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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철 Mar 18. 2019

일본 농민의 이름으로 거부한다!
나리타공항 역사관

대지를 지키려던 농민들의 함성, '나리타공항 하늘과 대지의 역사관'

도쿄, 2018년 11월

첫번째 이야기

치바현 나리타시



현해탄을 건너는 물고기


  경험해본 외국이 일본뿐이기 때문일까. 동경과 호기심이 나로 하여금 현해탄을 건너게 한다. 서울의 아침이 막 영하로 내려선 다음 날, 일본은 가을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나리타 국제공항의 하늘은 맑고, 바람은 따스했다. 입국수속이 끝난 사람들은 학교가 파한 아이들처럼 떼를 이루어 도쿄로 떠나갔지만 나는 공항 근처에 있는 ‘나리타공항 하늘과 대지의 역사관(成田空港 空と大地の歴史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줌의 삶과 돈다발


  농민에게 땅이란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목숨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흙 한 줌은 농민의 땀과 눈물이 수십 년에 걸쳐 응결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편, 농경사회의 지배자들에게 농업은 세수―자신들의 부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때문에 그들은 농민이 자신의 땅을 소유하여 안정적으로 농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당장에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부를 축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장기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는데 바람직하지 않았다. 특히 이웃의 농민들이 농기구를 무기로 지배자들을 겨눌 가능성―농민반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농경사회에서 농민이 토지를 잃는다는 것은 사회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농업은 경제적으로 부차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때때로 국가는 보다 경제적인 산업영역을 위해,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농민들의 땅을 수용하기도 한다. 고속도로를 놓거나 군사시설을 설치하거나 공항을 건설하기 위해. 수용과정에서 정부와 농민들 사이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다행이겠지만, 정부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민주적 토의 과정을 거치기보다 법적 · 물리적 강제수용이라는 쉬운 길의 유혹에 빠지곤 한다.


  허나 당사자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은 사업이 어떻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도리어 더욱 강한 저항에 부딪쳐 사업이 주저앉기도 하는 것이다.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산리즈카 투쟁(三里塚闘争, 나리타 투쟁)이 바로 그 예였다. 그것은 가히 현대의 농민반란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나리타공항 하늘과 대지의 역사관’은 바로 이 산리즈카 투쟁을 비롯하여 공항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고뇌’의 지역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돌아가라, 제트기여!


  꽤나 큰 규모의 항공과학박물관을 지나치자, 자판기가 저 혼자 늙어가고 있는 황량한 주차장이 나왔다. 굉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여객기의 거대한 동체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꼭 영화 프리윌리의 포스터 같은 느낌으로. 주차장의 끝에는 작지만 세련된 생김새의 ‘하늘과 대지의 역사관’이 있었다.


  역사관으로 다가가자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주차장을 백발의 어르신이 뒷짐을 지고 산책하고 있었다. 요란스레 여행가방을 끌고 오는 내 모습을 보더니 출국하는 길이냐며 여유가 있으면 역사관을 한 번 둘러보라 권하였다. 한국에서 이제 막 도착했으며 일부러 찾아왔다고 하자 어르신은 적잖이 놀랐다. 항공과학박물관과 달리 애초에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그럴만한 일이었다.


  역사관에 들어서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기토(木藤)라는 성의 그 어르신은 역사관 직원이었다. 나리타 시에서 운영하는 전시관이냐는 내 질문의 의도를 곧바로 이해한 기토 상은 공항회사에서 운영하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시점에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과연 산리즈카 투쟁을 그저 과격한 정치투쟁으로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역민들의 고통과 분노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고, 이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에 초점을 둔 전시였다. 물론 산리즈카 투쟁에 관한 전시 옆에 공항 건설 이후의 지역발전상을 강조하는 전시가 나란히 놓인 것은 다소 어색했지만 말이다.


  전시관에 들어선 나를 맞이한 것은 ‘함께 지키자, 우리의 향토’라고 적힌 간판과, 공항공단 직원들을 향해 ‘돌아가! 돌아가!’를 연호하는 농민들의 외침이었다.



공항반대동맹이 마을 가운데 설치한 간판. "함께 지키자, 우리의 향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일본은 1950년대 중반부터 고도경제성장기에 접어들었는데 특히 1965년 말부터 1970년에 이르는 시기는 전례가 없던 호황기였다. 때문에 이 시기를 일본열도를 만들었다는 신 ‘이자나기노미코토(伊弉諾尊)’의 이름을 따서 ‘이자나기 경기’라고 부를 정도였다. 특히 60년대에는 여객 · 화물기로서 제트기가 보급되면서 항공수요는 더욱 증가하였고 기존 하네다 공항만으로는 이러한 항공수요의 폭증을 감당할 수 없었다. 신공항 건설이 논의되는 가운데 산리즈카 · 시바야마 지역에 신공항 건설이 결정된 것은 1966년이었다.


