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토이푸들인데 이름처럼 작아서 이놈보다 더 작은 강아지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도 도토리라고 지었는데 나이는 7살이 넘었어도 여전히 강아지만 하다. 지능이 썩 좋지 않은 편이라서 하는 짓이 특별히 예쁘다거나 미운 짓을 하지 않는다. 주인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도 가리지 않고 좋다고 꼬리를 치니 사교성은 좋으나 집 지키기는커녕 마음만 먹으면 도둑이 이놈을 훔쳐가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주인을 몰라보는 것도 아니다. 혼자 있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난리를 치며, 앞서 길을 가다가도 수시로 고개를 돌려 주인을 확인한다. 주인 둘 중에 하나라도 안 보이면 버팅기며 꼼짝하지 않는다.
사람이 옆에 있어야 안심을 하고, 틈만 나면 무릎을 파고들어서 귀찮을 정도로 얼굴을 핥아대기 좋아한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지만 사람 얼굴을 무안한 정도로 빤히 쳐다본다. 식탐이 많아 무엇을 먹으려면 두 발을 세우고 가랑이에 걸터앉아 간절하게 ‘한술 줍쇼’하고 애처롭게 바라본다. 복실한 털 사이에서 반짝이는 까만 눈을 보면 이놈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 까만 눈동자가 커서 흰자가 보이지 않으니 눈을 흘기는지, 눈치를 보는지 알 길이 없다. 알아듣는 말이 몇 개 안 되지만 뭐라고도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고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무슨 말인지 열심히 궁리하는 것 같다.
방 안에서 사는 이놈은 항상 밖을 그리워한다. 밖에라도 나갈 눈치가 보이면 쾌재를 부르며 길길이 날뛴다. 애완견으로 개량된 놈이지만 개의 본성은 역시 야생이라 밖에 나가면 코를 박고 길을 더듬으면서 영역 표시하기에 바쁘다. 가리지 않고 똥을 싸 대는 바람에 항상 비닐주머니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옛날에는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럴 일마저 없으니 전적으로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 길을 가다가 다른 개를 만나면 철저히 외면하거나 꼬리를 내리고 주인만 쳐다본다. 제가 개가 아니고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다.
이놈은 잘 때도 혼자 자려고 하지 않는다. 악착같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서 주인과 같이 잔다. 그러려고 털을 빠뜨리지 않는가 싶다. 만약에 털이 빠진다면 이불 안에서 같이 잠잘 수는 없을 것이다. 침대에서 자려고 하면 침대에 오르지 못하여 안달이 난다. 몸은 작고 다리 힘은 약하다 보니 침대로 뛰어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침대에 올려놓았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골절상을 입기 십상이니 할 수 없이 아내가 방바닥에 내려와서 자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나까지 방바닥에서 자고 싶지는 않으니 부부간에 異床同夢(이상동몽)을 꾸는 수밖에 없다. 아내가 꼭 이놈하고만 같이 자니 나는 뒷전이 틀림 없다. 그러니 이놈은 멀쩡한 가정파괴범이다.
이 녀석은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라도 혼자 놔두기 어렵다. 그것도 몇 시간 정도는 먹을 것으로 달래면 되지만 며칠 걸리는 출입이 문제이다. 그렇게 혼자 놓아두면 사료를 챙겨 줄 수 없거니와 스트레스를 받아서 온전치 못한다고 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가까운 이웃에게 며칠 어려운 부탁을 해도 이놈이 주인을 기다리느라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다니 그럴 수도 없다. 천상 이놈을 데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운전기사가 이 녀석을 보면 잘 태워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자에 넣고서 운전수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비행기를 타려면 이놈 표도 따로 끊어야 한다. 애물단지가 따로 없다.
아내에게 개를 포기하자고 자주 압력을 넣지만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다. 고양이나 개를 좋아하는 아내는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도 ‘동물농장’이다. 전에는 고양이를 키웠었는데 그놈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가 거기서 죽는 바람에 좀처럼 남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차마 길에 버리지는 못할 노릇이니 입양할 방도를 찾아 봤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나의 압력에 마지못해 이놈을 처리할 방도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내 요청을 접수했다는 것은 강아지보다 내가 더 존중받는다는 의미이니 늙마에 새삼 삶의 보람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강아지 예쁘다고 칭찬하면서도 정작 가져가라면 말이 없었다. 더러는 가져가려 하다가도 나이가 7살이라면 돌아섰다. 그 나이면 주인과 떨어져서 적응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개와 정을 한번 붙이면 차마 헤어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이래저래 이놈을 내보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본래 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보신탕도 즐겨 먹어 개에 대한 특별한 애증이 없다. 요즈음 개의 식용을 두고 논란이 많아 보신탕 집에 가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그렇다고 개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는 망설여진다. 품격도, 교양도 좋지만 아무래도 그 영양과 맛을 쉽게 포기하기 어려워서이다. 그러면서도 잔인하고, 비위생적으로 도살되는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께름칙하기는 하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개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생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개고기라 해서 일률적으로 먹느니, 안 되느니 규정짓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일 것 같다. 반려견과 식용견을 구분하자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따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우리집 토이푸들이나 안내견, 경찰견을 잡아먹겠다고 한다면 야만인 소리를 들어도 싸겠지만 사람 잡는 사나운 유기견이나 살집이 통통한 맹견마저 먹지 말라면 분별이 없는 횡포가 아닐까?
아무러나 어쩔 수 없이 이놈이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보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이놈보다 더 오래 살 자신도 없다. 좋다고 키울 때는 언제이고, 버릴 때는 또 언제란 말인가? 내가 강아지를 책임지는 것처럼 하느님도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책임져 달라고 떼라도 쓰고 싶다. 사람이 살아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맨날 죽은 후만 책임져 주겠다니 하느님을 못미더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쟁이다, 코로나다, 사고다, 암이다 해서 멀쩡한 사람을 일찍 데려간다면 기르던 개 고양이를 유기하는 인간과 무엇이 다를까라는 불경스런 생각도 해 본다.
도토리를 볼 때마다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과 짐승은 어차피 존재가치가 다르다. 너는 인간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고, 내가 먹여 살리고 있으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간의 독선이고, 어차피 같은 피조물이라면 최소한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이 창조주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싶다. 도토리와 내가 무엇이 다른지, 개를 먹으면 안 되고 소는 먹어도 좋은지, 고기는 먹으면 안 되고 채소는 먹어도 괜찮은지- 쓰잘데없는 짓이라고 하겠지만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