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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Aug 08. 2019

용서와 관용

나이가 들면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덮어두는 너그러움을 갖자.

     용서를 쉽게 말하면 ‘나에 대한 남의 잘못을 따지지 않는 것’ 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용서의 상대가 일정치 않거나 나와 상관이 없을 때는 용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당사자끼리 절실한 마음을 주고 받아야 인간적인 용서는 완결되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에게 짓고,  용서는 하느님께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빚의 청산도 당사자끼리 하듯이 용서도 우선 사람끼리 해야 옳습니다. 인간이기에 잘못에도 ‘미안합니다’로 가볍게 용서가 될 일도 있지만 평생 용서 못 할 원한도 있는 법입니다. 가장 어려운 용서로는 ‘원수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일 것입니다. 원수란 한 번도 용서하기 어려운데 끝없이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공자님의 仁으로는 어림없는 일이고, 부처님의 크신 자비로라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원수가 아니더라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잘못이 분명한 상대한테는 용서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寬容관용이란 ‘널리 수용, 용납한다’라는 뜻입니다. ‘널리’는 그 대상이 특정대상이 아닌 ‘세상의 모든 것’이고, 수용 용납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관용이란 ‘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해서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용납하여 대상에 대한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것’입니다. 더 어렵게 말하면 ‘세상의 모든 현상과 나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인간에게 관용은 용서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으로서 용서와 관용은 너무 어려운 경지이고, 쉽게 동의어로 통용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특정대상이 정해져 있지만 관용은 모든 대상에 대해서 무제한이라는 점에서 다를 것 같습니다. 관용은 용서보다 범위가 넓은 대신에 용서는 관용보다 정도가 더 깊다고 할 것입니다. 관용은 모든 대상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용납하고,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이에 대해서 용서는 대상을 제한적으로 용납하고, 특정대상을 선별하는 기준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관용은 무제한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용서는 조건을 따져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옛날에는 관서(寬恕)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容恕용서, 寬容관용, 寬恕관서의 공통의미는 恕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공자의 사상을 한 글자로 말하면 仁이고, 두 글자로 말하면 충서(忠恕)라고 했습니다. 仁의 글자를 풀이하면 ‘사람(人)을 사랑하는 마음(二)’이고,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은 곧 ‘어짊’이라고 했습니다. ‘仁’을 다시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 곧 忠과 恕입니다. 忠의 글자를 풀이하면 中心, 곧 ‘흩어짐이 없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바르고(正), 곧고(直), 변치 않는 마음(恒心)'입니다. 흔히 忠을 ‘군주에 대한 충성’이라고 하지만 이는 후에 정치인들에 의해서 변질된 것이고, 애초에 공자의 의도는 그런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녀야 할 보편적 윤리였습니다. 지나치게 正直만 내세우는 忠으로서만은 仁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었기 때문에 恕라는 보완책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恕가 忠에 대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恕는 忠보다는 유연한 仁이 아닌가 합니다. 恕서를 '사람다운(如) 마음(心)'-으로 풀이하는 것도 그런 사정을 말한 것입니다. 恕는 正道를 벗어난 일탈까지 넓게 받아들이는 '어진 마음'으로, 정직의 忠과는 다른 용서의 仁입니다. 아비를 도둑으로 고발하는 자식은 사회법에 의한 忠直충직이겠지만 자식으로서 아비를 차마 고발하지 못하는 마음은 人情에 의한 사랑입니다. 같은 仁의 범주이지만 忠과 恕가 상충될 때에 공자는 忠을 버리고 恕를 택했다고 했습니다. 忠에서 있을 수 있는 경직보다는 관용의 유연한 恕가 더 仁에 가깝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내력을 가진 恕서는 寬恕관서, 또는 容恕용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가적 寬容관용이 유가적 寬恕와 같지 않은 점은 유가적 仁의 범주마저 벗어나자는 도가의 대범함과 초월적 발상입니다. 기독교적 사랑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지만 유가적 寬恕는 조건적인 仁이었습니다. 仁은 君臣군신, 父子부자, 夫婦부부의 구별이 있고, 仁義禮智인의예지의 영역이 엄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관서라는 용어를 썼던 것입니다. 젊을 때에야 分別분별에 의한 유가적인 관서가 바람직하겠지만 노년에 이르면 도가적인 관용의 대범함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분명한 기준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가려 용서하는 명철함보다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관용의 원만, 도량이 더 노년답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년의 경륜과 수양이 쌓인다면 마음이 넓어져 관용의 폭이 넓어질 것 같지만 나이가 들어 혈관이 좁아졌듯이 실제로는 도량마저 좁아진 노인이 적지 않습니다. 혈관이 좁아지면 위험하듯이 용서와 관용의 도량이 좁은 노인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나이가 들면 욕심과 다툼을 줄이고, 恕의 정신을 살려 관용과 용서의 미덕을 쌓는 데에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왕이면 시비를 가려 인내하기에 스트레스가 많은 용서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널리 용납할 수 있는 관용이 더 편안한 노년일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 생각이 옳다고 단정하지만 세상에 변치 않는 진리가 과연 몇 가지나 될까 싶습니다. 그러니 내 생각이 옳고, 자기주장이 많을수록 위험한 노인입니다. 젊을 때야 그것을 신념이라고 하겠지만 늙으면 고집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힘도 없고, 여생도 많지 않은 노년에 남을 비판하고, 미워하고, 더구나 한을 품을 까닭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한다면 그것으로 실패한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에 내세가 있다면 실패한 인생으로 다시 내세를 시작할 수야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 노년에 이르면 내세를 위해서라도 시비를 따지지 말고 모든 일을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좋을 것입니다. 비록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무기력하고, 이기주의 발상일지 모르지만  노년에 남을 위하여 스스로 괴롭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나의 능력이 닿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나의 판단이 옳고 타당한가를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늙어서는 비록 장자가 말하는 枯木死灰고목사회 - 죽은 나무가지 같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김정희 세한도(歲寒圖)의 소나무처럼 서릿발 같은 기개를 부릴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평범한 노인으로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님의 처절한 사랑이나, 설산 보리수 밑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부처님의 가혹한 자비는 감당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보다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세상만사를 담아 불룩한 배를 여유만만 쓰다듬으면서 가가대소하는 이름 없는 노승의 편안함이 더 좋아 보입니다. 너그러운 관용이야말로 병원을 드나들며 고혈압과 혈당관리를 하는 조바심보다 더 잘 사는 노년의 미덕일 것 같습니다. 주제넘은 말 같지만 이것이 고금의 성현 명의들이 말하는 양생도(養生道)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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