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현 Nov 08. 2023

엄마가 공부를 했었더라면



엄마는 전라북도 익산시 시골에 아들만 넷 있는 집 막내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딸을 두고 '고명딸'이라고 하지요. 음식 맛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는 고명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럽다는 뜻으로요. 할아버지는 아들들은 흔한 이름을 주고선, 엄마에게만 특별하게 '기특할 기(奇)'를 주었어요. 그러나 기구하게도 엄마가 할머니 뱃속에 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할머니 혼자 자식 다섯을 건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지요. 그 바람에 엄마도 보수적인 여느 시골집 딸들처럼 오빠들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집안을 돌보고 외삼촌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어요.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엄마는 남들처럼 번듯하게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홀로 된 할머니가 딸자식 교육까지 챙길 형편이 못 됐지요. 엄마는 그게 두고두고 한이라 했어요. 가끔은 할머니를 원망하기도, 시절을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선지 엄마는 저와 동생에게 입버릇처럼 '공부하라' 했어요. '내가 너였으면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 덧붙이면서요. 자식이 공부해서 잘 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이야 다 똑같지마는 엄마는 당신이 공부 못한 아쉬움을 제게 투영한 것도 일부 있었을거예요. 왜 아니겠어요.



저는 엄마 바람대로 공부를 곧잘 하는 딸이었습니다. 엄마의 숙원을 이루듯 남들 알만한 대학에 들어가 대학원 진학도 했어요. 어느 부모가 자식 자랑스럽지 않겠냐마는, 엄마는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큰 만큼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이 공부 잘한다는 걸 뿌듯해했어요. 엄마가 지인에게 절 소개하면서 "우리 딸은 공부만 해서 다른 건 뭘 몰라요" 할 때가 더러 있었는데, 얼핏 겸손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자랑이라는 걸 저는 잘 알았지요.



엄마가 공부를 했어도 잘했을 것 같아요. 엄마는 '공부머리'와 '살림머리'가 따로 있댔지만, 엄마가 전업주부로 살림하는 것을 보면 공부도 대단하게 했을 성싶거든요. 하나를 보면 열 안단 말 있잖아요. 청소를 해도 더 깨끗하게, 요리를 해도 더 효과적인 방법을 탐구했어요. 가계를 꾸리는 것도 야무졌지요. 이사할 집을 알아볼 땐 동네 부동산이란 부동산을 다 둘러 봤을 거예요. 그 중에 마음 맞는 부동산에는 음료수 박스 들고 문지방 닳게 넘나들며 정보를 얻고요. 그렇게 우리 집도 차츰 늘려갔어요. 공부를 했으면 우등생이었고, 회사를 다녔으면 우수사원일 태도가 아닌가요.



돌아가신 후에야 발견한 엄마의 귀여운 학창 시절 사진



엄마의 공부에 대한 아쉬움은 암 투병에도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간절해지는 듯 했습니다. 저는 그런 마음을 달래주고자 엄마의 ‘독서메이트'를 자처했습니다. 엄마에게 책을 골라주고 책 얘기를 나누는거죠. 우리의 첫 책은 양귀자의 '모순'이었어요. 엄마에게 안성맞춤이었지요. 엄마가 살아온 시대를 배경으로 다뤄 공감이 가면서도 아침드라마 같이 감칠맛 나는 서사가 있거든요. 엄마는 처음엔 체력도 안 되고 살림도 바쁘다더니, 웬걸. 너무 재미있어서 서너 시간씩 붙들고 앉아 몰입하는 바람에 사나흘만에 다 읽었대요. 아빠가 ' 책 그만 보라'고 말릴 정도로요.



우리는 몇 권의 책을 더 했어요. '원미동 사람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이제 고전이 된 한국문학부터, '스님의 주례사'같은 의미있는 산문까지. 엄마는 타고난 독서가였던가봐요. 소설을 엄마의 삶으로 재해석하는 재주가 있었거든요. 엄마 말로 풀어낸 이야기 속엔 엄마의 인생 철학이 담겨 있었어요. 제겐 원작보다 더 풍부한 생각 거리를 던져 주었지요. 우리는 그렇게 둘이서 모녀지간 독서모임을 한 거에요. 엄마가 더 이상 책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해지기 전까지요. 아마 그 순간들이 엄마가 인생에서 가장 원 없이 책 읽은 때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엄마 살아 계실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이번 생에는 내가 엄마 딸이었으니, 다음 생에는 엄마가 내 딸이 되어 달라고요. 다음에 다시 만나면 내가 엄마 이번 생에 못한 공부 실컷 시켜 주겠다고. 저는 엄마로부터 든든히 지원 받으며 공부했는데 작은 것 하나도 보답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거든요. 엄마가 내 딸이 되면 엄마가 내게 해 준 것 이상으로 해 주고 싶었어요. 그래도 이제 와 말하자면... 저는 다음 생에도 엄마 딸이고 싶어요. 이번 생에 못 다 받은 엄마 사랑, 다음 생에 더 많이 받고 싶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기차역, 만남과 헤어짐의 광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