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나물 천지
제주도는 날씨가 따뜻하여 식물의 생명력이 왕성하다. 겨울에도 나무도, 풀도 상록이 대부분이라서 녹음과 채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제주도에 사는 매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녹색나물이라면 대체로 제철 봄나물로 그치기 마련이지만 제주도에서는 제철이 따로 없이 연중 즐길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고기를 으뜸 음식으로 꼽았다. 노인도 잇몸으로라도 고기를 먹어야 씹어야 기운이 나고, 고기를 구할 수 없으면 자신의 종아리살이라도 베어서 부모공양을 한다는 효자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맹자도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어야 태평성대라고 했다. 이러한 육식론은 어쩌면 북방인들의 식습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비들은 甘心如薺(감심여제)-마음은 냉이처럼 달콤하다-라 해서 채식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고, 나물은 씹을수록 맛이 난다고 해서 <菜根譚채근담>이라는 수양서를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곧이듣기 어려웠지만 ‘나물이 고기보다 맛이 있다’라는 시조도 국어시간에 배웠었다. 나는 금욕주의나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고기가 비싸기도 하거니와 육식의 유해론이 적지 않다보니 의도적으로 채식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초식동물들이 육식동물보다 덩치도 크고 힘이 센 것을 보면 채식이 건강에 더 좋은가 싶기도 하다. 가끔 고기를 먹긴 하지만 영양실조는 면해보고자 하는 수단에 가깝다. 그래서 고사리와 녹색나물이 많은 제주도의 기후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뽀리뱅이’는 육지에서는 잘 알지 못했던 나물이다. 물론 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얼핏 냉이와 닮기도 해서 냉이와 함께 국을 끓여보았지만 그 맛이 신통치 않아서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제주도에 와서 비로소 그 이름과 맛을 알 수 있었다. 보통 봄나물은 냉이처럼 꽃이 피면 쇠어서 먹을 수 없지만 이것은 꽃이 피고서도 그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 대공이 삐쭉 올라와서 꽃이 피기 때문에 풀섶에 숨지도 못한다. 생긴 것도 육지것처럼 거칠지 않고 부드럽고 연하다. 뿌리는 먹지 않지만 쑥이나 냉이보다 잎이 더 풍성하기 때문에 먹을 것도 많다. 시금치처럼 무치면 그 맛도 상큼하고, 쌉쌀하여 입맛이 당긴다. 뽀리뱅이는 봄에 일단 씨앗을 퍼뜨리고 나면 잎이 말라 사그라진다. 이제 그 맛을 보려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싶었는데 가을이 되니 다시 살아나서 봄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고 반가워 봄처녀처럼 설레며 뜯어와서 무치니 그 맛이 봄과 다르지 않다. 12월인 지금도 그 맛을 즐길 수 있으니 나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만한 횡재가 없다. 더 좋은 일은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맛좋은 나물을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널려져 있는 뽀리뱅이는 내 독차지이다. 제주 사람들은 먹을 것이 많아서인지 안 먹는 것이 많다. 육지에서는 귀한 도토리, 은행, 과일들이 길에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따뜻한 기후에 바다, 산에는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지에서 기근을 피하여 제주도에 이주 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제주도에서는 이모작 작물이 많고, 나물도 그중의 하나이다.
민들레
길가에 흔한 민들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늦은 봄에 꽃이 피어서 백발을 날리고 나서는 가을이면 다시 새잎이 올라와서 가을민들레가 된다. 민들레는 약리작용도 있다 하니 더욱 좋은 일이고, 쌉쌀한 맛은 뽀리뱅이보다 더 낫다. 무칠 것도 없이 씻어서 고추장을 찍어먹으면 쌉쌀한 맛이 고기보다 맛이 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데 내 몸이 약이 필요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쓰기로 말하면 씀바귀가 최고이지만 여기에서는 흔치않아 서운하다.
물냉이 무침
제주도에 와서 처음 본 것이 ‘물냉이’이다. 개울에 가면 사철 지천으로 널려있지만 나도 여기에 와서 처음 보는 것이고, 여기 사람들도 먹지 않으니 그만한 다행이 또 없다. 지인을 따라서 장화를 신고 낫으로 베어다가 무쳐먹으니 담백한 맛이 나물로 손색이 없다. 이름이 물냉이지만 냉이를 닮은 구석은 없다. 차라리 미나리에 가까운데 미나리는 더러운 물에서 자라지만 물냉이는 깨끗한 물에서만 자라니 더 귀해 보인다. 게다가 그 생명력도 미나리보다 왕성하여 낫으로 베어내도 얼마 안 가 다시 수북하게 올라온다.
치커리
육지에도 치커리가 있지만 이곳에는 사철 밭에 산다. 치커리의 매력은 역시 쌉쌀한 맛이다. 나는 특히 그 맛을 좋아하여 자주 인심 좋은 주인 밭에 가서 거저 따다 먹는다. 씀바귀만은 못하지만 언제나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녹색나물이다. 나이가 들어 쓴맛, 신맛이 좋아지는 것을 보면 장수체질인지도 모르지만 늙은 몸으로 오래 살기는 싫다. 장수를 누리기 위해서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짓을 오래 하고싶지 않다. ‘나 좋다고 남 싫은 짓 하지말자’는 시조 구절도 있었다. 겨울에도 춥지않은 여기에서 나물 먹고, 물 마시며, 팔베개를 즐길 수 있는 것만 해도 제주살이를 할 만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