선생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가 읽는 이에게도 전달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저녁에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는 것도 그들 사이가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최근 한 예능에서 이효리-이상순 부부가 서로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 가장 재밌다는 대화가 방송되면서 네티즌 사이에서 큰 부러움을 얻었다. 그들처럼 김향안-김환기 부부 역시도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의 소중함을 서로 느꼈다.



(p.143)

이 여름은 어떻게 무난히 지내야겠는데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그럼 또. 수화.

(p. 152)

참, 포도를 보면 포도를 먹으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p. 157)

향안, 걱정 말아요. 나 아주 명랑해요. 나, 갈수록 좋은 그림 그릴 자신 있어요.
내일은 또 새 정신으로 시작해봐야겠어. 상품화된 화포를 쓰지 않고 가공처리되지 않은 천을 써볼래.


 30년 내내 두 사람은 인생의 좋은 동반자로 부지런히 나아갔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던 두 사람의 일기가 1974년 7월 12일 그리고 13일 하루 차이로 멈추었다. 수술하면 좋아질 거란 기대를 안았던 김환기 선생의 척추 수술이 끝나고, 그는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상상력을 더 해본다. 내가 혼자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랑하는 이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라졌다. 상상뿐인데도 가슴 한편이 저릿해온다. 그 현실을 직접 마주한 김향안 선생의 일상은 당연하게도 멈춰 선다. 그도 잠시 그녀는 그의 그림의 더 나은 보존을 위해 퐁퓌두 센터에 기증하고, 그로는 아쉬움이 남아 그의 미술관을 설립한다. 참 멋진 사람 두 사람이 만나, 참 멋진 그림을 세상에 선보였다.



(p. 246)

 더 나은 반쪽을 만나야겠다는 바람은 더 좋은 반쪽이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희망하게 되었어요. 나의 성장이 그의 성장을 이끌고 그의 성장이 또 나를 성장하게 하면서 서로에게 점점 더 잘 맞는 반쪽이 되어가는 일. 


  두 번째로 다시 읽으면서도 책 말미에 나오는 이 문장은 늘 따끔하게 한 대 맞은 느낌을 준다. 나 역시도 이제는 좋은 사람을 찾겠다는 다짐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어서 만나게 될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사주의 풀이대로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이제 충분히 잘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함께 각을 나누는 재미를 느낄 사람과 인생을 함께 걸어가고 싶어 지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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