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좋아한다 해도 한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 중에 한시 같이 예술성을 두루 갖춘 시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자유시가 대세이지만 시란 원래 노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규칙적인 음악성, 운율이 본질이었고, 그것을 가장 잘 갖춘 것이 정형시입니다. 한시는 가장 완벽한 정형시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참맛을 알려면 한시를 읽어야 하고, 그래서 한시는 ‘시 중의 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한시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 신세대에게는 암호에 가까운 괴물입니다. 이 괴물의 암호를 우리말로 풀어낸다면 많은 시 애호가들이 시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압축, 함축이 본질입니다. 압축, 함축에는 뜻글자인 한자가 훨씬 유리합니다. 뜻글자는 가장 정치한 시어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한시는 간결한 압축, 함축과 동시에 가장 효율적으로 섬세한 시적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자는 음의 고저장단(高低長短)이 엄격해서 음악성이 매우 풍부합니다. 한시는 시어의 고저장단을 일정한 규칙에 의해서 배열하므로 가장 음악적인 시입니다. 그러나 이 음악성을 우리말로 옮겨낼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시는 각 행마다 대립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구(對句)를 매우 좋아합니다. 대구야말로 가장 예술적으로 시어를 구사하는 수단입니다. 한시의 대구는 우리 시에서는 따를 수 없는 언어기교의 진수입니다.
한시를 가까이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말로 옮겨진 한시를 음미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인내심만 가지면 가능한 일입니다. 한시를 우리 시로 옮겨보는 것은 가장 좋은 우리 시 창작법이 될 수 있습니다. 산문의 번역은 일정해야 하지만 한시의 번역은 번역자에 따라 달라야 정상입니다. 언어의 다양성에도 원인이 있지만 시는 산문과는 달리 시인의 섬세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를 개성적으로 표출하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한시의 감상은 그런 감정의 공유와 이입도 풍부하게 합니다. 시의 번역은 글자의 뜻을 충실히 옮기는 것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작자의 시적 의미인 시의(詩意)는 물론 시의 형상화인 시경(詩境), 주제의식을 옮겨내는 것이 번역자의 임무입니다.
한시라면 머리부터 굳어지는 사람도 많겠지만 약간의 관심과 인내심과 시에 대한 얼마간의 열정만 있다면 시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에 한계가 크지만 이 기회를 통하여 보다 많은 독자와 한시에 대한 감동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한시의 번역에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한시집이나 인터넷에 이미 많은 한시 번역이 있지만 구태여 여기에서 새로 번역을 하는 이유는 이제는 한시를 한시답게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물론 한시에 대한 조예가 깊은 독자가 있다면 대환영이요, 얼마든지 가르침을 청할 것입니다.
이제 한시 한 편씩 옮겨볼까 합니다. 같이 한시를 옮겨본다는 생각으로 번역과정도 함께 밝혀보았습니다. 물론 내심으로는 이보다 더 뛰어난 번역을 기대합니다.
달 긷는 스님 詠井中月영정중월
이규보
동자승은 샘물에 뜬 달빛이 너무 좋아서
山僧貪月色 산승탐월색
동이에 달까지 길어 담았지.
幷汲一甁中 병급일병중
절에 가서야 비로서 깨달았네.
到寺方應覺 도사방응각
물을 따르면 달 또한 空이었음을.
甁傾月亦空 병경월역공
산승은 산에 사는 스님. 그런데 하는 짓을 보면 순진하고 귀여운 동자승이 눈에 선합니다. 시인은 이를 탐욕이라고 했지만 달빛을 긷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순박한 동심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달빛도 하늘에 뜬 것이 아니라 샘물에 비친 달이라고 옮겨야 합니다. 원시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그것을 옮기지 않으면 원시가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급(汲)이란 물을 긷다. 幷은 같이. 본래 길으려 했던 것은 샘물이지만 길은 것은 당연히 달입니다. 원시에는 달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번역시에 달이 빠지면 원의가 아닙니다. 병甁은 고급스러운 유리병보다는 산사에 어울리는 질그릇 동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좋을 듯싶습니다. 中은 압운을 맞추기 위한 글자이므로 구태여 ‘병 속’이라고 옮겨서 시를 어색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方방은 바야흐로, 그제야. 절에 가서 물동이에 담은 물을 물독에 붓고 나서야 비로소 진상을 깨달은 것입니다. 물동이만 空공이 아니라 달도 역시 空이었다는 도리를- 산사 사미승의 순박한 행동을 통하여 空의 진리를 시로 표현한 시인의 뛰어난 솜씨를 옮겨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물을 길어온 동자승이 샘물에 비친 달이 너무 좋아서 달을 조심스럽게 바가지에 떠서 물동이에 담았습니다. 물을 길은 것이 아니라 달을 길은 동심이 동시처럼 반짝입니다. 절에 돌아가서 부처님께 공양드리고, 방에다가 달을 놓고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에 비친 달은 하늘의 달만큼이나 나하고는 먼 것입니다. 물동이의 물을 따르고 나면 달은 벌써 없어진다는 사실을 동자승은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는 인생사 모두가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동자승의 어리석음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천연스러움을 부러워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산승이 달빛을 탐내서 한 병에 같이 길었네. 절에 도착해서 바야흐로 깨달았네. 병을 기울이면 달도 역시 비었다는 것을-’ 라고 번역했다면 글자를 충실히 옮겼지만 시의 맛은 잘 느낄 수 없는 이상한 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번역한 이상한 한시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