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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Nov 18. 2019

장수의 비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한번 태어난 이상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의인도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것이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살고 싶지만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조급증 환자였을 뿐입니다. 장수는 인류의 영원한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十長生이란 것을 꾸며서 장수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중 산, 水물, 石바위, 雲구름, 日해는 무생물이라 생명이 없던 것이고, 松소나무, 不老草불로초는 식물이고, 鶴학 鹿사슴 龜거북은 짐승이어서 인간과 장수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무생물, 식물, 짐승이라면 오래 산들 좋을 게 있을까요? 그렇다 해도 그중 인간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은 거북이 정도가 있을 뿐이어서 결국 십장생의 장수는 인간의 헛된 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長壽에 인생의 목을 거는 장수병 환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장수의 기준이란 한결같이 나이에 있고, 그저 숨만 쉬고 있으면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막무가내 오래 사는 사람이 인생 최후의 승자인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친구가 백 년을 산 뒤, 친구의 관을 짜고, 그 관을 짤 나무를 심는 사람이 인생의 승자였습니다. 이는 옛날 우스갯소리지만, 동창생이 몇 사람밖에 안 남았다든지, 오래 살아 걱정이라는 사람도 속으로는 은근히 장수를 자랑하고 싶은 심산이 들어있습니다. 죽기 전에 네가 성공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덕담도, 그 꼴을 보기 전에는 못 죽는다는 악담도 알고 보면 장수에 대한 애착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老子는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은 것'이 壽라고 했으니 장수란 '生死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치'가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살아있는 것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일이 허다합니다. 살아 있는 것이 자신은 고통스럽고, 불행하고, 남에게는 해를 끼치는 일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경로당, 노인병원, 공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회, 정부, 법원 등 나라를 이끌고 가는 곳에 가보면 그런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태어나는 사람도 적고, 죽는 사람은 더 적은 이런 고령화 사회에 노인마다 백년장수를 외치면서 ‘못 간다고 전해라’고 버틴다면 경로효친은 고사하고 세상이 위험할 일입니다. 


  이런 세상이라면 인생이란  나이, 건강이 아니라 ‘이 세상에 무언가 가치 있는 존재’일 때까지로 한정하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모질고,야박한 말이라고 하겠지만 옛 성현들이나 유수의 철학자들도 옛날부터 그렇게 말해왔으니 새삼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중국사람들은 사람답지 못한 삶을 畜生-짐승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댑니다. 거기에는 인간으로 짐승처럼 산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는 의중이 들어있습니다. 백 년을 산다고 호언하지만 그때까지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게 이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발휘할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노인들은 대부분 육체건강에만 관심을 쏟지만 그보다 더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정신건강입니다. 나이가 들면 판단력,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필경 치매, 중풍에 이를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짐승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하고, 백 년 장수를 호언한다면 참으로 염치없는 노인일 것 같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장수를 장담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본분을 못하게 되면 90이건, 100이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흔히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애써 살려고 하는 노력을 따로 하지 않는다면 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나이 여든이 넘어가지고 극성스러운 보양과 보신에, 병원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오래 살 궁리만 하지 않는다면 그 나이에 얼마든지 자연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나이면 옛날 같으면 벌써 죽었을 나이이니 장수란 자연의 섭리를 어긴 억지인생인 셈입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노인의 불행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옛날의 노인들은 제때에 죽었기 때문에 이런 불행을 겪을 겨를이 없었으니 오늘날 노인의 불행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 환경파괴, 미세먼지라는 특급도우미가 점점 맹위를 떨친다면 평균나이에 자연사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도, 서운해할 일도 아닐 것입니다. 장수란 나이나 숨을 쉬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이룬 성과나 보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맹자가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분을 다하고, 하늘의 命에 따르는 것'이 삶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같은 세월을 살아도 장수하는 사람이 있고 단명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에 쫓기듯이 산다면 인생은 짧아지고, 만족과 여유를 가지고 살면 인생은 길어집니다. 세상 일에 묻혀, 인생의 쾌락을 좇아 실컷 즐기기에 바빠서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인생일까? 아마도 그럴수록 마지막에 회의와 허무도 커질 것 같습니다. 구운몽의 성진처럼-  그보다는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며, 자신만의 시간과 여유를 갖는다면 삶이 풍부해지고 길어질 것입니다. 얼핏 무기력하고 청승맞아 보이더라도 ‘여유를 갖고 삶을 뒤돌아보고, 욕심을 버려 다투지 않으며, 세상 일을 줄여 한가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장수의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결국 인생의 길고 짧음은 오래 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을 것 같습니다. ‘짧아도 살아있고, 길어도 죽은 것-’ 그것이 또한 인생일까 합니다.          

  



혼자 앉아서

서거정


혼자 묻혀 살자면 찾아오는 손도 없어                   獨坐無來客

빈 뜨락 지날비에 날이 저문다.                            空庭雨氣昏

잉어는 못에서 연잎을 흔들어 대고                       魚搖荷葉動 

까치는 나무에서 가지를 까불어 댄다.                   鵲踏樹梢飜

젖은 거문고 그래도 뜯을 만하고                          琴潤絃猶響 

식은 화로일망정 아직 따스워.                             爐寒火尙存

진흙탕 길 드나들기조차 어려우니                       泥塗妨出入

종일토록사립문열일조차없네.                                     終日可關門                                                                                                                               

                                                  <우리 詩로 읽는 漢詩>에서     


  원 제목은 獨坐이다. 혼자 자연에 묻혀 살다 보면 땅 한 모퉁이라도 세상은 내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마트폰을 뒤지거나 TV를 켜 놓으면 세상은 남의 것이 되고 만다. 내 세상을 가지고 있어야 사는 것이지 남의 세상을 살아 본들 허무하고 고달픈 인생일 뿐이다. 노년에 들어서 먹고 살 방도조차 없다면 불행한 일이니 구태여 장수를 탐할 일이 아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다면 세상에 기웃거리느니 내 세상을 살 일이다. 아직 애송이 노인이지만 며칠을 살아도 내 세상을 살아야지 남의 세상에서 구차하게 오래 살아본들 살 만한 인생이 아닐 것 같다. 살 만한 인생이 아니라면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싶고, 나의 즐거움이 없다면 하필 살아야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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