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혜 Jun 30. 2020

이제는 가면을 벗고 싶어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우리 이모가 그러던데 '서른에 피는 장미'라더라. 그래서 나는 30이라는 내 나이만 기다려왔고 드디어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꽃은 피는 때가 다르다'라고 내 손으로 일기장에 적어 놓고서는 보편 일률적인 바람으로 서른만 바라보고 있었다니 내가 무지하였다. 그토록 바라던 서른이 되었으니 자연스레 꽃 피우리라 당연하게 착각하고 있었다니 말이다.


4년 전, 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야기다.


깨알 같은 글씨로 뭔가를 열심히 적는다는 얘기가 병동 식구들 사이에서 돌았나 보다. 회 님이 내 노트를 보고 싶어 했다. 그러던 찰나. 뾰족이 깎은 연필과 노트를 옆에 끼고 병실로 향하던 나를 발견한 현회 님이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내 노트를 좀 읽어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민망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노트를 내밀었다.

묵묵히 앉아 내 노트를 정독한 후 현회 님은 "책 내자"는 농 섞인 칭찬으로 내 밝을 미래를 응원해주셨다. 현회 님이 윤아(학생 간호사)에게도 내 노트를 읽어보길 권하면서 윤아 역시 내 노트를 읽을 기회를 가졌다. 그렇게 노트를 다 읽은 윤아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 속엔 많은 감정과 복잡한 생각들이 뒤엉켜있어 보였는데, 그것들을 정리하는 듯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윤아가 나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환자들이 노트에 글 쓰고 있으면 막 보여달라 졸라서 읽어보고 그러는데 보혜 님 노트는 보여달라고 차마 할 수가 없었어요.
처음 왔을 때 제가 혈압 재러 들어간 거 기억해요?
제가 처음 봤을 때 보혜님 걸음걸이가 너무 당당하고 밝게 얘기하는 모습에 보혜 님이 왜 우울증일까 의문이 들었어요. 보통 우울증 환자 대개는 무기력해서 말도 행동도 표정도 없거든요. 음.. 저희들과 여기 있는 의료진은 환자에 대한 보호와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잖아요. 선생님이나 저희들한테는 힘든 거 슬픈 거 다 얘기해도 되는데 보혜 님 보면 늘 밝은 게 그 속엔 감정을 절제하고 누르는 것처럼 보여요. 노트도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차마 보여달란 소리를 못했었는데. 역시나 그렇네요. 이 노트 누구 보여주려고 쓴 거 아니잖아요? 혼자만의 노트인데, 이 노트에서 마저 보혜 님 감정은 절제되고 억제시키는 것처럼 보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감정이 이 노트에서도 베어 나오는 걸 보면..

그냥 여기 있는 동안 만이라도 맘 껏 시간을 써요. 울고, 화내고, 나 힘들다 징징거리면서. 보혜 님 그렇게 해도 뭐라 할 사람 여기에 아무도 없어요. 저는 모든 걸 다 비우고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윤아 나이 스물셋.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다부짐에 나는 머릿속에 꾹꾹 눌러둔 생각들이 흐트러져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사실 피난처가 필요해서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된 쉴 곳을 찾아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

아니,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기보다 잡혀 들어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짧게나마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문제들을 어느 정도 해결해야 다.

꾹꾹 눌러 담으려 욕심낸 쓰레기봉투는 결국 터지기 마련인데, 나는 터지기 직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윤아 말이 다 맞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수님께 말하길 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내 안에 김보혜는 따로 있는데 남이 보는 또 다른 김보혜도 있는 것이다.

곳에서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또 가면을 손에 들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약이 좋아서 조울의 기분도 조절해주고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이다. 아직도 타인에 대한 착한사람 컴플렉스는 여전히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가면을 벗고 조금 더 나 답게 뻔뻔해질 수 있을까?

비 내리는 오늘, 잠 못드는 이 밤. 

서른에 피는 장미가 아니라 스물셋, 비록 만개하진 않았어도 가시 있는 장미라는 걸 톡톡히 보여준 그 날의 윤아에게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마음껏 빌어야 될 것 같다. 




여전히 나를 응원해주는 이젠 학생 간호사가 아닌 진정한 백의 천사 스물일곱 윤아찡 ' -'♡ 고마워.

작가의 이전글 그래도 오늘을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