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는 독재자의 가면이었다.
오래 전에 <검찰공화국>이란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감정적이었나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염려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하기야 장군 대통령에 군인들이 삼십여 년을 지배했던 우리 현대사를 생각하면 검사 대통령에 검사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일이 놀랄 일도 아니다. 총질이나 해대던 군인들에 비하면 검사들이야말로 두뇌 명석한 고시 합격자들이니 검찰공화국이라고 구태여 탓할 일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선진국, 문화선도국, 성공한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우리로서는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라면 몰라도 일본이나 서구 선진국에서 검찰공화국이 가능한 일인가?
민주당 정권의 실정을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검찰공화국을 환영하지 못하는 이유는 막연한 선입관이나 내로남불 검찰의 횡포에 대한 반감만이 아니다. 그것은 법치주의, 법 만능주의의 본질적 결함에 있다. 법은 태생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법이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본질은 인간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군인들의 역할이 커지듯이 법이 어지러우면 법관의 역할도 커진다. 검찰공화국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법이 그만큼 어지러웠다는 역설적 반증이다. 그런데 책임을 져야 할 법 집행자들이 오히려 법치주의를 외치며 정권을 잡았으니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의 선택으로 수립된 검찰공화국이라고 의기양양이다. 어쩌면 새 정부를 탓하기보다는 검찰공화국을 만들어 준 전 정권과 국민이 책임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공화국을 환영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법치주의의 흑역사이다. 중국의 역사에 법치주의가 성행하던 시대가 전국시대였고, 법가의 전성시대는 진(秦)나라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그들이 철통같이 믿었던 법치에 의해서 중국 역사상 최단명의 왕조가 되었다. 진나라 말고도 가혹한 법치주의를 내세웠던 나라와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였음을 전 세계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으니 우리는 본질적으로 법치주의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法治의 상대어는 人治라는 사실만으로도 법과 인권은 대척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군대의 ‘非인간성’과 더불어 법치의 ‘反인권성’은 이들이 독재와 혈연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5백여 년 전에 <군주론>에서 ‘군대와 법’을 통치의 요체로 꼽았는데 그런 세상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역사가 중세시대로 회귀했단 말인가? 독재자들이 총칼이나 법치주의에 몰두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손쉬운 통치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기득권과 힘 있는 자의 편에 서기 마련이다. 그들과 결탁하면 쉽게 통 큰 이권거래를 할 수 있는데 비하여 서민의 편에 서면 떡고물도 없이 번거롭고, 치사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재의 본질을 모르는 겁 없는 국민은 스스로 법치주의 정권을 선택했다. 합리성을 내세운 법의 권위에 현혹된 국민이 0.73% 더 많았기 때문이다. 개구리들이 나무토막 같은 통치에 불만을 품고 하늘에 좀더 강력한 왕을 청했더니 독사를 보내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는 우화가 한가한 동화가 아니다. 행여 여우를 몰아냈더니 호랑이가 들어온 꼴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검찰공화국이 위험한 세 번째 이유는 검사들의 비극적인 생리이다. 법이 인권을 보호하고, 인간의 편에 서 있다는 명분에 합당한 이는 힘이 가장 약한 변호사이다. 그러한 법의 명분 실천에 앞장선 이가 이른바 인권변호사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대통령이 된 역사도 있었다. 양심적인 판사들은 변호사들과 같이 검사들의 가혹한 구형을 줄여주는 노력을 해왔고, 법이 목숨까지도 빼앗을 수 있음에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검사는 가혹한 법망을 내세워 범죄자를 만들어 법정에 세우는 것이 그 존재 이유이다. 사회의 법질서를 세운다는 명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검사는 냉혹한 법 집행자여서 가혹한 법치주의 통치의 핵심이다. 모든 사람을 범죄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검사의 생리이자 그들의 비극이다. 범죄의 시각이 필요한 사람은 범법자일 뿐, 선량한 사람은 억울한 피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검사들이 최고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은 정적(政敵)은 물론, 모든 국민이 범죄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검투사에 비견되는 막강한 완력으로 늘 집권당의 권력을 지켜주는 호위검사 노릇을 해왔다. 정적에 대해서는 무소불위였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법꾸라지였으니 그들은 법의 파괴자가가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이번에는 그동안 갈고 닦은 뛰어난 검술로 앞 정권의 약점을 파고들어 만화 같은 검찰공화국을 건설한 것이다. 보복의 칼날을 갈아온 협객들에게 정상적인 국정운영을 기대한다면 굶주린 사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줄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야당에 대한 정치보복이 끝나면 반체제 인사와 반정부 국민의 차례가 되었던 것이 우리의 과거였다.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윤 대통령은 법치와 더불어 유달리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란 구속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법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니 자유와 법은 대척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 입으로 자유와 법치주의를 같이 말한다면 무지의 소치이거나 국민을 깔보는 기만술책이 아닐 수 없다. 국력을 모아 국난을 극복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법치를 내세워 앞 정권을 탈탈 털어 보복하려는 행태는 나라의 비극이다. 혹시라도 국난을 극복할 방도를 알지 못하여 앞 정권의 약점을 물고 흔들어대는 것으로 모면하려 한다면 나라는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이 한풀이 정치보복에 휘둘린다면 그들은 거침없이 ‘독재검법’을 휘두를 것이다. 국민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저항이 거셀수록 반성 대신에 독재를 서두르는 것이 법치주의자들의 생리이다. 그들에게 독재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집무실을 졸속으로 옮기는 것에서 독재의 DNA를 읽을 수 있었다. 심복 검사, 측근 인사만 골라 핵심요직에 중용하는 것은 남을 믿지 못하는 검찰총장의 독재적 습성이다. 추락하는 지지율을 아랑곳하지 않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뚝심이나 결단력으로 본다면 독재를 자초하는 국민이다. 여당 인사의 어떤 직언도 듣지 않고, 직언하는 윤핵관이 없다는 것은 이미 독재의 체제가 갖춰진 모양새이다. 법무장관이 검찰총장 노릇까지 전횡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검찰 자신에 대한 보복이요, 폭력이다. 행안부장관이 경찰국을 만들어 경찰을 지배하려는 것은 대국민 독재의 신호탄이다. 이런 독재적 행태는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성향이기도 하지만 법치주의자들의 본질적 특성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혹은 지나친 비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보복의 법치정권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방관은 애써 이룩한 선진국과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서 하는 말이니 이런 예측이 한낱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