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비애 2
교권(敎權)은 교사의 생명이다.
천신만고 끝에 임용고시에 합격했지만 그것은 열망했던 등용문이 아니라 고생문이기 십상이다. 옛말에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고 했으니 원래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교육자는 영예로웠으되 고달픈 인생이었다. 그러니 교사의 길을 가르치는 즐거움만으로 만 생각했다면 거기서부터 잘못이었다. 그래도 옛날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였으니 교사는 가르친다는 보람과 긍지로 살 수 있었다. 임금과 부모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았으니 교사는 직업이기 전에 존경받는 인격체였다. 그러나 지금의 교사는 취업난의 와중에서 비교적 안정된 직업 중의 하나일 뿐이고, 그런 사실에 교사 자신도 별 불만이 없는 듯하다. 치열한 교사임용고시가 그러한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진정으로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교사들은 꿈꿔왔던 교육과는 너무 다른 현실에 비애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긍지와 권위의 인격체에서 한낱 지식의 전달자요, 입시의 기술자로 전락한 처지에 불만이 없다면 교사를 천직으로 감수했거나, 교사로서의 긍지와 권위를 포기한 사람이 아닐까? 교사는 교육의 주체라고 배워왔지만 현실은 이미 교육의 주체에서 보조자로, 전문직에서 평범한 생활인으로 밀려나 있다. 지금 교직생활에 이러구러 견뎌내고 있는 생활형 교사도 적지 않지만 사명감에 차 있는 교사일수록 소신보다는 생존수단에 급급해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맹자는 교육이 인생삼락(人生三樂)이라 했으니 교직생활 중 가장 보람 있는 것은 제자를 기르는 기쁨이다. 제자를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소중한 일이었던 것이 우리 교사의 긍지였다. 그러나 흔히 하는 말로 ‘교사는 있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으나 제자는 없다’가 여지없이 들어맞는 시대이다. 권위와 소신이 없는 교사가 어찌 제자를 얻을 수 있으며, 교사를 존경하지 않는 학생에 어찌 스승이 있으랴? 교사가 늘 만나는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같다면 어떻게 존경할 수 있을까? 제자를 가르치고 싶다면 권위와 실력과 애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건만 한낱 직업인으로서 학생에게 수시로 평가를 받아야 하고, 학부모에게 시시콜콜 간섭을 받고, 주민에게 고발까지 당한다면 무슨 권위를 세우고, 어떻게 존경을 받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교사는 교권(敎權)이 없다. 교권이란 교사의 ‘권위’이다. 권위라고 하면 전근대적인 ‘권위주의’를 경계하기 쉽지만 교사가 학생을 압도하는 권위가 없다면 교육은 성공할 수 없다. 교사가 지식이나 인격에서 모범이 되지 못한다면 배울 의욕이 생길 리 없고, 인격적으로 뛰어나지 않다면 신뢰와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다. 교권이란 지식과 인격적 수범이지 결코 헛된 위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권은 전근대적, 비민주적이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고, 교사 자신도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교사는 권위의식에서 벗어나 학생의 인격과 학습권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민주교육이라고 믿는다. 권위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존재가 바람직한 교사상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물론 그것이 인간적이고, 시대에 걸맞은 사고방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래서는 교권은 서지 않는 법이다. 교권이 비록 교사중심의 권위의식임에는 틀림없지만 교권이 없는 가운데에서 교육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민주적인 교육, 학생의 인격과 학습권 보장, 체벌금지, 교사 처우개선도 중요하지만 교사한테는 교권에서 나오는 존경과 신뢰가 더 중요하다. 오늘날의 교육이 과거 권위시대의 교육보다 더 성공적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 판단이 어떻건 교권, 존경, 신뢰는 고사하고 무시, 홀대, 혹사, 폭행, 심지어는 고발까지 일어나는 일이 흔한 우리 교육현장은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
교편(敎鞭)이란 말은 교육적 체벌에서 나온 말이다. 교사가 체벌을 하는 것은 일면 폭력적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사랑의 매’로 여겨져 왔었다. 그러나 이제 체벌은 있어서는 안 될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그것이 과연 인권존중이요, 민주적, 인권적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인간적인 체벌을 인격적 감화로 대신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정작 교사에게 인격적 감화란 지극히 어려운 부담이다. 바람직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교권과 교편을 빼앗긴 오늘날 우리 교사는 너무 힘들다. 그래서 더 많은 교사는 교실에서 인격적 감화가 아닌 무기력, 체념, 좌절, 포기를 선택하게 되었다. 교사도 평범한 생활인일 뿐이라는 자세로는 교육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건만 우리는 그냥 수수방관하고 있다.
요즈음 교사의 비애를 생각하면 교편을 잡다가, 교권을 누리고 교단을 떠났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스승을 만들어 주지 않는 시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옛날 존경받던 스승은 자신이 훌륭해서라기보다는 스승을 만들어 준 제자가 훌륭해서가 아니었을까? 내 경우로 말하면 옛날의 제자는 아직도 연락이 닿지만 근래의 애들 소식은 듣기 힘들다. 옛날에는 스승이었고, 근래에는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니 스승이 잘나서가 아니라 제자가 훌륭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즈음의 교사들이 더 뛰어난 사명감과 실력을 가지고 오히려 학부모와 학생에게 푸대접을 받는 현실을 보면 교사의 비애가 교사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해마다 교사임용교시의 경쟁이 치열하고, 어린 학생들의 교사 선호도가 높게 나온다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경제 형편이 나아져도 지금처럼 교사임용고시의 경쟁이 치열할지는 큰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