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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40

지장샘의 전설

by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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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에는 용천수(涌泉水)인 지장샘이 있다. 제주도에는 천 개가 넘는 용천수가 있는데 용천수 없는 제주도는 생각하기 어렵다. 비가 많은 곳이지만 빗물이 바로 바다로 흘러가거나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식수를 구하기 쉽지 않다. 계곡도 대부분 물이 없는 건천(乾川)이고, 못도 드물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용천수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용천수는 심층지하에서 수십 년 정화된 물이 솟아오른 삼다수급의 깨끗하고 맛이 좋은 고급 음용수이다. 오염된 강물을 정화한 육지의 수돗물 하고는 비교할 수 없다. 수량도 풍부해서 천지연폭포, 정장폭포의 水源(수원)은 용천수이다.


지장샘이란 ‘지혜(智)를 숨긴(藏) 샘’이란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제주도에 瑞氣(서기)가 서려 중국의 술사가 그 기운을 두려빼려고 여기에 왔다고 했다. 다행히 현명한 노인이 중국 술사를 속여서 샘물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지장샘에는 작은 습지가 있는데 최근 올레길을 조성하느라 거기에 인공못을 만들고 수련을 심어 蓮池(연지)를 만들었다. 연못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바닥을 파내고 두꺼운 비닐을 깔았다. 지장샘물을 끌어들이고, 배수하게 했으니 물이 썩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과연 연못을 만들고 수련을 심어놓으니 수련이 자라 꽃이 피어 蓮池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키 큰 연꽃에 비해 수련은 작지만 야무지고 오래 간다. 졸고 있는 수련(睡連) 사이로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놀아 지장샘의 지혜를 보는 듯했다. 둘레에 데크길을 만드니 지장샘로 올레길의 볼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원래 내 산보길이었지만 연꽃이 피고나서는 하루에도 두어 차례 더 찾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물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두터운 녹조가 퍼렇게 연못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녹조뿐 아니라 물속으로는 파래같은 이끼가 늘어붙더니 물고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녹조 속에 덮여 질식사했는지 걱정이 된다. 그제야 바닥에 깔아놓은 비닐이 화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닥이 막히니 물을 흐르게 해도 물이 썩는 사태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연을 어긴 결과이다.


지장샘 연지를 보니 사대강과 새만금이 생각난다. 현대인들은 자연을 개척과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과연 인류의 문화는 자연을 극복한 역사이다. 환경론자들처럼 자연에 순응하기만 했다면 인간의 문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지금까지 인류를 유지시켜 온 것은 역시 자연이다. 적자생존의 원리를 생각하면 인류의 생존은 자연에 순응한 결과이다. 우리와 달리 서구에서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데 힘썼고, 결과적으로 서구의 발달된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도전으로 인류는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문명은 인류를 편리하게 했지만 동시에 멸망시킬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자연에 순응할 것인가, 맞설 것인가는 인류가 당면한 운명적 질문이다. 문명과 문화는 동류인가, 아니면 별개인가? 문명은 물리적인 편리요, 문화는 정신적인 지혜라면 서로 상반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연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결과가 文明이라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文化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인간이 노력한 결과'라는 점에서 공통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양자택일보다는 융합하는 방식이 옳을 것이다. 다만 눈앞의 편리보다는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해야 한다.


당연한 진리이면서도 문명과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 말이 ‘물은 흘러야 한다’라는 명제이다. 물길을 막는 것은 우선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대강을 토막토막 막아댔고, 하구둑을 꽁꽁 틀어막았다. 그것도 모자라 천수만, 새만금에서 바닷물까지 막아놓았다. 이는 자연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극한도전이다. 아직도 그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 이익과 편리보다는 그 불편과 부작용이 더 큰 것 같다. 막대한 돈을 들여 사대강을 파내고, 막아댔지만 수재를 막을 수 없었다. 水利를 얻었다고 자랑하지만 보(洑)와 하구둑은 생태계를 파괴하여 인간의 삶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강을 사람 신체로 말하면 하구는 목이고, 중류는 가슴이고, 상류는 발로 비유할 수 있다. 상류는 저수지라는 신발끈으로 발을 묶어도 좋지만 가슴을 보(洑)로 묶고, 목을 하구둑으로 묶으면 숨을 쉴 수가 없게 된다. 우리 사대강이 천상 이러한 꼴이 되어있다. 천수만을 막고 쾌재를 불렀지만 황금어장을 잃고 얻은 것은 약간의 농지와 조류독감을 옮기는 철새였고, 국력을 기울인 새만금에서는 세계적인 갯벌을 잃고 얻은 것은 아직도 처치곤란한 황무지였다. 세계 청소년을 불러서는 글로벌망신을 자초하기도 했다. 그 젊은이들이 끔찍했던 기억을 언제나 잊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반성을 듣기 어렵다. 시화호를 개방하니 죽었던 생태계가 다시 돌아왔다는 성공사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극복해야 편리한 문명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눈앞의 이익에 팔려 인간의 생존을 망치는 小貪大失(소탐대실)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당장의 효율을 따져 원자력 발전에 의지한다면 지구의 위험과 오염을 막을 수 없다. 팬데믹이나 작금의 기후위기도 자연의 순리를 어긴 엄중한 경고라는 사실을 모른 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재생에너지 개발을 미친 짓이라 매도하는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 기후위기론을 사기라고 하는 사람이 초강대국의 대통령이다. 일찌기 공자는 백성의 어리석음을 탄식했고(民不可使知也), 맹자는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들을 不知類(부지류)들이라고 했다. 환경을 지키는 것은 편리한 문명을 넘어서는 인간생존이 달린 관건이라는 사실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흐르는 지장샘에도 녹조가 덮는데 흐르지 못하는 강물, 바닷물이야 오죽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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