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의 천덕꾸러기로는 무병장수하고 싶지 않다.
노인은 본래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孤獨고독이란 원래 부모 잃은 자식이란 뜻이었지만 지금은 거꾸로 의지할 자식이 없는 노인을 일컫는 말이 되었으니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요새는 생때같이 기른 자식을 두고도 고독하게 사는 노인들이 많으니 딱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듯합니다. 그래서 말세라고 개탄하는 노인이 많지만 그런 사정과는 달리 세상에 노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듯합니다. 자식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를 쫓아다니는 손자 손녀도 노인이 좋아서가 아니라 먹을 것, 용돈을 쫓아다니는 놈이 많습니다. 용돈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냄새나고 귀찮은 노인네일 뿐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주머니에는 항상 비상금이 있어야 하고, 비자금 통장, 부동산이 있어야 자식한테 효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효도란 것도 재산에 대한 탐욕이지 부모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기 쉽습니다. 재산이 많을수록 부모의 장수를 바라는 자식이 많지 않습니다. 부모가 빨리 죽어야 유산이 내 차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 많고 자식 많은 노인은 오히려 행복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자식이 그럴진대 남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강아지 고양이도 노인을 무시하고, 싫어한다고 합니다. 가끔은 노인을 공경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알고 보면 일종의 의무감에서 나오는 겉치레 말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야박한 세태만 탓할 것이 아니라 왜 자신이 그러한 처지에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노인이 환영받지 못하는 까닭이야 허다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보고 듣는 것이 어두워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 눈과 귀가 어두운 것도 문제이지만 젊은이와 수준이 안 맞아 말이 안 통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 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키운 자식이 부모를 멀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말이 안 통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대부분 노인들에게 있는 듯합니다. 요즈음 젊은것들 개념 없고, 싹수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새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데 노인들은 여전히 구시대의 낡은 가치관에 묶여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과 대화를 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보다 배움도 짧은 노인들은 자신의 낡은 가치관을 고집하면서 많이 배운 젊은이들의 말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노인의 고독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소통을 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편의 입장과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을 흔히 易地思之역지사지라고 합니다. 젊은이가 이해되지 않거든 자신이 젊었을 때 노인들과 있었던 일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같지 않은 젊은이를 탓하기에 앞서 옛날 같지 못한 노인을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요즈음 젊은이의 가치관과는 다른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노인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고집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자신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과 소통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대화와 소통보다 내 가치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천덕꾸러기를 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젊은이를 탓하면 그들은 노인의 불통에 짜증을 냅니다. 경노사상이 투철했던 시대를 그리워하며 탄식하지 말고, 자신이 존경을 받을 만한 위치와 그럴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노년의 지혜입니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크냐를 따질 게 아니라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노인이 먼저 양보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지만 그래야 대화가 되고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고, 노인은 이제 사라질 처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의 노인은 실제로 풍부한 경험과 지식에서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강태공은 강가에서 낚시질을 일삼다가 노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太公이란 상늙은이라는 뜻으로 늙을수록 지혜가 많다고 생각했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낚시질이나 일삼았던 노인이었으니 요즈음 젊은이에 비하면 그 지식과 소견이 형편없었겠지만 당시에는 나이만으로도 젊은이들을 능가하는 권위와 지혜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만이 아니라 옛날의 노인들은 사회로부터 존중을 받았습니다. 老當益壯노당익장, 늙어서도 힘을 내어 나잇값을 했고, 老馬識道노마식도- 경험이 최고의 스승이었고, 元老원로- 노인의 지혜가 최고이고, 机杖궤장- 70이 넘으면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던 일들은 모두 노인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했던 옛날의 흔적들입니다. 경노사상을 강요했다기보다는 옛날의 노인들은 스스로 존경받을 만한 품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보와 지식의 유통구조가 옛날과 달라 이러한 말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젊은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강태공 같은 노익장은 다시 나올 수 없는 시대이고, 설령 강태공이 다시 나오더라고 낚시질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묵은 솔이 광솔’이라든가 ‘경험은 최고의 스승’이 아니라 묵은 광솔은 쓸모 없는 나뭇가지이고, 경험은 낡은 장애물이 되기 십상인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노인들이 내세우던 경험에 있어서도 젊은이들을 능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쌓으려 해도 이미 두뇌가 굳었고, 새로운 매체에 어두워 젊은이들을 당해낼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노인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착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보다 더 난처한 일은 이렇게 답답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젊은이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알량한 노인의 권위를 내세우며 그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어떻게 젊은이의 존중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정신적 우위에 있을 것이며, 더구나 의사소통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 서둘러 권위의식을 버리고 그들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명한 노인일 것입니다. 노년의 권위와 권리를 내세우고, 무병장수를 외치며 여생을 즐기는 데 골몰할수록 노인은 천덕꾸러기가 되기 쉽습니다. 노인의 위엄보다는 능동적으로 젊은이와 소통하는 노력이 훨씬 중요합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경거망동한다고 꾸중하기보다는 내가 젊었을 때보다 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신세대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어지러운 성도덕이나 가정윤리가 한탄스럽지만 그것도 덮어놓고 질타하기보다는 자신의 전근대적인 가혹한 기준을 양보하고 관용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어떨까? 애들 하는 짓이 한심스럽고, 버르장머리 없다고 나무라기보다는 시대가 바뀌었다든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거든 내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직 철이 들지 않았으니 더 기다리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나는 젊었을 때 이렇지 않았다고 장담하는 노인들이 많지만 착각이거나 기억의 왜곡이거나 자기합리화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 나도 젊었을 때는 저렇지 않았을까라는 생각하는 것이 어른다운 여유와 관용이 아닐까 합니다.
눈에 거슬리는 젊은이의 행태를 탄식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말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도, 가르친 적도 없다고 펄쩍 뛰겠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른으로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그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존중받을 만하게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서라도 자식에게는 자신할 수 있는가? 지금 나는 어른다운 노인인가? 애들 같은 노인인가?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고, 젊은이의 입장을 배려할 줄 아는 것이 어른다운 품격을 갖추는 일일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가지고 좁은 소견으로 사사건건 젊은이와 부딪친다면 자신이 어른의 품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노령화 사회에서 자신의 본분과 사회적 역할은 생각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옳고, 옛날의 경로사상과 효도만을 요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왕따의 조건이 차고 넘칩니다. 천덕꾸러기로 무병장수하느니 떳떳하게 존중받으며 죽고 싶습니다. 별난 노인네라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예로부터 성현들의 평범한 가르침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염치를 잃은 늙은이가 아닐까? 자신의 문제는 깨닫지 못하고, 상대방의 잘못만 보이는 것도 노화현상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