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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Mar 04. 2021

죄와 법

법은 죄를 만들고, 정의는 양심을 낳는다.

  걸핏하면 ‘법대로 하자’는 세상이고 보면 법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능인가 싶다. 그래서 법치주의가 최고의 통치술로 환영받던 역사가 적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법 만능주의인 법가(法家)를 위시하여 유가(儒家), 불가(佛家)의 율법의 전통이 이어져 왔었고, 서구에서도 기독교의 율법과 절대군주의 법률이 엄격히 지켜져 왔었다. 그러나 정작 율법, 법률시대의 국민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법치주의가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다. 법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얽어매기 위한 수단이다. 선한 인간에게는 법이 필요 없거나 법의 피해자일 뿐이다. 법이 횡행하거나 법치주의가 통치하는 사회는 비인간적이거나 악의 세계였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해왔다. 그러니 ‘법대로 하자’라는 말은 세상이 비인간, 죄인의 시대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태여 성선설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법 없이 살 사람이 적지 않은데 모든 것을 법대로 하자면 좋은 세상이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법을 덮어놓고 비난할 수도 없다. 법이 없다면 죄인과 악인을 다스릴 수 없거니와 법 없이 사는 사람도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罪(죄)자는 ‘罒 + 非’로 만들어졌다. 罒는 그물(網)이고, 非(비)자는 사물이 서로 등지고 있는 모습이라는데 그 의미는 ‘옳음’(義)을 등지고 위반한 ‘그른(不義)’것이다. 다시 말하면 罪자는 ‘非(그름)를 罓(법)으로 구속한’ 의미이다. 그리고 非는 법을 위반한 백성이고, 罒은 백성을 잡아들이는 그물인 셈이다. 법치주의자들은 법으로써 범죄자를 처벌하면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처럼 말하지만 그에 앞서 법은 국민을 잡아들이는 그물이다. 법이 발달할수록 국민을 잡는 그물은 촘촘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건 법이 많을수록 범죄도 늘어나게 되어있다. 선량했던 사람도 법에 몰리다 보면 이판사판이 되는 법이다. 법이 엄한 북한이나 중국은 범죄자도, 사형수도 제일 많다. 법치주의 사회의 국민은 행복해질 수 없음을 지척에서 증명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러자는 말인가? 


  법도 그렇지만 罪도 글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법이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교활한 인간은 촘촘한 법망을 피해서 얼마든지 탈법과 위법을 저지른다. 그 폐해는 법을 어기는 범법자보다 더 크지만 법은 법망을 피해가는 법꾸라지들을 감당할 수 없으며, 그들은 법망을 교묘히 이용해 더 큰 불의를 저지른다. 범죄가 분명한데도 법이라는 것이 죄의 유무가 아니라 증거의 유무만을 따지고 있으니 법치만능 주의의 한계가 분명한 것이다. 신발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발에 맞추어 사면 된다. 그런데 자신의 발 치수를 기억하지 못해서 신발을 사지 못한다면 범죄는 분명한데 증거가 없어 처벌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른가?


  법치주의는 법의 한계와 죄의 애매함을 극복해야 한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법을 어기는 범죄보다 정의를 어기는 불의이다. 좀도둑에 불과한 범죄나 단속하고, 인륜을 어긴 불의를 잡지 못하면 세상이 행복해질 수 없다. 범죄 없는 독재국가의 국민보다 정의로운 민주사회의 국민이 행복하다. 그러므로 법치보다는 정의가 살아있는 복지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서양에서는 죄에 대한 개념이 우리보다 더 철저한 듯하다. 법은 범법자의 Crime -罪- 만을 다룰 수 있다. 그 나머지 Sin, Vice, Offence는 도덕, 종교, 관습적인 것으로 법으로서는 다룰 수 없는, 우리의 非, 不義에 해당한다. 죄에 대한 이러한 분별이 있었기에 그들은 함부로 법치주의를 남발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법치주의를 정의 –Justis- 로 착각하고, 걸핏하면 법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법과 죄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이제는 법치주의만 탓할 것이 아니라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非, 불의를 경계하는 민주시민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참에 죄에 대한 인식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위법은 당연히 죄이지만 불의도 죄라는 인식이 있어야 정당한 민주시민일 것이다. 준법도 좋지만 정의에 어긋나면 역시 죄라는 자각이 양심이지 않을까 싶다.  


  천주교회에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다. 지은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고백하는 죄는 법을 어긴 것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어긋났다면 고백해야 할 죄이다. 십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더라도 불의라면 고백해야 할 죄이고, 범법이라도 정의라면 고백해야 할 죄가 아니다. 규범을 어겼더라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면 선행이고, 계명을 지켰더라도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했다면 죄이다. 죄와 덕은 드러난 밖에 있지 않고,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고해성사의 교리적인 정당성을 따지기에 앞서 죄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해성사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이런 마땅한 도덕, 윤리의식이 허물어지고 있다. 법치주의가 힘을 얻는 것이 그 증거이다. ‘법대로 하자’는 것은 법리와 증거만을 가지고 범죄의 여부만을 따지자는 것이다. 불의와 범죄가 분명한데도 증거가 없다고 죄가 아니라고 판결하거나, 죄보다 범죄를 잡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면 분명히 잘못된 법이다. 그런 해괴한 법리(法理)로 정의와 진실이 바로 설 리가 없다. 법은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범죄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 있다. 법은 죄를 만들지만 정의는 양심을 낳는다. 법보다는 양심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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