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발걸음 향할 일이 없는 나로서는 서울길에마음이동할 줄 알았는데 애먼 기찻길 위에서 설레고 말았다.
전날 밤을 꼬박 지새우고 아침 일찍부터 길을 재촉하여 떠났으니 열차에서잠을 청하거나 차창밖 풍경에 젖어 복잡한 머릿속이나훔쳤어야 했는데이 놈의 핸드폰이 문제였다.
늘 내 것이라 말하지 않아도 내 것처럼 조용하던 핸드폰이 아침부터 카톡들과 각종 알림으로 요란법석을 떠는 바람에나름 신이 나서 핸드폰에 빠져들고 있을 때쯤 KTX 차내 방송 시그널 음악인 california vibes - steve varakatt 위로 "우리 열차는 잠시 후동대구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동대구? 맞아, 동대구!'
동대구란 단어에 내 의지 따위와는 상관없이 이미 내 심장은 촐싹거리고 있었다.
브라운대학교의 레이철 헤르츠(Rachel Herz) 교수가 진행한 실험에 따르면 후각(냄새)을 통한 기억. 즉, 프루투스 효과가 시·청각을 통한 기억보다 오래가고 그 날의 감정 또는 감성 전달에 더 우세하지만, 정확한 기억. 즉, 예컨대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등을 떠올리는 데는 시·청각 기억이 후각을 통한 기억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방정맞은 심장 박동 소리를 따라가니 그 언저리엔 내 첫사랑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 기차 타고 동대구역을 오간 적이 몇 번 있어'
010-8300-5143쓸데없는 기억력은 왜 핸드폰 번호를 소환하는지.뭐괜찮다.번호바꿨더라.
스무 살여름 방학, 나는 함양 용추 자연휴양림으로인턴쉽을 나갔다. (별명) 행주, 노구, 진성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임학과 동기 4명과 휴양림 관계자 연으로 알바 왔던 대구한의대생 ROTC 오빠까지 이렇게 5명은 2006년 그해 여름 휴양림을 수호하는독수리 오 남매가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며 나는처음으로 스쿠터 타는 법을 배웠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산길에서 타는 스쿠터의 맛은 제법 쏠쏠했다. 나지막이 깔린 구름을 가로지르는 맛이란 청량한 사이다를맑은 막걸리 잔에 섞은 맛이랄까? 그 맛에 취해 정말 하늘 위로 슈퍼맨이되어 날아가버린 적도 있지만 말이다.하하하. 다쳐서 아팠지만, 뭐 괜찮았다.
우리는계곡에 노는 아이들과 누가 더 피라미를많이 잡나 내기를 걸기도 하고 호루라기 삑삑 불며 "거기서는 취사 안돼요! 나오세요!"소리치고는 어느 틈에 아줌마, 아저씨 무리에 끼여 소주 한잔에고기쌈 한입씩날름 받아먹으며 애교쟁이들이 되어이 집 저 집 예비 사위, 며느리로 점 찍혀가며 섞여 놀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고 TV도 인터넷도 안 되는산속 생활이 지겨워질 때 즈음 내 책상 위에는매일 아침이면 들풀에 엮어진 들꽃 다발이 요구르트병에 꽂힌 채 놓여 있었다. 누가, 왜 가져다 놓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성수기가 되자 나의 애마(스쿠터)는 내 차지가 될틈 없이바빴다. 지뢰 찾기와 솔리테어도 할 만큼 했더니 정신없이 바쁘던 낮과는 달리 산속의 밤은 어찌나 길고 또 긴지. 사무실에서 멍하니 밤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는 나를 지켜보던ROTC 오빠가 나를 포터 옆자리에 태워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별구경을 시켜주었다.
휴양림 콘도와 방갈로, 그 속에서 바비큐 파티하는 사람들의 환희와 캠핑하는 이들의 낭만 사이에서 바라보는 별빛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불빛 한 점 없는 어두운 산속에서 볼 수 있는 밝고 영롱한 별빛과 그 별빛의 반짝임에 맞춰 지지직 거리는 잡음 너머 들려오는 라디오 DJ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분위기 아주 멜랑꼴리 하면서도한여름밤이지만 좀 서늘하고 둘이 있기엔 깜깜한 밤이라좀 무서운..?ROTC 오빠는 포터와 함께하는 멜랑꼴리한 별 관측에 나를 두 번 더 초대했는데..아마 고백하려고 그랬나 보다.
며칠 뒤, 동기 중 한 녀석이 방음 안 되는 직원 숙소 방 벽을 두드리며 나를 마구 놀리듯 말하길,
머쓰마 쉐키들 장난 놀음에 휘둘리기 싫어서 대꾸도 안 했더니 문자 폭탄질을 해대며 놀리기 시작했다. 얇은 가벽 너머 '아~ 행님', '인마', '점마', '얌마'들 끼리 난리부르스가 가관이었다.
인턴쉽이 끝나고 집에 가기 일주일 전, ROTC 오빠는 예상대로 나에게 고백을 했고 난 거절했다. 그리고 집에 가기 하루 전 오빠는 얘기 좀 하자며 정자에 나를 데리고 올라가한번 더 고백을 했고, 그땐 이미 휴양림 식구들 모두에게 소문이 난 뒤라 모두가 내 대답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난"Yes"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들꽃으로 처음 마음을 표현했던그남자는 나에게노란 제비꽃처럼 다가와 하얀 제비꽃처럼사랑해줌으로써나로 하여금비로소 보라 제비꽃을 알게 하였다.
#. 제비꽃 꽃말 노란 제비꽃 : 수줍은 사랑 하얀 제비꽃 : 순진 무구한 사랑 보라 제비꽃 :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