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바보

손주 사랑은 무죄이다.

by 김성수
어제 손녀가 업쳐있는 모습입니다. 제눈에 안경인가요? 실물은 사진보다 더 이쁘답니다.

만혼(晩婚)에 어쭙잖게 산아조절을 하다보니 자식농사가 매우 늦었다. 애들 또한 결혼이 늦어지다 보니 일흔을 넘긴 작년 말께야 처음 손녀를 보았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서 애기 울음소리 그친 지 35년도 넘었다. 인구절벽이라고 난리들인데 우리 집도 그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여 국민으로서 미안스럽기도 하다. 친구들은 손자들이 벌써 중학교에 다닌다는데 나는 이제야 손녀를 처음 보았으니 한심하기도 하다. 代잇기라는 옛날 사고방식이라면 나는 가문의 죄인이지만 죄인을 면하기 위하여 자식에게 애 낳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요즈음 세상에 가문이며, 제사며, 대잇기가 무슨 대수일까 싶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은 애비가 할 일인데 할애비 마음대로 나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나마 아들이 알아서 딸이라도 낳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이다. 웬만한 아들보다는 딸이 낫다는 세상이다 보니 새삼 손녀니, 손자니 따질 겨를도 아니다. 그래서 요새는 손자 손녀 구분 없이 ‘손주’라고 하는 말이 편리해 보인다. 요즈음은 출산하더라도 집보다 먼저 조산원으로 가야 하고, 코로나 시국이니 더 이상 집에서 애기 얼굴을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애들과 따로 살다보니 영상으로나마 애기 얼굴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아직 사람 꼴도 제대로 못 갖춘 애기이지만 품에 안아보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내가 푼수로 여기는 사람 중의 하나가 핸드폰 들고 손주 자랑하는 손주바보이다. 애기는 다 예쁘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본래 애기 예쁜 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애기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핀잔을 받기도 한다. 더구나 남의 애기는 어지간해서는 이뻐보이지 않았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 말은 남의 새끼는 예쁘지 않다는 말이 아닐까?


푼수들만 비웃다가 내가 막상 손녀를 보니 나도 손주바보가 틀림없다. 고슴도치가 아니지만 손녀를 아무리 냉철하게 샅샅이 뜯어보아도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다. 아무리 제눈에 안경이라지만 이렇게 예쁜 애기는 자식 보고는 처음이다. 세상의 온갖 평화를 다 담아놓은 것 같다는 애기 찬사 글이 생각나지만 그런 두리뭉실한 표현 말고, 이목구비를 다 뜯어보아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이제 갓 4개월이 지났지만 큰 눈에 쌍가풀이 뚜렷이 잡혔으며, 눈썹은 그린 듯하고, 속눈썹이 벌써 길게 위로 휘었다. 큰 눈에 까만 눈동자를 굴려가며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얼굴뿐 아니라 피부마저도 백설공주에다가 성격마저도 천사 같다. 곁에 사람이 있건 없건 까탈이 없다. 팔다리를 쉴 새 없이 흔들어대고, 쳐다보는 사람마다 눈맞춤을 하며 방싯방실 웃으면 무슨 사악한 마음인들 녹지 않으랴? 저녁 젖을 먹고나면 잠투정도 하는둥마는둥 통잠을 아침까지 늘어지게 잔다. 오전에 두 시간, 오후에 두 시간 정도 군소리 없이 혼자 놀다, 엎치다가 소리 없이 잠을 자니 이렇게 신통한 놈이 또 있을까 싶다. 손주 키워 줄 생각 아예 말라는 충고를 수없이 들었는지라 애들한테 애 낳아 집에 데려올 생각 말라고 일찌감치 다짐해 두었지만 막상 손주를 보니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점점 사라진다.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 대놓고 손주 자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배짱이 뻗친다.


이렇게 예쁜 애들이 아찔한 일을 겪었다. 부모가 먼저 코로나에 걸렸으니 애기인들 무사할 리 없다. 셋 모두가 코로나 확진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가 하얘졌다. 며느리는 임신, 출산 후라 백신을 맞을 수 없었으니 아들보다 더 걱정이 컸다. 그런데 손주는 무슨 죄로 흉악한 코로나에 걸렸단 말인가? 어른이야 면역력으로 버틴다고 해도 백 일도 안 된 애기가 어떻게 이 모진 전염병을 이긴단 말인가? 눈 뜨고도 코를 베인다는 세상이지만 과학문명 시대에 애들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는 무기력이 뼈에 사무쳤다. 하느님의 은혜를 그때처럼 간절히 청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셋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내 목숨보다 몇 배나 더 절박한 심경이었다. 나는 청원의 기도는 가급적 하지않으려고 한다. 나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 못하는 하느님께 미안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한 동안 한 번도 매일미사를 거른 적이 없다. 간절한 기도 덕택인지 아들 며느리는 일주일을 꼬박 코로나로 고생했지만 애기는 무증상으로 코로나를 넘겼다. 그리고서 손녀를 보니 마치 사지에서 빠져나온 얼굴처럼 기특하고, 대견스럽기 짝이 없다.


흔히 자식보다 손주가 더 예쁘다고 한다. 우리 선인들은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식처럼 예쁜 것이 없건만 새삼스럽게 친함을 그렇게 강조한 것을 보면 부자 사이는 오히려 친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자식이 어렸을 때는 다 예뻤겠지만 성장함에 따라 자식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많아지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미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식 또한 커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줄어드니 부자간에는 갈수록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부자간에 경쟁관계에 처할 수도 있는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설명한다. 자식이 아비를 경쟁상대로 삼아 살해하고, 권력을 쥐는 역사가 비일비재하니 자식이 원수라는 말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조손(祖孫) 간에는 같이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다행이다. 우선 손자가 장성했을 때에는 할아비는 이미 살아있기 어렵다. 살아있더라도 손주하고는 거리가 멀거나 특별한 기대도, 욕심도 없으니 사이가 멀어질 일도 적다. 옛날에는 할아버지 밑에서 커야 예의범절을 제대로 안다고 했다. 집안의 큰 어른인 할아버지가 가정교육을 맡아했던 것이다. 지금 애들 버릇이 사나운 것은 할아버지가 없거나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집안에서 할아버지 역할이 중요하지만 핵가족 사회에서 옛날처럼 위엄있는 할아버지 가르침에 순종하는 손주가 같이 살기조차 어려운 세상이다. 손주바보도 나이 어렸을 때일 뿐이라면, 품 안을 벗어난 손주를 대놓고 자랑하기가 멋쩍을 일이다. 더구나 손주 키워주다가 생병 나는 할머니가 적지 않다면 손주애기 자랑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노인인지 모른다.


애기가 예쁠수록 걱정이 커진다. 이 애가 어른이 될 때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지금도 날로 위기로 치닫는데 수십 년 후에는 과연 살 만한 사회일지 확신이 서지않는다. 내가 대잇기에 골몰하지 않는 이유도 지구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지나친 비관주의이겠지만 어쩌면 애를 낫는 것이 애한테 불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의 지혜로 지금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지혜보다는 어리석음이 더 걱정스럽다. 그래서 이 예쁜 손주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제발 네가 살아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아무 일이 없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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