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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Jan 04. 2024

제주도에서 23

서귀포 동백꽃

  

  冬柏꽃은 이름대로 겨울에 피는 꽃이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한겨울이 지나야 피기 때문에 그 이름에 충실한 것은 제주도 동백이라야 한다. 육지에서도 남해안을 중심으로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지만 제주도에서는 정원, 돌담, 길가를 가리지 않고 들어차 있다. 귤나무와 더불어 제주도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栢은 잣나무이지만 차나무과에 속하여 중국에서는 山茶花라고 한다.   

  동백은 재래종과 개량종이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동백꽃은 당연히 재래종을 말하는 것이다. 꽃으로 말하면 개량종이 더 화려하고 탐스럽다. 꽃잎이 여러 겹으로 피어 장미보다 더 소담스럽다. 사람으로 말하면 풍만하고, 관능적인 귀부인이랄까? 성형미인이 늘어나듯이 개량종이 재래종을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이 꽃에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 화려했던 꽃잎이 시들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나마 바람이 없으면 나무 아래에 흩어져 있어 그 흔적이나 남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산산히 흩어져 꽃잎마저 찾기 힘들다. 중국인들이 국화로 여기는 모란도, 그와 닮은 함박꽃도 이와 닮아서 한때가 지나면 늙어버림받은 궁녀와 같다.

  그래서 동백꽃이라면 아무래도 재래종이어야 한다. 꽃은 작지만 유난히 더 붉고, 단엽으로 날씬하고 청순한  자연미인과 같다. 개량종이 관능적인 글래머 스타라면 재래종은 수줍고, 가녀린 시골 비바리를 닮았다. 그래서 애기동백이라고도 한다. 재래종이라야 향기도 있고, 꽃도 오래가고, 그 꽃이 져도 온전히 땅에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낙화유수(落花流水)라 했듯이 떨어진 꽃잎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동백꽃은 꽃잎 하나 잃지 않고 온전히 그 모습을 가진 채 땅에 누워있다. 땅에 버려두기가 안타까울 정도로 여전히 아름답다. 마치  죽어서도 지조를 버리지 않는 정절의 여인과 같아서 발길을 떼기 어렵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그 꽃말에 절실한 공감이 간다.

  제주도의 동백꽃이 남다른 것은 제주 4.3에 흘렸던 제주인의 피가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제주사람이 아니라면 동백꽃의 피맺힌 사연을 모른다. 나도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4.3의 비극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그저 육지처럼 전쟁과 좌우익의 대립으로 일어난 비극 정도로 알았고, 설마 육지보다야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좌익들이 일으킨 ‘4.3 민란’이니, ‘-폭동’이니, ‘-사태’라는 명칭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와서 알고 보니 육지와는 다른 면이 많았다. 지리산에서는 빨치산 반란진압 작전이었지만 제주도에서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300명도 안 되는 좌익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30,000명이 넘는 제주도민을 학살했고, 자국민을 대상으로 초토화작전을 벌였으니 킬링필드와 다를바 없는 끔찍한 만행이었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던 수만 명의 도민들이 다시 밀항으로 도망을 가야 했다. 지금도 한라산 기슭에는 ‘잃어버린 마을’ ‘유령의 마을’로 불리는 폐허가 숲 속에 가려져 있다. 집단학살이라서 희생자들의 제사는 대개 같은 날이라고 한다. 하도 끔찍하여 얼마 전까지도 희생자 유족들은 4.3에 대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랬다가는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억울한 사연이 얼마나 많았으면 4.3기념관에는 아무 글자도 새기지 못한 白碑(백비)가 서럽게 누워있으니 그들에게 조국의 정부란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지금 정부는 그 책임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세운다니 우리에게 정부는 또한 무엇인가? 나무에 피어있는 동백꽃은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땅에 누워있는 동백꽃에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양민들의 피가 배어있다. 이런 기막힌 사연을 모른다면 어찌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도 5.18, 세월호, 이태원 참사를 모른 체하거나 매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차마 인정이라 할 수 없거니와 우리 역사에 이런 비극이 끊이지 않을 이유이다.

  동백꽃에는 동박새가 모여든다. 그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지만 참새보다도 더 작고 귀여운 동박새를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많던 동박새도 동백꽃이 없을 때에는 주저없이 동백나무를 버린다. 동박새는 오로지 동백꽃의 달콤한 꿀만 탐했을 뿐이니 꽃이 없는 동백나무는 동박새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동백꽃이 떨어지면 동박새는 한라산 깊숙이 들어가서 다른 꿀을 먹고 산다고 한다. 동박새는 젊은 여인의 미모만을 탐하는 남정네를 닮았다.

  동백은 꽃 말고도 그 잎이 매력적이다. 동백꽃이 없더라도 동백나무 잎은 언제나 빤질빤질 빛난다. 동백처럼 생명력 넘치는 나무도 드물 것이다. 동백은 상록수여서 언제나 푸르기 때문에 언제 낙엽이 지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상록수라도 잎이 지지않는 나무는 없다. 가만히 보니 동백잎은 추풍낙엽이 아니라 춘풍낙엽이었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린 동백 열매는 예부터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역시 재래종이어야 그 열매도 크고 기름이 많이 나오고 맛도 좋다고 한다. 동박새는 떠나고 없어도 사람들이 그 열매를 좋아한다. 동백기름은 옛날에는 머리에 바르는 기름이었지만 지금은 유익한 식용유로 인기가 있다. 겨울이라고 할 것도 없는 서귀포이지만 이름대로 지금 동백꽃 봉우리가 턱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비바리처럼 맺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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