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에 연연하기보다는 살아있는 생명으로 살자.
중국에 옛부터 양생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養生이란 ‘생명’을 기른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생명의 기운인 ‘생기’를 기른다는 해석이 더 적절합니다. 生자는 땅 위로 식물이 가지를 뻗고 있는 모습을 그린 상형글자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생기’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氣기란 살아서 움직이는 기운이고, 命명은 하늘에서 정해진 운명이므로 생기와 생명은 서로 다른 뜻입니다. 生命이란 하늘이 준 ‘삶의 운명’인데 그것을 사람의 힘으로 더하거나 길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천수-하늘에서 준 목숨-라고 했습니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인간은 목숨을 연장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늘의 뜻을 인간이 어긴 것이라서 본래의 생명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인위적으로 늘린 목숨은 生命이 아니라 人命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까지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고, 인명부터는 억지스러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장수노인의 목숨을 ‘생명’이라고 하기보다는 ‘인명’이라고 해야 적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생명보험’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그것을 ‘人壽’(인수)-인명보험-라고 합니다. 한자의 고향답게 한자를 쓰는 솜씨가 역시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입니다. 생명과는 달리 생기는 자신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살게 하는 기운을 말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가족을 지켜내고, 나아가 이웃에게 도움을 주어야 생기를 가졌다고 할 것입니다. 맹자는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 養生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生氣와 養生道는 자신의 인명 연장이나 꿈꾸는 장수술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인명 연장보다 더 끔찍한 거역이 인간복제, 인공지능의 개발입니다. 인간의 불사불로를 노리는 생명복제는 오히려 인간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고,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자의 출현은 인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나와 똑같은 인간이 수없이 많다는 것은 곧 ‘나’가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고, 인간이 수없이 복제된다면, 더구나 인간보다 월등한 지능과 완력을 가진 인공지능자가 인간을 지배한다면 인간은 생존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 불노초, 불사약을 찾다가 오히려 죽음을 재촉한 진시황보다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적으로는 장수를 누릴 수 있겠지만 인류로 보아서는 자연의 섭리를 어긴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할 것입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인류가 온전할 리 없건만 장수에만 몰두하고 하늘의 이치를 거역한다면 그것은 생기가 아니라 殺氣(살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나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생명에 생기를 더하고 기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양생도의 원조격인 도가나 신선술에서는 인간의 생명보다는 자연의 생기에 동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본래의 신선술은 생명을 연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人間의 굴레를 초월하여 자연의 生氣에 동참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도사, 신선은 생기를 중시하고 육신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육신은 생명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生命은 生氣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命의 본래 의미는 ‘하늘의 뜻’이었으니 생명이란 우주의 생기에 의해서 정해진 목숨일 뿐입니다. ‘목으로 숨을 쉬는 것’에 불과한 목숨을 향한 집착이 육신을 이기지 못하면 생명을 잃고, 생명에 집착하면 생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억지로 숨을 쉬어보아야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살아있어도 죽느니만 못한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는 목숨이 아니라 사람 구실할 수 있는 生氣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사실이 이렇건만 후세의 道敎도교는 仙藥선약을 다리고, 丹田단전을 하는 데 열중하여 장수술에 골몰하였습니다. 養生양생을 약물과 육신의 건강과 쾌락을 통해서 얻으려 한 것으로, 人命에 집착한 결과입니다. 진정한 양생도는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경지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육신 생명에 대한 집착, 명예 부귀에 대한 탐욕은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의 굴레입니다. 맹자는 양심과욕(養心寡慾), 마음을 기르려면 탐욕을 없애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양생도와 멀지 않은 듯합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진시황이나 제왕들은 도사의 사술(邪術)에 속아 오로지 불사약, 불로초에 목을 걸다가 오히려 목숨을 재촉했으니 허망한 장수술에 현혹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보다는 콘크리트 공사를 끝내고 굳을 때까지 관리하는 과정인 ‘양생’이 차라리 養生道의 원리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금도 무병장수를 인생의 지상목표로 삼아 병원 문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명약 · 명의를 찾아 헤매고, 비지땀을 흘리며 운동에 열중인 노인들이 많습니다. 구태여 말릴 것이야 없지만 그것은 생기를 기르는 養生이 아니라 목숨을 지키는 양신(養身)일 뿐입니다. 장수술과 양생도를 혼동한다면 진시황이나 한무제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양생도는 육신의 건강과 장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습니다. 목숨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굴레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人命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生氣를 잃고, 나아가 자연의 生氣에 동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자연의 생기에 동참할 수 있다면 생명과 육신을 가볍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신선, 도사 같은 허망한 소리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무병장수를 외치는 탐욕보다는 차라리 현실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무병장수는 물리적으로는 가능한 말이지만 정말로 실현된다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말입니다. 노년이 되면 후세를 망칠 그런 이기적인 욕심 대신에 실감이 덜 나더라도 품격 있는 양생도를 연마하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현대의학에 의지하여 건강관리에 열중하고, 오래 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노령화시대에 오로지 무병장수만 바라는 것은 노인의 이기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기주의로 자신만 즐겁고 건강한 장수를 누린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을까? 오히려 삶의 여한과 죽음의 공포가 더 커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자식과 사회는 엄청난 부담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노인들의 백수 욕심에 국민건강보험이 거덜날 지경이라고 합니다. 죽기까지 건강과 즐거운 노년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양신술이나 장수술보다는 지구의 환경이나 후세 사회에 生氣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길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이 사회에 본분을 다하는 것이고, 그것이 떳떳한 노년을 누리는 養生道(양생도)가 아닐까 합니다. 자식과 이웃이 고통스럽고, 지구가 망가지고, 인류가 멸망한다면 나만의 장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무병장수가 목표인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