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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Jul 10. 2019

명예와 멍에.

노인은 명예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한다.

사물의 존재, 본질을 實실이라 하고, 그에 대한 언어적 표현을 名명이라고 한다면 名명과 實실은 본래 같아야 옳습니다. 그래서 명실상부(名實相符)라고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實실에 대하여 名명이 같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상이나 상징에 불과한 언어로는 존재적 본질을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없으므로 실제로는 일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게다가 허세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이 실명보다는 허명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 차이가 더욱 커졌습니다. 명예라는 말은 ‘이름을 기리고, 높인다’는 뜻이므로 허세를 좋아하는 인간의 속성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명예는 진실을 어지럽히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개인적 이익과 목숨보다 명예를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 정도가 되면 명예는 사실이나 본질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명예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실익도 없는 명예만을 추구한다면 이 사회는 허세와 명분, 명예에만 치우치게 될 것입니다. 거꾸로 노인들이 실리만을 챙기려 한다면 젊은이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신진대사를 막아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게 될 것입니다. 노인이 사회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실리를 버리고 명예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년은퇴야말로 당당하고 마땅한 노년이 될 것입니다나이가 들어 갈 날이 멀지 않았다면 젊은이들과 실익에 바둥거리기보다는 존경받을 만한 명예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떳떳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예가 헛된 이름이나 체면에 치우치면 명예가 아니라 명예욕이 됩니다. 명예욕은 물질욕이나 속물근성과는 그 수준이 다르지만 사실을 부풀려 내 것으로 독점하려 한다는 점에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莊子장자는 그것이 명예를 내세운 위선적 탐욕이라 하여 물질적 탐욕보다 더 나쁜 ‘명예도둑’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러나 儒家유가나 荀子순자는 그러한 僞善위선을 오히려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억제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義의, 禮예로 존중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명예욕도 여러 가지가 있는 듯합니다. 구태여 구분을 해 보자면 사람의 본분수행과 사회의 이익을 위한 희생적이고 자발적인 의지는 명예欲욕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른바 의사, 열사, 지사, 의인으로 추앙받는 이들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에 개인의 욕심이나 타산이 들어있으면 명예慾명예욕이라고 할 것입니다. 개인의 이름과 공을 세우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면 천박한 명예慾입니다. 송덕비나 훈장, 칭송을 받았지만 사회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위선적 이름을 얻는데 바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欲욕과 慾욕의 차이가 이렇게 분명하지만 우리 음으로는 같아서 우리가 구분을 잘 하지 못할 뿐입니다. 물질적 탐욕이나 체면이 개인의 천박한 이익이나 위선에 급급해 하지만 명예욕은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 사회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다릅니다그렇다면 名譽欲이나 名譽慾을 모두 명예도둑이라고 단정한 莊子의 말은 지나치다 할 것입니다


   명예는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것이지만 이기적인 명예욕과 체면은 여자의 화장 같아서 지워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명예를 노년까지도 지켜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것을 지켜내기란 적어도 여자가 화장보다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처럼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야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짙은 화장을 하기에 바빴겠지만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팽기면 짙은 화장으로도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노년에 현직에 있을 때처럼 명예를 지켜내기란 짙은 화장보다도 더 어려울 것입니다. 쪼그라진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해봤자 주책 할망구를 면치 못합니다. 그렇다고 할머니 민낯을 내놓고 다닌다고 누가 이쁘게 보아 줄 것도 같지 않습니다. 노년의 명예는 노년을 지탱하는 최소한 권위요자존심이므로 아무래도 기초화장처럼 남겨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물론 짙은 화장을 계속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드는 부담이 너무 크지요퇴직 후에도 아는 척잘난 척 나대려면 짙은 화장보다 훨씬 비싼 척 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사회적 신분에 대한 미련이 크면 나머지 노년 역시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여생이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퇴직이 좋은 것은 명예의 속박,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자유를 누릴 줄 아는 퇴직자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퇴직자가 명예의 노예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名譽慾명예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여생이 훨씬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자유야말로 참된 내 노년의 삶입니다. 얼마나 더 잘 살겠다고 마지막 남은 자유를 포기하며 살까 싶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해가며 산다는 것은 알량한 명예와 체면을 지켜내는 부자연스러움과 노고보다 훨씬 질 좋은 삶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사회적 명예가 컸던 노인일수록 방종에 흐를 자유는 제한될 것입니다. 설령 어느 정도의 일탈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하고는 그 수준이 같아서는 안 되는 것이 마지막 남은 노년의 자존심일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누렸던 명예와 체면에 대한 대가요사회의 멍에이기도 합니다명예는 분명 좋은 것이지만 멍에라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멍에는 명예를 탐하는 인간에 대한 사회적 제어장치입니다명예와 멍에는 相克상극 相補상보의 관계라서 서로 견제하지만 기울어지면 서로 채워주기도 합니다병이 있으면 약이 있어야 하고병이 클수록 약도 더 비싼 법입니다어차피 인생에서 병을 피할 수 없다면 약도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이것도 싫어서 명예와 체면을 초개같이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 자유와 일탈을 누리기 위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지탄을 받는다면 이 사회에 누를 끼치는 일입니다. 


  아무리 늙은 얼굴이라 해도 최소한의 기초화장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명예와 체면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겉치레가 아니라 최소한의 노년의 긍지요, 품격일 것입니다. 내 인생이라고 해서 내 멋대로 살 수 없는 것이 또한 인생인가 합니다. 인간이라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의 본분과 도리를 다해야 하는 멍에를 진 것입니다. 노인의 ‘마지막 명예’는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할 ‘운명적 멍에’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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