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의 외교언어
한글이 쉽지 국어가 쉬운 것이 아니다. 한글을 쉽게 익힌 외국인도 정작 한국어는 어떤 언어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한자어가 많은 한국어에서 한자를 모르는 서구인들에게는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한자를 모르지만 어순(語順)이 같은 중국어가 한국어보다 더 쉬울 수가 있다. 국어의 띄어쓰기는 모국어인 우리들한테도 공포스럽다. TV ‘우리말겨루기’에서 달인들도 마지막 관문인 띄어쓰기는 밧줄이 바늘구멍 지나가기이니 외국인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학자들은 아는 척만 할 것이 아니라 쉽게 쓸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난관은 우리말의 복잡한 존비법(尊卑法)인데 이는 문법 이상의 부담이다. 예절을 따지기 좋아하는 중국인들보다도 우리는 상대에 따라서 높임과 낮춤말을 더 엄격하게 구분한다. 어미나 어간에 존비를 표시하는 어법적 장치를 하거나 존비를 나타내는 어휘를 따로 마련하였다. ‘죽다’와 ‘돌아가셨다’, ‘먹다’와 ‘잡수시다’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만약 이를 어기면 고얀놈이 되기 십상이다. 물론 다른 언어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철저하지 않다. 예절보다는 평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서구어와의 차이는 매우 크다.
성경을 보면 그런 언어문화적인 차이가 현저하게 드러난다. 서구의 ‘바이블’을 우리가 ‘성경’으로 번역하였는데 원서에서는 없는 존비법을 구사하다 보니 어색한 장면도 적지 않다. 성경에서는 예수가 절대자이다 보니 예수님을 최대한 높여 서술했고, 그 상대자는 낮춰서 옮겼다. 예수는 언제나 절대자 ‘예수님’이었고, 상대자는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낮추는 화법으로 번역했다. 그 극단적인 장면이 빌라도가 예수를 신문(訊問)하는 장면이다. 빌라도는 당대 최고의 통치자였고, 예수는 피지배민족의 피의자에 불과했다. 그런데 우리의 성경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께 높임말을 썼고,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낮춤말로 하고 있다. 이건 우리의 감정을 번역한 것이지 원서에서는 있을 수 없는 화법이다. 만약에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낮춤말을 하고, 예수가 높임말을 썼다면 우리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다. 우리의 화법에서는 ‘예수께서’라고 하지않으면 거룩함이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이는 어색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교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외국인들은 ‘님’자를 붙이는 법이 없다. 만약에 교사를 ‘선생’이라고 부르는 순간 교권은 요즈음처럼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과거 국가원수를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고, 지금은 대통령님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우리만의 특수한 사정이다.
국가원수의 정상회담에서 대통령이 구사하는 존비법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우선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이니 함부로 상대방에게 높임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기 때문에 우리 국민도 존중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보다 높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정부 대변인이 국민 앞에서 대통령의 행위를 높임말을 쓰는 경우를 본다. 어느 안전이라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라로 하는가? 트럼프가 極甲(극갑)이라서 높임말을 하고싶더라도 그에게 호감을 갖지 않는 우리 국민감정을 생각하면 삼가야 한다. 자칫 국격을 떨어뜨리거나 국민까지 낮추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대방은 존비화법이 없으므로 구태여 존칭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것에 민감한 것은 우리 국민일 뿐이지 저들은 그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다. 설령 우리의 국력이 약하여 주눅이 들더라도 언어만은 당당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국민도 긍지를 가질 수 있다. 오래전 외국에서 우연히 옛날 김일성이 중국의 외교사절단에 대한 환영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김일성이 강대국인 중국사절들에게 호칭을 당당하게 ‘당신들’이라고 부르고, 상대방을 높이지 않는 것이었다. ‘당신’은 존칭이라고 할 수 없고, 일면 낮추어 부른 의도일 수도 있다. 서구인이나 중국인들은 부자간에도 서로 ‘너’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김일성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자신감과 주체의식이 강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중국은 미국이 우리를 대하는 것처럼 북한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것 같다. 약자 입장에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외국원수는 물론 그 각료들에게까지 높임말을 하고, 대화가 아닌 제삼자 입장에서도 꼬박꼬박 높임말을 쓴다면 의식있는 국민으로서는 듣기 거북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번 회담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더 두고 보야야 하겠지만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참사를 운운하는 야당의 딴죽에는 대통령과 협상단이 구사한 존비법도 영향을 주지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국가원수의 화법에 대해서는 전에도 언급한 바 있었지만 과거는 어쩔 수 없더라도 앞으로는 여기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특히 대통령의 의전(儀典)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유의할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말의 존비법을 무시하자는 의도는 아니다. 존비법은 국어의 주요한 언어문화로서 지켜져야 할 우리의 어법이다. 다만 우리의 협상단이 외국 원수나 각료들한테 필요 이상의 저자세 높임화법을 구사하는 장면에서 국민적 자존심이 상해서 하는 말이다. 외국한테는 약하고 국민한테만 강하다면 좋은 지도자가 아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국격(國格)이란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감옥에 있는 전임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국격과 나라의 이익에는 아랑곳없이 미국에 반정부활동을 하거나 이상한 종교에 편승해서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에서 국격(國格)은 고사하고 인격이란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만약 그가 이번에 국가대표였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를 생각해보면 '하느님이 보우하신다'는 애국가가 고맙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