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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혜 Jun 24. 2020

그래도 오늘을 산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한창 꽃 피울 나의 20대는 시들어져 그 끝을 알 수 없는 긴 터널 속을 향해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외로이 홀로 선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딛고 한걸음 나아가기까지의 내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 그랬다. 삼천포 금수저로 태어난 나는 ​곱게만 자라온 탓에 자립심과 결단력 따윈 없었다. 그런 내가 타지에서 고등학교생활을 하며 외롭고 서러워 눈물 흘리던 날도 여러 번. 타지 생활에 적응할 때쯤 IMF에도 끄덕 없이 부유하던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학자금 대출로 대학 등록은 마칠 수 있었지만 생활비 등 당장  돈을 더 마련하기 위해 나는 페이 좋은 성인오락실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8살 연상인 지금의 남편은 그때 일했던 오락실에서 만났다. 남편은 유통사업을 하면서 지인의 부탁으로 잠시 환전을 해주고 있었는데 오락실에서 환전실로 가는 남편에게선 항상 비누거품 같은 좋은 향이 다. 그래서인지 향기가 스치지 않는 날은 '오늘은 안온 건가?' 하는 괜한 호기심좋은 감정생겨났. 나에겐 관심 조차 없던 남편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던 그때, 내 나이 스물둘 2008년 추운 겨울밤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단단히 난 엄마는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로  노려보더니 내 뺨을 있는 힘껏 내려치 "집에서 나가!"하고 소리치셨다. 나는 '죄송합니다'라고 싹싹 빌 법도 한데 '얼씨구나 좋다!'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듯 그 길로 남편과의 동거를 시작했으니 그땐 나도 참 어지간했다.


철없이 세상 물정 어둡던 내게 경제력 있는 남편은 당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집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낙태금지법으로 한창 떠들썩할 시기마침 임신을 하게 되면서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되다.

연을 맺어주기 위해서 아기가 왔었나 보다. 결혼하고 얼마 후 자연 유산이 되었다. 머지않아 난 다시 임신을 하였지만 임신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임신 6개월 즈음 남편은 불법 스포츠토토에 한창 빠져있었고 사업체와 함께 모든 재산을 잃고 난 후에야 남편은 도박에서 손을 뗐다.

살림살이는 아기가 태어나니 더욱 힘겨워졌다.

매일 빚 독촉에 시달리며 유선염으로 젖 한번 물리지 못한 아기는 빈 분유통 앞에서 배고파 울고, 집에 흔하디 흔한 계란은 무슨, 당장 쓸 화장지 조차 없는데, 전기는 들락날락, 밀린 가스비에 이제는 가스 공급을 중단해야겠다며 가스를 끊으러 온 가스  사장님은 추워서 발갛게 튼 볼로 겨울 찬바닥을 뽈뽈 기어 다니는 아기가 안돼 보였는지 아직 젊으니 열심히 살아라며 밀린 요금은 조금씩 나눠 내도 좋다는 말을 해주고 가셨다.

얼려진 가시처럼 차갑고 아픈 말들만 무성했던 그때에 사장님의 한마디는 독기로 똘똘 뭉쳐 바들바들 떨기만 하던 나를 안도감 속에 녹아 주저앉게 만들었다.

마냥 맥 놓고 있던 남편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는지 낮에는 농산물 도매상에서 일하며 새벽으로는 비닐하우스를 지으러 다녔다. 많이 피곤해했지만 성실히 일하는 모습에 이젠 형편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알량한 내 믿음에 불과했을 뿐, 남편은 본전 생각에 일하며 수금한 돈까지 몽땅 도박에 가져다 썼고 월급은커녕 일을 하면 할수록 갚아야 할 빚만 더해져 갔다.


살이 십여 킬로 빠지면서 내가 정신줄까지 놓친정엄마는 나와 아이를 무작정 끌고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더 끔찍한 건 집을 나오고 나서부터 였다.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들른 엄마는 무속인에게서 내가 신병이 난 거란 얘길 들었고, 정말 신병인 건지 용하다는 점집은 다 찾아다니며 하라는 굿은 다 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내 사주팔자 여덟 글자 중 여섯 글자를 무당 글자로 타고 난 내 탓이라니! 

