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풀 줄 아는 노인은 행복하다.
지금 대부분의 노인들은 절약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세대입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보릿고개를 넘기에 바빴던 처지에서 먹는 것은 줄이고, 돈은 꼭 쓸 데에만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어린이저금통장에 담임선생님께 일일이 도장을 맡아야 했으니 어렸을 때부터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죠. 그래서 돈을 여유 있게 써 본 적이 별로 없고, 낭비할 돈도 없었습니다. 돈은 샘물과 같아서 써야 생긴다는 말도 있지만 보통사람으로서는 따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남을 돕는 데 인색했던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노년을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다면 절약정신 덕분이었으니 그것은 분명히 미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볼 때 절약은 소극적, 정체적 행동방식입니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면 개인주의요, 소비를 줄이자는 것이니 反경제적이요, 남이야 어쨌든 상관없다면 이기주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젊어서 절약 덕분에 먹고 살 만한 노년이 되었다면 이제는 소비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고, 이왕이면 남에게 베풀 줄도 알아야 품격 있는 노인이라 할 것입니다. 원 없이 써보고, 먹고, 즐기고, 해외여행을 열심히 다니는 소비활동이 후회 없는 노년일지는 몰라도 그것을 사회의 미덕이라고까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은 만족한 삶이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경제유통 외에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비와는 달리 베풀기는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니 사회적 미덕이요, 정신적인 여유요, 가장 좋은 선행입니다. 젊었을 때는 당장 먹고살기 바빠서 절약에 매어있었다 하더라도 늙어서 먹고 살만해졌다면 이제는 좀더 적극적, 능동적 방식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절약하면 내 것이 되고, 베풀면 남의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평생 구두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절약에만 열중하면 재물은 쌓일지 몰라도 자신은 잃는 것입니다. 多藏厚亡다장후망, 재물을 많이 쌓아 둘수록 많이 잃게 되는 법입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재물을 차지하고 있더라도 저승에 가져갈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결국 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산을 많이 남겨주어도 내 것은 아닐뿐더러 자손의 것도 아니기 쉽습니다.
재물을 소비하면 없어지지만 베풀면 이웃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운이 좋으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나누어 준 몇 배로 커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내 손에 없으니 도둑맞을 염려도 없고, 저승길도 가벼워질 것이 아닐까? 저승길 노자를 챙기는 노인네도 있지만 외국에 나가도 우리 돈을 쓸 수 없는데 저승에서 그 돈을 받을 것 같지 않습니다. 더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면 노자가 많을수록 저승길이 무겁지 않을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바꾸어도 보고, 죽음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지만 변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변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챙기는 욕심보다 베푸는 즐거움을 누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베풀면 대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도 나쁠 것 없지만 대가가 없더라도 베풀어야 기쁨과 행복이 커진다고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보시(布施)를 하면 하늘이 갚아주고, 보이지 않는 선행으로 음덕(蔭德)을 쌓으면 후손에게라도 보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설령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하늘이 무심하여 당장 갚아주지 않더라도 베풀어 행복과 위안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을까요?
내 한 몸마저 추스릴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이 수두룩한데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입니다. 쌓아 둔 재산이 없다고 해서 베풀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철판에 눌어붙은 고기 한 점이 어항의 금붕어 모두를 배 채울 수 있듯이 자동이체 푼돈이라도 굶주린 사람들을 살려 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다못해 길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줍는 것도, 아파트 화단에 나있는 잡초 한 포기 뽑는 것도, 장애인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것도,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짜장면 값을 먼저 내는 것도, 설거지 방청소를 하는 바깥노인도, 젊은이를 칭찬해 주는 말 한 마디도 남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주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베풀 수 있습니다. 듣기 싫어도 들어주고, 보기 싫어도 보아주고, 맛이 없어도 먹어주고, 이길 만해도 져주고- 이런 것들은 약간의 인내심과 관용의 마음만 있으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더라도 상대방에게 기쁨을 주는 훌륭한 베풀기입니다. 그나마 건강한 노인이나 누릴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선행의 기회입니다. 병들어 쓰러지면 베풀기는커녕 받기만 하는 천덕꾸러기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해서 나까지 행복해진다면 최고의 베풀기일 것입니다. 절약정신이 늙은이 마음까지 묶어둔다면 딱한 일입니다. 젊어서의 절약은 늙어 베풀기를 위한 것이어야 할 때 절약의 미덕은 가장 커질 것입니다. 늙어서까지, 죽을 때까지 지갑과 마음을 닫아둔다면 혈관마저 막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쌓아놓은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노년에 이르면 베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베푸는 것인데 돈도 재산도 필요 없이 건강한 신체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뭐 신기한 것도, 대단한 것도,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우선 남 달리 가지고 있는 기능 재주만 있으면 가능한 이른바 재능기부입니다. 가지고 있는 재능을 숨기고 있다가 죽는다면 사회적인 손실이니 하나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일입니다. 다만 대가를 바라면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장사하는 것이겠죠. 어차피 썩어질 몸이니 낡아빠진 육체를 보존하기에 골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육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맹신이나 털끝 한 올, 살점 한 조각이라도 지켜내야 한다는 이기주의와 전근대적인 효도정신은 노년까지 인색하게 합니다. 불교에서는 온 몸을 다 바치는 사신공양(捨身供養)도 있는데 이런 이기적 보신주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아직은 쓸 만한 온 몸의 장기는 많은 젊은이의 목숨을 살려낼 수 있는 화수분입니다. 뇌사상태까지 기다렸다가 장기기증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좋기로는 건강할 때 미리미리 장기 기증서를 써 두는 것이 더 큰 베풀기일 것입니다. 장기도 늙어질수록 쓸모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장기를 기증할 판에 뼈, 피부, 털끝까지도 아낄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심지어는 시신까지도 통째로 기증하는 분도 있습니다. 선뜻 용기가 나는 일은 아니지만 무슨 특별한 대가나 희생을 치르는 것도 아닌, 누구든지 단지 마음먹기 하나에 달려있는 마지막 베풀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마당에 썩어 없어질 육신을 고이 묶어서 호화분묘에 거창하게 이름을 새겨 세상에 남기는 것은 자랑이 아닐 것 같습니다.
예부터 공덕을 집안에만 쌓지 말고, 이웃에, 사회에,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도 땅에 쌓아 둔 곳간은 언제 불타버릴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현들이 내 것이란 본래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나’도 없는 경지라면 ‘내 것’이란 본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베풂의 덕으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린다면 제일 좋겠고, 설령 천국이 없더라도 사람으로 태어나서 분분을 지키며 남을 도와가며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맞다면 역시 죽어 아낄 것이란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