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의 자존감
제주도는 아직도 관권(官權)이 세다. 공무원은 대표적인 관권 집행자이다. 관권은 과거 군주제, 식민지, 독재의 흔적이다. 권력자는 관리들을 통해서 관권을 행사했고, 국민은 그 관리의 권위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권력을 가진 관리가 되는 것이 곧 출세였다. 그때는 관리들이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근래 민주주의가 정립되고서는 그 권위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아직 그 권위가 막강하다. 편견인지 모르지만 제주의 공무원은 시민들의 권익보다는 자신들의 권위와 편의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제주에 와보니 도로표지판에 눈에 거슬리는 지명이 많았다. 서귀포 바닷가에 촛대모양으로 뾰족하게 20미터나 솟아있는 선바위가 있어 외돌개라 한다. 그런데 도로표지판에는 외돌개라는 이름과 함께 한자로 孤立岩(고립암)이라고 병기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외돌개를 중국식으로 번역하여 새로 붙인 이름이다. 제주 서쪽에는 노루물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도 이를 번역하여 獐水(장수)라고 병기되어 있다.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 차원이겠지만 고유지명을 함부로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과잉친절이자 배알 없는 짓으로 보인다. 외국인도 고유한 우리 지명은 그대로 기억해야 마땅하다. 거문오름에 가보니 巨文岳, 엉또폭포는 翁渡, 돈내코는 頓乃克이라 하였으니 본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소리만을 한자로 적어놓았으니 앞의 孤立岩, 獐水보다도 더 속없는 짓이다. 이런 사족(蛇足)들을 그들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콧대만 높여주는 일이다. 제주인 특유의 자존심이 지각없는 공무원들에 의해서 허물어진 것이다. 이런 의견을 공무원에게 개진했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명은 개인의 의견으로 결정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 명분이고, 사실은 표지판을 고치는 곤욕을 치루고 싶지않은 관료주의 사고방식이었다. 어처구니없어 지역언론기관에 투고했지만 그마저도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 언론도 역시 권력기관이다.
내가 아는 분 중에 외지인이지만 제주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 있다. 제주의 지명에 관심을 갖다보니 나와 같이 잘못된 지명이 많음을 알고 이에 대한 연구를 했다. 서귀포구 앞에 있는 섬 이름은 蚊島(문도)라고 한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절경이 터무니없이 '모기섬'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문을 갖고 조사해 보니 모기섬이란 일제가 악의를 갖고 새로 고친 이름이었을 뿐, 그전에는 어엿이 鹿島였었다는 기록을 확보했다고 했다. 과연 사슴섬이라야 백록담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이러한 근거를 갖고 당국에 진정을 하니 마지못해 접수를 했으나 확인이 필요하다며 몇 년이 지나도록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답답하여 제주도의 저명한 지명학자에게 호소를 해봤지만 역시 수긍하지 않더라고 했다. 생각건대 공무원은 고향의 진실보다는 관료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학자는 외지인이 자신도 모르는 일을 먼저 알았다는 사실이 제주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것 같다.
제주도의 교통단속은 유별나게 가혹하다. 보통 4차선도로에는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30킬로 제한구역을 최소화한다. 그런데 제주에는 이런 구역이 너무 많아서 속도위반에 걸리기 십상이다. 정규학교라면 어쩔 수 없겠으나 유아원, 노인정까지 4차선 길에 마구 허가하였으니 노약자와 운전자를 다 위험하게 만드는 무개념행정이다. 더구나 외지인에게 자동차전용도로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30킬로 표지는 함정에 가깝다. 물론 교통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이런 위험한 함정을 곳곳에 파놓은 것은 시민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관료행정으로 보인다. 육지에서는 카메라 단속을 하더라도 24시간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운용한다. 적발이 목적이 아니라 주의, 경계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새벽 심야에도 유치원 앞이라 해서 어김없이 30킬로를 적발해낸다. 캄캄한 밤중에 어린이가 길을 건널 리 만무한데 4차선에서 45킬로 벌금딱지를 발부하는 것은 교통안전이 아니라 심술에 가깝다. 오죽하면 운전자가 카메라를 무단히 떼어버렸을까? 세계적인 관광지인 제주에서 외지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벌이는 이런 묻지마단속을 누가 승복할까?
공무원들의 소견이 이러하니 금쪽같은 제주도 땅을 수백만 평을 헐값으로 중국인들에게 팔아 넘기고, 그들에게 영주권을 남발하여 제주도는 중국에 점령당했다는 비아냥을 듣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무비자로 온 중국인은 범죄를 저지르고, 그들의 투기가 지나간 자리는 폐허만 남아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제주도의 바가지상혼으로 제주도보이콧으로 떠들썩할 때에도 제주지사는 그것도 제주의 문화라고 감싸고돌았으니 제주지사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제주도의 교통경찰들은 아직도 매우 권위적이고, 고압적이다. 그런 허접한 권위의식보다는 제주의 환경보전, 관광서비스 확충, 바가지상인 단속, 여행안전보장 등에 힘쓰는 진정한 지방행정이었으면 좋겠다.
제주도는 특유의 자연지형, 문화, 전통을 간직하고 있어 외지인들에게는 오고싶어 하는 세계적 관광명소이다. 그런데 왜 국민들이 제주를 외면하는지 심각하게 반성해 볼 일이다. 제주인들의 긍지와 자존감은 존중하지만 외지인들이 보기에는 '한라산 조랑말은 과천경마장 경주마를 모르는 법'이라고 하더라도 경청하는 것이 미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