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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Jan 07. 2021

교사의 비애 1

교사의 비애는 교사 양성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교육의 주체는 당연히 국가요, 교사이다. 국가는 사회에서 필요한 교육과정을 마련하고, 교사는 교육과정에 의해 학생에게 교육을 수행한다. 그리고 국가는 우수하고 성실한 교사를 양성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국가와 교사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원래 교육강국이었던 우리의 전통은  일찍이 교사양성 제도가 있어왔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을 양성하는 사관학교,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의과대학처럼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은  사람의 인격을 기르는 교사양성 전문교육 기관이다. 교사는 교육을 수행해야 하므로 인지력도 갖추어야 하지만 그 목적에 맞는 소양과 사명의식이 더 중요하다. 사관학교가 건강한 신체와 국가관을, 의대가 인술을 펴는 사명감이 전제조건이듯이 교사양성 대학은 당연히 사명의식과 모범이 되는 인성을 갖춘 교사를 선발하고 양성해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일이 교육이요, 교사이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서라도 교사선발 제도를 보면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이미 30년을 이어온 교사선발 제도인 교사임용고시는 남발하는 교사자격증 소지자 중에서 약간의 지식과 암기력을 갖춘 시험기술자를 골라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모자라서 교육의 전문성을 무시한 채 기간제, 시간제, 임시직 교사를 취업 대책으로 내세우는 형편이니 이 땅의 교육당국은 교육의 전문성이나 교사의 중요성에 철저히 무지하다. 우리 교육의 비극과 교사의 비애는 교육정책 당국의 무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교사를 이렇게 우습게 아는 원인은 미국의 교육제도와 풍토를 우리 교육의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특유의 광역문화, 다중문화, 이동문화, 개척문화 등으로 해서 우리의 단일, 정착, 전통문화와는 여러 가지로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교육사상이나 제도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교사에 대한 인식도 일반 노동자와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일정한 지식만 갖추면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군사부일체라는 인식으로 교사의 권위와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우리의 전통문화는 그들과 전혀 다르다. 우리의 사범대학에 해당하는 것이 College of Education이나NormalUniversity인데 우리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의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우리의 교육대학, 사범대학에 해당하는 적절한  교육기관이 따로 없다는 것은 그들의 교육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교육제도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저들의 이동문화 교육제도를 정착문화인 우리 교육의 현장에 맹목적으로 적용시킨 것이 문제이다. 이동문화는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전통은 거추장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나 정착문화는 경험을 통하여 적화된 문화전통을 지켜야 가치 있는 문화이다. 전통이 늘 좋다가 아니라 우리 문화는 전통문화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적어도 우리 문화에 맞는 교육은 우리의 교육제도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 교육사상과 교권 존중의 전통을 낡은 유산으로 치부하고, 우리 문화와는 전혀 다른 미국의 교육사상과 제도를 따르지 못해 급급해하는 우리 위정자들에서 오늘날의 교육, 교단 위기의 단초를 찾아야 옳다.

  신발이 안 맞으면 다른 신발을 찾아야 하건만 내 발을 깎아서 억지로 신발에 맞추려는 짓이 삭족적리(削足適履)이다. 우리의 서구문화 수용방식이 그렇다. 중국에서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되 전통문화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東道西器(동도서기)를 대원칙으로 삼았고, 그것이 오늘날 중국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 해당하는 우리 나름의 자주적 이념이나 구호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것을 ‘주체사상’이라고 하고 싶지만 북한에 선점당하여 오히려 금기어가 되었다.  그러한 구호 용어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가치관이나 인식이  없었던 것이 문제이다. 서구의 교육철학을 모방하기에 바빠서 우리의 교육철학에 무지하거나 교사양성제도 하나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교육위기가 우연이 아니며, 쉽게 수습될 것 같지 않다는 걱정이 크다.  

  교육에 무지하고, 교사의 역할을 이렇게 우습게 알기 때문에 사범대학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인가하여 웬만한 대학에 사범대학 없는 곳이 없다. 그래서 해마다 교사임용고시의 평균 경쟁률이 수 십, 수 백대 일에 이른다. 경쟁률이 높으면 우수한 인재를 뽑을 수 있어 좋을 것 같지만 교육자의 요건은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심성과 열정, 사명감이다. 지나친 경쟁률은 운 좋고, 머리 좋은 교사 지망생의  취업을 도와 줄 수는 있겠지만 정작 사명감에 넘치는 진정한 예비교사를 지쳐 좌절하게 만든다. 무한경쟁을 자랑삼아 순수한 교사지망생을 희생시키지 말고, 교원양성 기관에 입학하는 인재를 정선하여 전문 과정을 익히게 해야 한다. 인격과 심성과 사명감을 가진 교사를 단 한 번의 임용시험으로는 가려낼 수 없다. 군인은 사관학교라는 엄정한 양성기관을 유지하면서, 의사는 의대라는 과정을 준수하면서, 교사는 아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사를 단순한 노동자 취급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교사양성기관을 방만하게 인가하여 살인적인 경쟁률을 만들어 놓았으니 예비교사들은 교사가 되기도 전에 진이 빠지고, 초죽음이 된다. 그 많은 사범대학에서 배출되는 예비교사들은 어찌하라고 수준의 고하를 불문하고, 경제적 효율만을 따져 임시직 교사를 10%를 넘기라고 강요하고 있다. 교육부는 교육을 관장하는 부처가 아니라 일자리나 만들어 내고, 직업소개나 하는 곳인가 싶다.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를 선발하는 것도 그래야 옳다. 그런데 교육의 주체인 교사를 노동자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교사의 비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백년대계를 망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교사자격증을 얻은 후 교단에 서려면 평균 5년 이상을 임용고시에 매달려야 하는 형편이다. 그러다 보면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겨야 하고, 병역을 마치면 서른 중반넘어야 겨우 첫 발령을 받을 수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에 얼마나 많은 교사 지망생들이 지치고, 좌절해야 하는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교단에 섰다 하더라도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과는 너무 다른 학교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사 초년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말도 있지만 교사의 비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사 발령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교사들은 언제까지 이런 비애를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 그런 슬픈 얘기가 여기서 그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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