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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우리 시로읽으세요 11

손끝에맺인이 내음을 어찌하리까?

by 김성수


濟危寶제위보 李齊賢이제현(1287-1367)


버드나무 늘어진 시냇가 빨래터에서 浣紗溪上方垂楊◎

백마 탄 사내와 손을 잡고 사랑을 나누었네. 執手論心白馬郞◎

석 달 이어내리는 처마 낙숫물인들 縱有連簷三月雨

손끝에 아리는 이 내음을 어이 씻을까? 指頭何忍洗餘香◎

<우리시로 읽는 한시>

이 시의 서(序)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부인이 죄를 지어 제위보에 부역을 하였다. 외간 남자에 손을 잡힌 한을 씻을 길이 없어 이 노래를 불러 자책하였다. 이제현이 이를 漢詩로 풀이했다. (婦人以罪 徒役濟危寶 恨其手爲人所執 無以雪之 作是歌以自怨 李齊賢作詩解之曰).” ‘풀이했다’라는 말은 우리 시를 漢詩로 번역했다는 말입니다. 제위보는 고려시대에 있었던 빈민구제 기관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죄를 지은 여인네의 심경을 읊은 우리 말 노래를 이제현(李齊賢)이 漢詩로 번역한 소악부(小樂府)입니다. 소악부란 우리 민요나 시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원작은 우리 시가문학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漢詩를 우리 시로 번역하는 것은 원래의 우리 민요로 되돌려 놓는 작업인 셈입니다. 그만큼 우리 시답게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소박한 민요라고 하지만 고도의 은유와 아이러니의 수단을 발휘한 점에서 뛰어난 문학 작품입니다. 특히 結句의 교묘한 상징적, 중의적(重義的) 표현이 原歌의 모습이었다면 이야말로 고려가요의 걸작품이고, 그것이 이제현의 번역 솜씨에 의한 것이라면 이 소악부 자체만으로도 역시 걸작이 틀림없습니다. 한글이 없었던 시대에 선인들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이런 우리의 문학유산은 전부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악부를 漢詩라 하여 국문학에서 버린다면 선인의 노력이 담긴 소중한 국문학 유산을 스스로 버리는 짓이 될 것입니다.


浣완紗사溪계上상方방垂수楊양.

浣紗溪는 작은 시냇물로 아녀자들의 빨래터입니다. 上은 빨래터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시어이니 따로 옮길 필요 없습니다. 方도 ‘바야흐로’이지만 현재진행형 ‘늘어진’으로 옮기고 생략하는 것이 좋습니다. 垂楊은 수양버들로 우리 문학 작품에서 보통 여인의 날씬한 허리를 상징하는 말이요, 남녀 간 애정이 실현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垂楊보다는 ‘늘어진 버드나무’가 시경에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시냇가 빨래터에 버드나무 늘어졌는데’보다는 ‘버드나무 늘어진 시냇가 빨래터에서’가 나을 것입니다. 버드나무가 늘어진 것보다는 빨래터라는 공간에서 사건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시의 어순을 꼭 지켜 번역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시는 운율을 지키기 위해서 어순을 바꾸는 일이 흔한데 이에 구속된다면 시의에 어긋나는 번역이 될 것입니다.

執집手수論논心심白백馬마郞랑.

執은 잡다. 白馬郞은 흰 말 탄 사내, 執手論心과 白馬郞은 어순이 바뀐 곳이므로 ‘백마 탄 사내와 손을 잡고 사랑을 나누었네.’라고 바로 잡아서 번역해야 좋습니다. 옛날에는 남자에게 손을 잡힌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조를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라면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보다 좀더 자유로운 풍조였으니 더 짙었던 애정행각을 그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르죠. 손 한 번 잡았다고 강제노역형에 처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백마랑은 지금으로 말하면 오렌지족 바람둥이였을 것이니 일종의 풍기문란 사범이었습니다. 論心은 마음을 논했으니 ‘사랑을 나누었네.’라고 좀더 적극적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縱종有유連연簷첨三삼月월雨우.

縱은 ‘비록’이고, 有는 서술어의 조사로 투영시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三月雨는 ‘석 달 이어지는 비’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오랫동안 씻어내어도 씻겨지지 않는다’라로 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손을 자꾸 씻어내는 것은 외간 남자에게 손을 잡힌 치욕을 씻어내려는 참회의 행위입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낙숫물이라고 합니다. 連은 ‘연이어서’라고 해석하여 ‘석 달 이어내리는 처마 낙숫물인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낙숫물인들’이라고 한 것은 치욕을 씻어내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詩意를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 달 이어내리는 처마 낙숫물인들’이라고 했습니다.


指지頭두何하忍인洗세餘여香향.

指頭의 頭는 ‘머리’가 아니라 백화문체에서 쓰는 접사이므로 묶어서 ‘손가락’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何忍은 작중 화자의 목소리여야 하므로 ‘어찌 견디랴?’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洗餘香-‘남은 향내를 씻어내다’를 옮기기가 만만찮습니다. 시의 서문으로 보아서는 여인이 남자와 풍기문란의 죄를 뉘우치는 내용이어야 하는데 4구는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무엇보다도 삼 개월 동안 치욕을 빗물에 씻어내려고 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끊이지 않는 香’이어서는 이제현의 서문의 풀이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삼 개월 동안이나 씻고 또 씻어도 끝내 지울 수 없는 것은 백마랑에 대한 떨치기 어려운 ‘원망스럽고도 그리운 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香에는 ‘수치’와 ‘그리움’이 교차되는 미묘한 감정이 얽혀있어 마땅한 시어를 찾기 어려워 여기에서는 ‘아리는 내음’이라고 해 보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는 이러한 모순된 애정의 심경을 고도의 중의법, 이중노출의 기법을 통하여 교묘하게 표현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詩境을 번역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손 끝에 맺힌 내음을’이라고 하고, ‘손끝에 아리는 이 내음을 어이 씻을까?’라고 했습니다만 역시 이 걸작을 옮기기에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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