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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Apr 16. 2021

漢詩를 우리 시로읽으세요 6

탁발승의 지팡이

   

        斷橋歸僧단교귀승     鄭澈정철(1536-1593)     

 

 저녁 숲에 산까치 날아들고            翳翳林鴉集

 저 멀리 골짜기로 날이 저문다.       亭亭峽日曛◉대우 

 돌아오는 탁발승의 구절장에는       歸僧九節杖

 만산의 구름이 휘감겨 있구나.        遙帶萬山雲◎ 압운

                                     <우리시로 읽는 漢詩>


  이 시는 전체가 경치의 묘사로만 되어있는 서경시(敍景詩)입니다. 흔히 한시는 전경후정(前景後情)이라 해서 1, 2구는 경치 배경, 3, 4구는 주제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가 경치로만 되어 있죠. 경치를 통해서 산간한정(山間閑情)의 경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특이한 수법입니다. 속세를 건너 돌아오는 고승의 경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해 낸 재치를 옮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단교(斷橋)란 세속과 인연을 끊고 돌아온다는 다리인 단속교(斷俗橋)입니다. 虎溪三笑(호계삼소)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호계를 건너면 세속을 벗어나기 때문에 호계를 건너면서 크게 웃어 탈속을 통쾌해했다는 말입니다. 충남 공주 사곡면에는 개울이 흐르는 호계리가 있고, 그 안에는 마곡사(麻谷寺)가 있습니다. 만약 절이 단속사(斷俗寺)였다면 이 시의 배경이 될 뻔했습니다. 이 밖에도 공주에는 신선스럽고 낭만적인 지명이 많습니다. 봉황이 산다는 봉황산(鳳凰山)이 있고, 그 아래는 봉황이 먹고 사는 대나무 열매가 열리는 반죽동(斑竹)입니다. 무령왕릉에서 봉황과 대나무 나온 것을 보면 그 이름이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다른 이름도 범상치 않습니다. 그 옆에는 신선이 타고 다니는 금학(金鶴)동이 있고, 선학(仙鶴)리, 소학(巢鶴)동, 송학(松鶴)리, 학봉(鶴峰)리 등 학이 살던 곳이 많습니다. 무릉(武陵)동, 월송(月松)동, 월곡(月谷)리, 운궁(雲宮)리, 기산(箕山)리, 화헌(花軒)리는 별천지 신선들이 살던 마을입니다. 계룡(鷄龍)산은 말할 것도 없고, 옥룡(玉龍)동, 흑룡(黑龍)리, 청룡(靑龍)리, 오룡(烏龍)리, 백룡(白龍)리, 대룡(大龍)리, 복룡(伏龍)리, 용봉(龍鳳)리 등 곳곳이 용들이 서려있던 곳입니다. 금강이 절경인 창벽(蒼壁), 금벽(金壁)을 끼고 흐르고 있고, 교육도시라 일찍이 교동(校洞)도 있었습니다. 공주는 어디를 가더라도 공주처럼 예쁜 산과 물을 만날 수 있는데 이런 지명들이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翳예翳예林임鴉아集집              亭정亭정峽협日일曛훈.

  翳翳는 ‘어둡다’이지만 땅거미 지는 때이므로 ‘저녁’이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산까치가 사는 곳이니 ‘숲’이 보완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林鴉를 ‘숲속의 까마귀’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集은 산까치가 ‘날아든다.’. 集자는 원래 나무에 새들이 모여앉아 있는 모양(隹 + 木)을 본딴 글자입니다.

  亭亭은 ‘멀다’의 의태어입니다. 峽은 골짜기, 曛은 ’저물다‘입니다. 저 멀리 골짜기에 날이 저문다. 그런데 1행과 2행은 한시의 대우(對偶)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翳翳와 亭亭은 첩어와 의태어, 부사어로 철저히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1행과 2행의 각 글자는 음의 높낮이(平仄) 또한 철저히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음의 대립구조는 우리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생략하지만 한시의 중요한 수사 수단입니다. 이러한 대립구조를 대우(對偶)라고 하는데 우리의 대구와 가깝습니다만 그것보다는 훨씬 철저하고 치밀합니다. 이러한 통사적 대립구조를 최대한 살려서 옮겨야 합니다. 이왕이면 대립이 되는 두 행은 길이도 비슷하게 맞추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 숲에 산까치가 날아들고, 저 멀리 골짜기로 날이 저문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대우가 아니라면 ‘-날아드는데’라고 해서 인과관계로 연결해야겠지만‘-날아들고’라고 해서 대등관계로 옮겨야 대우가 살아납니다.     

    

  歸귀僧승九구節절杖장  

  僧은 음절을 생각하여 ‘道僧’ ‘탁발승’이라고 한다면 詩意에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도승이라고 하면 시의가 좀 무거워지고 반전의 묘미가 적어 탁발승이라고 하는 것이 시경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탁발승의 지팡이에 만산의 구름이 감겨있다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연과 인간이 화합한 경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발한 장면입니다. 비록 탁발승이지만 세상의 진리에 통한 법력의 경지를 상징한 것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자연의 오묘한 섭리도 ‘구절장에 감겨있는 만산의 구름’에서 무언 중에 드러나 있습니다. 구름을 휘감고 있는 스님을 생각해 보세요. 구절장은 마디가 아홉인 대나무 지팡이입니다.      

 

 遙요帶대萬만山산雲운

  遙帶는 ‘둘러치다’ ‘휘감다’, 萬山은 ‘모든 산’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돌아오는 탁발승 구절장은 만산의 구름을 휘감고 있네’라고 번역한다면 또 다른 詩想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탁발승의 법력과 경지가 한층 뚜렷해질 것입니다. 탁발승의 법력인가, 자연의 위대함인가? 작자의 의도가 분명치 않은 가운데에서 이 또한 번역의 묘미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이 결정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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