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린 가슴에 자식을 묻고
哭 子 곡자 저린 가슴에 자식을 묻고
許蘭雪軒 허난설헌
去年喪愛女 작년에는 사랑하는 딸을 보내고,
今年喪愛子◎ 올해에는 금쪽같은 아들마저 잃었네.
哀哀光陵土 슬프다,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 너희들이 이렇게 마주 누워 있다니-
蕭蕭白楊風 백양나무에 찬바람은 불어대는데
鬼火明松楸◎ 도깨비불이 소나무 숲에서 서성이네.
紙錢招汝魄 지전 살라 너의 혼백을 달래고,
玄酒奠汝丘◎ 젯술 따라 무덤에 뿌리노라.
應知弟兄魄 너희 오누이 혼백들아
夜夜相追遊◎ 밤마다 만나 노닐거라.
縱有腹中孩 이 배 속에 아이가 들어있지만
安可冀長成◎ 어찌 무사히 장성하기를 바랄까?
浪吟黃臺詞 (아가는) 황대사를 애처롭게 부르면서
血泣悲呑聲◎ (뱃속에서) 피눈물을 삼키고 있겠지.
許蘭雪軒은 남편 복도 없었지만 자식 복도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의 남매를 연이어 잃어버린 비통함을 절절하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태중의 아이를 걱정하였듯이 마침내는 자신도 아이의 장성을 보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去거年년喪상愛애女녀 今금年년喪상愛애子자.
去年은 작년. 喪은 잃다. 愛女는 사랑하는 딸. 愛子는 사랑하는 아들. 똑같은 통사구조이므로 喪은 서로 다른 시어로 옮겨 변화를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앞의 상은 ‘보내고’, 뒤의 상은 ‘잃었네’라고 옮겨야 우리 시에 어울립니다. 이러한 사정은 愛도 마찬가지라서 ‘사랑하는’을 뒤에서는 ‘금쪽같은’이라고 옮겼습니다. 시어로 보아서는 다를 바 없지만 우리 시로서는 변화의 묘미가 있습니다. 2구의 ‘아들’을 잃은 슬픔은 더욱 크기에 ‘마저’라는 보조사를 덧붙였습니다.
哀애哀애光광陵릉土토 雙쌍墳분相상對기起대.
哀哀는 슬프다는 감탄사. 광릉은 무덤이 있는 서울 근교. 土를 흙이라고 하기보다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雙墳은 아들 딸의 무덤이 같이 있는 것이고, 相對起는 두 무덤이 마주서 있다는 기막힌 현장입니다. 그래서 원시에는 없지만 ‘이렇게’라는 시어를 보완했습니다.
딸과 아들을 연달아 잃었으므로 두 무덤이 쌍분으로 마주 서 있는 기막힌 현실입니다. 죽은 자식을 땅에 묻었지만 자식을 잃은 어미는 찢어지는 가슴에 자식을 묻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린 가슴에 자식을 묻다’라고 풀어보았습니다.
蕭소蕭소白백楊양風풍 鬼귀火화明명松송楸추.
蕭蕭는 낙엽지는 소리의 의성어이고, 白楊風은 백양나무에 부는 바람입니다. 鬼火는 귀신 도깨비 불이고, 松楸는 소나무 가래나무, 明은 ‘밝은 불’입니다. 이것으로 광릉 숲 속의 소름돋고 을씨년스러운 묘지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백양나무 낙엽이 흩날리고, 도깨비불이 소나무 가래나무 사이에서 배회한다고 했으니 어둡고 음산한 날씨가 연상됩니다. 明은 ‘밝다’이지만 묘지의 도깨비불이 밝다라고 한다면 분위기에 맞지 않으니 ‘서성인다’라고 바꾸어 옮기는 것이 도깨비불에 어울릴 것입니다. 쓸쓸하고 음산한 바람에 도깨비불까지 왔다갔다 하는 것은 더욱 을씨년스러운 상황이므로 ‘마저’라는 조사를 덧붙였습니다. 소나무 가래나무를 모두 옮기면 시어로서는 번거로우므로 줄여서 ‘숲속’이라고 했습니다.
