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피해 커피집에 갔는데 입구에 ‘댕댕이 출입금지’라고 쓰여있었다. ‘댕댕이 덩굴’만 생각하니 문맹이 따로 없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멍멍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계제에 삼복 폭염에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나날을 보내고 있을 댕댕이들의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단일 종으로 개처럼 다양한 이름과 모습을 하고 있는 짐승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개인 犬과 狗를 두고도 여러 말이 있다. 개 - 멍멍이 - 댕댕이는 한자로 犬인데 개 모양을 그린 상형(象形)글자이다. 狗는 犬과 같이 쓰이지만 犭의 뜻에 句(gou)의 음을 합한 형성(形聲) 자로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서로 다르다. 犭는 犬과 같고, 句는 ‘개 짖는 소리 - gou'를 표기한 글자이다. 句의 본래 음은 지금처럼 'ju'가 아니라 'gou'였다. 犬이 일반적인 개라면 狗는 강아지를 말한다. 그래서 사나운 어미 犬은 짖지 않고, 짖는 강아지 狗는 물지 않는다. 개가 짖는 것은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한다. 犬이 점잖은 개라면 狗는 함부로 부르는 이름이다. 馬도 망아지는 駒라고 하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개가 마음에 들면 忠犬 반려犬이라고 대우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羊頭狗肉이라고 하면서 식용으로 삼는다. 狗는 중국어로는 gou이고, 우리는 옛날에 ‘가이’라고 했고, 지금의 ‘개’는 ‘가이’가 축약된 말이다. ‘gou’와 ‘가이’는 음이 비슷한데 의성어는 본래 어느 나라 말이건 서로 닮기 마련이다. 옛날 우리 개는 ‘가이가이’, 중국 개는 ‘꼬우꼬우 “하고 짖었고. 요즈음에는 같이 ‘멍멍’하고 짖는다. 티벳이나 버마 등 인근 언어도 비슷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는 개 짖는 소리를 흉내낸 의성어에서 나온 말인 듯싶다. 뻐꾸기나 개구리처럼- 그러나 댕댕이는 아무 내력이 없는 글자 장난이다. 犭는 犬과 같이 쓰이지만 部首(부수)로써 글자의 왼편에서는 犭를 쓰고, 오른편이나 아래쪽에 오면 犬으로 쓴다.
흔해서 그런지 ‘개’가 갖는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라서 무슨 이름이든지 앞에 ‘개’가 접두사로 붙으면 하찮고 천한 것이 되고 만다. 옻나무도 개옻나무까지는 괜찮지만 꿈에 강아지가 나타나면 ‘개꿈’, 멀쩡한 곳도 개가 있으면 ‘개판’, 소리도 듣기에 마땅찮으면 ‘개소리’, 죽어도 별 의미가 없으면 ‘개죽음’, 좋은 뜻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수작’이란다. 이런 사정은 중국도 비슷해서 마음에 안 들면 사정없이 犬을 붙였다. 犬馬年견마년이면 같잖은 나이, 犬馬心이면 변변찮은 마음이고,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하면 犬馬之養견마지양이라고 했다. 부모를 개, 돼지 먹이듯 한다는 뜻이다. 어려운 일을 해놓고는 보잘것없는 수고라고 겸손하기 위해서는 犬馬之勞견마지로라고 해야 한다. 개나 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애꿎은 馬까지 희생당하고 있다.
개처럼 주인을 잘 따르는 짐승은 없건만 그럴수록 주구(走狗)라고 욕을 해대니 개로서는 억울할 판이다. 개는 사리판단 능력이 없어서 개이지만 그래서 주인에게는 절대복종한다. 그런데 사람이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절대복종하면 개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伏자는 ‘人앞에서 엎드려 있는 犬’이다. 伏더위는 ‘개가 생명에 위협을 느껴 바짝 엎드려 있는 때’이다. 주인에게는 절대복종하는 개는 忠犬이라고 칭찬하지만 사람을 충견이라고 하면 욕이 된다.