무녀의 칼이 내 가슴 위를 타고 내리는 와중에 굿판 징소리에 맞춰 딩가딩가 춤추는 두 살 배기 아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시나위 리듬에 올라선 내 가슴과 머리는 점점 더 깊숙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시나위:굿 음악에서 무당의 노래에 맞추어 악사가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가락)

또 어느 스님은 날 가르쳐 제자로 삼겠다며 두 살 배기 아이와 나를 제주도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이와 내가 묵을 방에는 거미줄과 죽은 벌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방을 대충 치우고 나니 저녁을 먹으란다. 밥상 위에 덜렁 놓인 배추김치와 흰쌀밥. 아직은 이유식을 먹어야 될 아이이기에 김치는 매워 밥을 맹물에 꾹꾹 말아 아이 입에 떠 넣어주고 나도 한 숟가락 입에 넣으니 어찌나 참담한지 소리 없는 통곡만이 계속 나올 뿐이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나가야겠단 생각에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포대기에 엎고 있던 아이 허벅지를 꼬집어 계속 울려댔다. 그리고 스님을 찾았다.
"스님, 저는 공부에 매진하고 싶은데 아이가 이렇게 자꾸 울어대니 집중할 수가 없네요. 밝는 대로 뭍에 나가 아이를 어디에든 맡기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옷가지도 다 버린 채 나와 아이는 몸만 도망치듯 이튿날이 되어서야 제주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3년간은 아이가 어려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영업일을 했다.

하루는 고객님이 내가 양손 가득 제품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정류장으로 되돌아가는 내 손을 낚아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어주며 택시 타고 편히 가라고 하셨다.
나는 만원을 돌돌 말아 손에 꼭 쥔 채 택시 타는 척을 하다 되돌아 버스를 타고 눈에 보이는 문구점 앞에 내렸다. 아이에게 뭔가를 사주고 싶어서였다.


아주 작은 문구점. 문구점으로 들어서자 주인의 힘찬 환영 인사가 나를 맞이했다.

만원으로는 내가 사주고 싶은 장난감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장난감을 고르는 내 시선 따라 머무는 손길 위에는 쭈뼛함이 서려 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멋진 자동차를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손에 쥐어진 만 원짜리 지폐 한장은 아주 작은 미니 자동차만을 허락했다. 7,000원. 

장난감 크기에 비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사내아이라 꼭 자동차를 사서 안겨주고 싶었기에 비록 아주 작은 자동차였지만 구매 후 내 품속에 쏙 감싸 안고 나왔다.

조그마한 자동차 하나를 품에 안고 있으니 문득 만 원짜리 종이 한 장이 주는 감사함과 가혹 하디 가혹한 잔인함에 어찌나 만감이 교차하며 요동치던지 도저히 감정을 수습할 길이 없더랬다. 나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버스도 포기한 채 한 시간 남짓을 흐느끼며 집까지 걸어갔다.


영업일을 하는 동안 나는 고객 앞에서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내 안에 없는 밝음을 억지로 냈더니 웃음이 커질수록 되려 앓던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더 커져만 갔다. 또한 눈뜨고 마주한 삶의 현실을 꾸역꾸역 받아들이며 살아내려 나는 내 안을 술로 가득 채웠.


그때. 뽈뽈거리며 기어 다니던 아기가,  품에서 엄마의 사랑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아기가, 어느덧  혼자 유치원생이 되어 내 얼굴에 제 볼을 비벼대다가 내 어깨를 어루어 만지며 "엄마, 울지 마. 괜찮아."라고 한마디를 내게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술기운에서 벗어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나와 내 아이 그리고 내 가정을 똑바로 지키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간 입원 수속 중에도 도망치며 미뤄왔던 대학병원 입원 치료를 4년 전에 받고 나왔다. 퇴원 후에도 지속적인 치료를 열심히 받고 있다. 치료를 받으며 내가 평온해질수록 제법 어엿하게 성장한 내 꼬마 아이 그림에도 변화가 생겼다. 항상 빗속에 우산 없이 먹구름 아래에 서서 울고 있던 엄마 얼굴이 이젠 해님 아래에서 하트를 뿜 뿜 뿜으며 온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예전에 나는 여느 또래들처럼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구질구질한 현실 어딘가쯤에 처박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어른들이 "네가 네 친구들보다 인생을 먼저 살고 있는 거야! 나이 들어 무너지면 다시 서기도 힘들어. 너 젊잖아. 꿈꾸며 살아 이것아!"라고 말해주곤 했다. 숱하게 들어온 이 말속에서도 나는 몰랐다. 남들이 배울 수 없는 나만의 삶을 배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낢'이란 것으로 세상에 나와 '삶'이란 과정을 통해 '앎'이란 것을 얻어 가고 있는 오늘, 어제 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기꺼이 오늘도 힘차게 살아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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