紙지錢전招초汝여魄백 玄현酒주奠전汝여丘구.
紙錢은 상례 때에 종이돈을 태우는 중국의 풍습입니다. 汝는 ‘너’, 魄은 ‘영혼’이고, 招는 ‘부르다’이지만 ‘달래다’라고 하는 것이 시의에 더 좋습니다. 그리고 지전을 ‘태우다’라는 말이 없으므로 같은 뜻인 ‘살라’라고 해서 의미를 보완했습니다. 玄酒는 제사 때에 祭酒처럼 쓰는 물인데 ‘젯술’이라고 옮겼습니다. 역시 혼백을 위로하는 것이므로 紙錢과 의미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奠은 혼령에게 올리는 것이지만 자식에게 하는 행위이니 ‘뿌리다’라고 했습니다. 汝丘는 ‘너의 무덤’입니다. 자식의 무덤에서 명복을 비는 어미의 비통한 심정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應응知지弟제兄형魄백 夜야夜야相상追추遊유.
應은 ‘당연히, 틀림없이’, 知는 이 詩行 전체의 서술어로 삼아야 합니다. 弟兄魄은 남매의 혼백, 夜夜는 ‘밤마다’입니다. 相은 서로, 追는 ‘좇다’보다는 ‘만나’정도가 좋을 듯하고, 遊는 ‘노닐거라’라고 했습니다. 비록 혼백이 둘이 만날 수 있다 해서 위안을 삼으려고 하지만 어린 귀신들이 노니는 것이니 역시 가슴아픈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縱종有유腹복中중孩해 安안可가冀기長장成성.
縱은 부사로 ‘비록’이고, 腹中孩는 ‘뱃속에 든 아이’입니다. 자신의 뱃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라는 대명사를 보완했습니다. 安은 의문부사로 ‘어찌’이고, 冀는 ‘바라다’이고, 長成은 ‘자라다’입니다. 可는 앞 구의 有와 같이 서술어미에 간접적으로 반영시키면 됩니다. 그래서 可를 생략하는 대신에 원시에는 없지만 ‘長成’ 앞에 ‘무사히’를 보완하면 좋을 것입니다. 아이를 연이어 잃다 보니 뱃속에 든 아이의 장래마저 극도의 불안을 느끼는 어머니의 심경입니다.
浪랑吟음黃황臺대詞사 血혈泣읍悲비呑탄聲성.
浪吟은 ‘눈물로 애처롭게 읊는다’로 풀이합니다. 黃臺詞는 중국의 宮中悲史를 담고 있는 노래로 황과가(黃瓜歌)라고도 합니다. 唐 則天武后(측천무후)의 태자가 궁중에 열려있는 오이를 보고 그 오이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과 같을 것이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하나씩 떨어지는 오이를 보고 저 오이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내용인데 치열한 왕위다툼과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태자와 왕자들은 내일을 보장할 수 없어 심각한 불안을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측천무후의 아들은 어미에 의해서 피살당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황대사를 노래하는 주체는 뱃속의 아기여야 합니다. 작자는 자식을 둘이나 죽여 보낸 모진 어미이므로 지금 뱃속에 든 아이마저 어미에 대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것이라는 극도의 불안과 자학적인 반응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血泣은 피눈물이고, 呑聲은 눈물과 울음을 안으로 삼킨다는 뜻입니다. 뱃속의 아이니까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속으로 울 수밖에 없겠지요. 자식 잃은 슬픔을 뱃속의 태아에게까지 연결시켜 표현한 詩想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원시에는 없지만 주체를 나타내는 주어 ‘아가는’ '뱃속에서'를 덧붙였습니다. 아니면 자신이 황대사를 읊으면서 자식들의 비운을 생각하면서 피눈물을 삼킨다고 옮겨도 또 다른 변역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