사실 개는 지능이 높아서 여러 가지로 유용한 동물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사람보다 더 가치 있고 대우받는 개가 늘어나고 있다. 경찰견이나 군견, 탐지견, 안내견의 활약이 어지간한 사람보다 낫다. 그걸 생각하면 보신탕을 먹기가 여간 미안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감기 걸릴까 노심초사하고, 목욕시켜 털을 곱게 빗어주고, 비싼 의료비는 물론, 성형수술도 해주고, 호화 犬公장례식장까지 생겼다 하니 ‘개팔자 상팔자’라는 옛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유용하고 가치 있는 개는 보상 차원에서도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아무 데나 똥이나 싸 대고, 고작 재롱이나 떠는 애완견한테는 功에 비해서 대우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든다. 하기야 옛날부터 ‘정승이 죽으면 개나 모여들고,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에 장이 선다’고 했으니 개가 정승보다 나은 셈이다.
애완狗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다 보니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상팔자’인 반려견도 있지만 더 많은 개는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다. 식용狗를 기르는 개 사육장이나 번식장을 보면 인간의 잔인성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비단 개 사육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 돼지, 닭도 마찬가지이지만 개가 더 비참해 보이는 이유는 유독 인간을 더 따르는 개의 습성과 영리함에 연민의 정이 더해서 그럴 것이다. 당장 우리에서 풀어놓으면 금세 꼬리를 치며 따라올 개를 그렇게 핍박하는 짓은 너무 잔인하다. 그런 인정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불결하게 키운 개를 그렇게 비위생적으로 도살해서 만든 보신탕을 먹어대는 인간도 뒤가 깨끗할 것 같지는 않다.
같은 개이지만 犭는 개 말고도 狼 늑대, 狐 여우, 猿 원숭이 같은 다른 짐승도 포함한다. 그래서 본래의 犬보다 포악하고 영악하며 교활한 개가 되기도 한다. 그렇잖아도 오해가 적지 않았던 개로서 다른 고약한 짐승의 누명까지 뒤집어써야 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늑대는 개를 빼닮아서- 개가 늑대를 닮았을 수도 있다지만- 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늑대를 닮은 셰퍼드까지는 구원을 받았지만 늑대는 인간의 적이 되어 ‘늑대 같은 남자’가 많다. 호랑이도 원래는 虎狼호랑이에서 나온 말이었고 원래는 ‘범’이다. 여우도 개를 살짝 닮아서 狐호라는 이름을 얻었다. 꼬리가 커서 여우는 개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재주 많은 여자를 아홉 꼬리를 흔들어대는 九尾狐라 불렀다. 그러나 원숭이는 꼬리가 없으면 猿이고, 꼬리가 있으면 猴라고 해서 더 우습게 본다. 인간이 꼬리가 없기 때문이다.
시기의 猜자는 犭에 靑의 뜻이 합해진 글자이다. 그렇다고 덜컥 ‘푸른 개’라고 풀이하면 망발이다. <설문해자>에 猜를 ‘恨賊’한적이라고 풀이했는데 도둑이나 다른 짐승에 맞서서 으르렁대는 맹견의 모습일 것이다. 猜자의 ‘靑’은 추상명사 恨을 ‘푸르다’라는 색깔로 나타낸 기발한 글자이다. 시기나 질투를 시퍼런 칼날로 비유한 것은 고도의 환유이다. 어두운 밤중에 다른 맹수들에 맞서서 으르렁대는 맹견의 시퍼런 눈빛과 질투에 서슬퍼런 여인네의 눈빛은 모두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과도 같지 않을까? 猜忌(시기)가 嫉妬(질투)와 유사 의미로 된 것은 개의 탐욕과 여자의 질투심이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알고 보면 짐승의 탐욕보다 훨씬 시퍼렇고, 가혹한 것이 인간의 질투심이다. 질투와 시기심은 마음에서 헛된 상상으로 더욱 커지고 주체할 수 없는 허상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猜는 ‘추측하여 맞추다’라는 뜻도 있다. 중국에서는 수수께끼를 猜迷(차이미)라고 하는데 迷는 수수께끼이고, 猜는 ‘맞추다’이다. 猜拳(차이취앤)은 중국의 '가위바위보'인데 역시 같은 원리이다
유달리 더운 여름에 개 같은 한자이지만 거기에 숨어있는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漢字라면 머리에 쥐부터 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더불어 지혜를 나눌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것이 문화의 당연한 흐름인가, 아니면 퇴행, 역행인가? 오늘은 꼰대의 杞憂(기우)가 너무 길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