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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Jan 18. 2024

좌우지간(左右之間)

좌우가 뭐길래

  50년 전, 논산 훈련소에서 ‘좌향좌’ ‘우향우’ ‘좌우로 정렬’로 얼차려 받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장 쉬운 제식훈련이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좌우의 방향 감각이 무뎌져 고난의 훈련이 길어지기 일쑤였다. 그때만 해도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병사가 적지 않았으니 수백 명이 순간적으로 좌우를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틀린 사람들은 뭇 사람들의 야유를 받아야 했다. 그때는 그래도 고문관 노릇은 면했으나 지금은 운전하다가 우회전, 좌회전할 때 머리와 행동이 어긋나 아찔한 순간을 맞기도 한다. ‘앞으로 나란히’ 하면 앞줄만 맞추면 되지만 ‘좌우로 정렬’하면 옆줄도 같이 맞추어야 한다. 쉽지는 않았지만 정신만 차리면 곧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좌와 우가 줄을 나란히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정렬은커녕 서로 타도의 대상이 되어 싸우기 바쁘다. 도대체 좌우가 뭐길래 민족과 나라의 흥망마저 제쳐둔 채 이러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우선 한자로 보면 좌, 우 모두 助-돕는다는 뜻이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左는 ‘手-손을 工-재주로 돕는’ 글자이고, 右는 ‘손을 口-입으로 돕는’ 글자이다. 다시 말하면 工은 왼쪽에서 돕는 것이고, 口는 오른쪽에서 돕는 것이지만 돕는 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左右之間 - 좌이건 우이건, 이래도 저래도 마찬가지라는 말이 지금도 있지 않은가? 그 후에 左右에 사람 人을 붙여서 佐, 佑자가 나왔으니 원래의 左右로만은 돕는다는 뜻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人이 덧붙여진 것은 모름지기 사람은 서로 도와야 한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돕기는커녕 좌와 우로 나뉘어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으니 참 슬픈 일이다. 

 

 그러나 좌우는 절대적 방향이 아니고, 주체의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래서 옛날 제식훈련 때 그렇게 애를 먹었고, 지금도 운전할 때 헷갈리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왼손잡이는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대체로 좌우는 주체가 남쪽을 향하고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남향이 햇빛을 받기에 제일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집도 남향으로 짓고, 창문도 남으로 내고, 임금도 북면남향(北面南向-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함)-하였다. 그래서 정면은 남이고, 좌는 왼쪽, 방향은 東쪽이 된다. 그리고 우는 바른쪽, 西쪽이 된다. 풍수에서 흔히 말하는 左靑龍右白虎(좌청룡우백호)가 그렇다. 옛날 어전회의를 할 때 좌열에는 文臣을 세워 東班이라고 하고, 우열에는 武臣을 세우고 西班이라 했다. 신하들은 좌우로 늘어서서 힘을 합하여 국정을 보좌(輔佐했)고, 하늘은 보우(保佑)했다. 그리고 대체로 문신을 우대하여 좌가 우보다 선임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우리는 좌를 선호하여 ‘좌우’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우리와 전혀 상반되는 ‘우좌’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right를 ‘右, 바른, 오른쪽, 옳은’의 의미로 인식해왔다. 그리고는 이의 상대어인 Left를 ‘좌, 왼쪽, 그른’ 의미로 사용해왔으니 우리와는 정반대의 사고였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오른쪽에 있던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매달린 채 회개하여 가장 먼저 천국 열쇠를 받았으니 인류 역사상 가장 쉽게 구원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도 죽은 지 사흘 만에 하늘에 올라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최후의 심판 때 천당행은 오른쪽에, 지옥행은 왼쪽에 세운다고도 했다. 그 뒤로도 왕권이 흔들리면서 왕을 지키려는 왕당파를 우파로 불렀고, 평민 세력을 좌파라 부른 것도 우편향적인 사고였다. 강자였던 부르주아들은 약자인 프롤레타리아를 좌파로 불렀다. 사회주의자, 공산당 세력을 좌익이라고 부른 것도 우익들의 우월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편향의식이 해방 이후 우리한테 영향을 주어 극단적인 우좌대립을 낳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우리 전통의 ‘좌우관’이 서구의 ‘우좌관’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나이 든 사람부터 냉철히 생각해보자. 지금과 같은 좌우대립의 비극은 백 년이 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부모가 일제의 혜택을 받고, 가진 것이 많아서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우익의 편에 서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보수라는 집단이 편리하지 않았는가? 혹시라도 조상이 일제의 탄압을 받고, 사회적인 지위가 낮거나 불만이 많아서 좌익이 아니었던가? 그러다 보니 진보라는 저항세력에 매력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좌건 우건, 보수건 진보건 신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한낱 이기적인 이해타산의 집단에 불과하다. 혹은 이해타산이 마치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치부하는 타락도 있다. 알량한 이해타산 집단의 다툼으로 역사를 그르쳐서야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좌우지간,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상보(共存相補)하는 관계여야 한다. 국기를 볼 때마다 태극의 靑紅(청홍)이 분단, 대립이 아니라 바로 상생(相生)의 이치를 나타낸 것임을 새겼으면 좋겠다. 좌익을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옳더라도 이념적, 경제적으로 공산주의를 압도하여 선진국이 된 지금까지도 시대에 비판적이라고 해서 좌빨이라고 매도하는 행위는 히스테리적인 시대착오가 틀림없다. 설령 소수의 진짜 빨갱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걸 구실삼아 독재를 정당화하거나 정적을 탄압하려 든다면 교활한 기만행위이다. 보수건 진보건, 좌파건 우파건 대립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여야 한다. 그것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아니라 서구 선진국처럼 두 세력이 어울려 국익을 도모하는 관계였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저질정객들이 벌이는 분열의 정권 쟁취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국난을 극복하는 것임을 국민들이라도 깨달았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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