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의 멋

유머는 마음의 여유에서 나온다.

by 김성수

유머는 전달하고 싶은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고, 에둘러서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삶의 지혜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의사전달을 할 수 있어 좋다. 그래서 유머를 삶의 활력소, 윤활유, 심지어 만병통치약이라고도 하고, 유머의 감각은 생활의 능력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유머에도 품격이 있어 단순한 말장난이 있는가 하면 기쁨과 교훈을 주고, 통렬한 사회풍자도 있고,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일도 있다. 유머를 먹고 사는 코미디언, 개그맨은 시대의 총아이다. 재담이나 우스갯소리로 밥술이나 얻어먹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의 개그맨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다. 그들은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통렬한 사회풍자와 촌철살인, 경천동지의 날카로움으로 사회를 대변하고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근엄, 위엄만 내세우면서 사회를 어둡고, 경직되고, 메마르게 하고 있다. 기껏 한다는 유머가 실없는 농담이나 말장난 수준이어서 쓴웃음이나 짓게 한다. 서구에서는 유머를 모르는 정치인은 자격미달이라는데 우리는 유머를 즐기는 정치인은 실없는 사람이기 십상이니 여의도에 가면 우거지상들이 멱살드잡이에 얼굴이 벌겋다.

유머 감각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삶의 정신적인 여유에서 나온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사람이라도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면 유머는 생기지 않는다. 반대로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더라도 정신적인 여유만 있다면 유모어는 있을 수 있다. 그 정신적인 여유란 유연한 사고와 자신감에서 나온다. 유연한 사고나 여유가 없으면 매사에 각박하고 경직되기 마련인데 그런 가운데에서 유머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정치인들이 유머를 할 줄 모르는 이유는 정치적인 역량이 부족하여 정신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능가하는 식견이나 지혜가 없으니 매사에 급급해 할 수밖에 없고, 능동적인 사고를 할 수 없으니 유머를 부릴 여유가 없다. 정치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유머를 모르는 노인도 삶에 대한 자신감이나 여유가 없어서이다. 유머를 모르는 것을 노인의 위엄으로 퉁치려 하지 말고 좁은 소견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웃음이 건강에 좋다 해서 떼지어 억지웃음 운동을 하는 노인들은 보기에도 애처롭다. 그보다는 지혜와 여유를 쌓아 가족과 이웃을 웃길 수 있다면 더 살아도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이다.


노인들이 위엄을 차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의 품격이나 권위를 지켜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엄으로는 강압적인 굴복은 시킬 수 있어도 자발적인 존경은 이끌어낼 수 없다. 소통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유머는 젊은이와 소통을 하여 세대차를 완화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노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이요 지혜이다. 그런데 노인들은 위엄과 권위를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실없는 소리를 해서는 권위와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없는 소리와 유머는 전혀 다른 것이다. 풍부한 경륜과 통찰력으로 신세대보다 한 차원 높은 가치관을 갖고,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유머가 생길 것이다. 그들을 능가하는 여유로 유머 감각을 발휘한다면 노인의 품격과 지혜와 권위를 동시에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노인들은 여유는커녕 젊은이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니 유머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기껏 알량한 권위와 위엄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한 권위와 위엄은 존경은 받을지 몰라도 사랑은 받지 못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존경을 멀리서 하는 존경, 경원(敬遠)이라고 한다. 가까이할 수 없는 경원은 고립을 면치 못한다. 유머는 고립을 친근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사람들에게 근엄한 위엄만 보이려 하지 말고, 알량하게 베풀어준 공덕만 내세우지 말고, 젊은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사회적 과오도 생각해야 할 일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을 정치인들에게만 돌리지 말고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다면 노인이라 해서 위엄과 권위만 내세울 수 없는 일이다.


유머는 나에게는 자신감을 주고, 상대방에게는 웃음과 교훈을, 사회에는 활력을 줄 수 있다. 유머에는 그런 노인의 여유와 활력이 묻어난다. 물론 여유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유머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유머 감각을 익히려고 노력한다면 여유마저 생길 것이다. 유머를 즐길 줄 아는 노인은 보이지 않는 위엄마저 있을 것이다.



꽃에 취한 술의 노래

鄭 澈


꽃이 오래면 홍작약이 되고 花殘紅芍藥

사람이 영글면 정돈녕이 되는 것. 人老鄭敦寧

꽃을 끼고 술을 마주하걸랑 對花兼對酒

마땅히 취하여 깨지 말지어다. 宜醉不宜醒 <우리시로 읽는 漢詩>에서


원 제목은 對花漫吟(대화만음), ‘꽃을 읊다’이다. 그러나 그냥 꽃의 예찬이라고 하면 이 시의 재미는 사라진다. 여기에서 花는 그냥 꽃이 아니라 시든 작약이고, 시든 작약은 꽃이 아니라 나이 든 기녀이다. 정돈녕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시인 정철이다. 그는 조선의 유수의 정치인이요, 뛰어난 문인이며 왕의 인척으로 돈녕을 지낸 풍류재상이었다. 그러므로 꽃과 작약, 늙은이와 돈녕은 교묘한 중의적 비유물이다. 나이 든 기녀와 풍류남아가 세월과 늙음을 한탄하는 것은 사철한 현실인식이라 하겠지만 술잔을 기울여 위와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면 서러운 노년이 아닐 것이다.

썩어도 준치이고, 한 물 간 미인이라도 여자이다. 더구나 옆에 앉힌 원숙한 미인처럼 감칠맛 나는 술이 있다면 피차 나이는 무엇이고, 인사불성인들 어떠랴? 요즘 같았으면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호통쳤겠지만 그럴 염치는 알아서 이렇게 능청을 떨었을 것이다. 더구나 요즘 같은 노령화시대라면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못 간다고 전해라’고 억지를 부리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능청과 넉살은 노년의 품격과 여유를 드러내는 유머의 멋이다. 준엄한 표정관리보다는 이런 유머라도 즐길 수 있어야 노년이 노년답지 않을까?

제목을 ‘꽃에 취한 술의 노래’라고 옮긴 이유는 ‘술이 노래를 불렀다’라는 이상한 말이 아니라 자신을 술로 바꾸어 놓은 유머로 보았기 때문이다. ‘미색에 취한 늙은 난봉꾼의 노래’가 더 솔직한 말이지만 능청스러운 노인의 유머는 이런 불상사를 풍류의 멋으로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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