  원래 신공항 건설이 내정된 것은 치바현의 도미사토(富里) 지역이었으나 시위대가 치바현청에 난입하는 등,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따라서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내각은 신공항의 규모를 축소하는 대신 비교적 주민들의 저항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산리즈카 · 시바야마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왜냐하면 산리즈카 · 시바야마 안의 공항건설 예정지 중 상당부분이 궁내청 소유의 고료목장(御料牧場, 황실에서 사용되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장)과 현유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토 내각은 산리즈카 · 시바야마의 개척농민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토지를 매수한다면 쉽게 이에 응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시가의 여섯 배에서 일곱 배가 넘는 가격에 땅을 매수하는 등, 파격적인 매수 조건을 걸자 9할 이상의 농민들이 토지수용에 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토 내각의 이러한 판단은 안이한 것이었다. 가난한 개척농민들이야말로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했으며, 그들에게 대지란 목숨 이상의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당신의 밭에 콘크리트를 붓겠소


  산리즈카 · 시바야마 지역의 개척농민 대부분은 만주나 오키나와 출신으로 패전 이후에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만 부지하여 돌아온 귀환자(引揚者)들이었다. 패전 이후 정부는 고료목장의 일부를 귀환자들에게 불하하여 이들의 생계를 보장하고 수도권 지역의 식량난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들 개척농민들은 짚으로 만든 움집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땅을 일구었다. 특히 공항 건설이 결정된 60년대 중반은 이들의 주택자금 · 영농자금 변제가 막 끝나고, 농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그러한 농민들에게 공항건설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사토 내각은 어떠한 사전 고시나 주민의견 청취 없이 각의(내각회의)로 산리즈카 · 시바야마 안을 결정해버렸다. 결국 주민들은 다음날 신문기사를 통해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명백히 지역주민들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지역주민들은 “산리즈카 · 시바야마 연합 공항반대동맹”을 결성하고 공항건설 반대운동에 착수했다. 또한 청년행동대, 부인행동대, 노인행동대, 소년행동대 등을 조직하여 온가족이 투쟁에 참여하였다. 초기의 반대운동은 시위, 탄원, 1평 운동, 1목 운동 등 합법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1평 운동은 토지를 한 평씩 거래하여 공항공단 측의 토지매수절차를 복잡하게 만드는 운동이었다. 1목 운동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나무를 한 그루씩 거래하여 공항공단 측의 토지매수를 방해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후에 좁은 면적의 땅을 다수가 공유하는 1평 공유지 운동으로 발전했다.



사진 좌 : 토지 1평에 대한 소유권 이전 등기 신청서. 사진의 문서는 공항반대운동을 지지하는 사회당 관계자에게 소유권을 이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 우 : 입목매매계약서. 이렇게 거래된 나무는 수천 그루에 달했으며 나무마다 소유자의 명찰을 달아 공항공단의 토지 취득을 방해했다.




반대동맹이 초기에 배포했던 선전물. 반대동맹이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집행에 대항하여 '일본 헌법에 근거하여 바르게' 싸워왔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결


  토지 매수가 지연되자 사토 내각은 앞서 언급하였듯 고액에 토지를 매수하여 반대동맹을 와해시키려고 하였다. 한편 1967년 10월 10일에는 측량용 말뚝을 박는 작업이 실시되었는데, 공단 직원들은 처음부터 1500여 명에 달하는 기동대를 대동하여 밀고 들어왔다. 이들은 바닥에 연좌하여 공단직원들의 진입을 막는 주민들을 마구 폭행하여 끌어냈다. 처음부터 농민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강제수용 하겠다는 것이 사토내각의 의도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밀면 밀리고 꺾으면 부러지리라는 정부의 생각은 오산이었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측량 말뚝 설치 저지투쟁을 계기로 정권의 저의가 분명해지자 반대동맹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어떻게 일구어놓은 땅인데 그것을 강제로 빼앗아간단 말인가. 반대동맹의 농민들은 공항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면 무력대결도 불사할 것을 결의한다.



학생반란의 계절


월간 "아사히 소노라마" 1968년 10월호. 프랑스 파리 5월 혁명의 현장에서 불린 노래들을 수록하고 있다. 표지 그림은 68혁명 당시의 포스터 : “성인 관객들에게 (가리기 위한) 흰색 상자는 필요 없다 : 프랑스 국립관혁악단의 독립과 자치를” (PAS DE RECTANGLE BLANC POUR UN PUBLIC ADULTE: INDEPENDANCE et AUTONOMIE de l'O.R.T.F.”) 월간 아사히 소노라마는 뉴스와 함께 인터뷰나 현장의 소리를 녹음 음반으로 제공하는 잡지였다.


  한편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학생반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일본 또한 학생운동의 발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보수화된 일본공산당 및 사회당과 구분되는 급진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측량 말뚝 설치 저지투쟁에서 일본공산당이 보여준 방관적 태도에 분노한 반대동맹 농민들은 이들 학생들―전학련(전일본 학생자치회 연합 全日本学生自治会総連合)과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급진적 학생들의 합류를 계기로 반대동맹은 더욱 강고해졌다.



1968년 2~3월 경 배포된 것으로 보이는 전학련의 선전물. "일본을 베트남 침략의 거점으로 삼지 말라."라는 표제하에 3월 8일 미군부상병을 위한 도쿄 오지 야전병원(王子野戦病院) 개설저지집회와 3월 10일 산리즈카 공항분쇄 집회의 참가를 촉구하고 있다. 일본의 신좌익 학생운동은 나리타 공항이 미 공군을 위한 거점이 될 것이라고 판단, 공항반대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피를 피로 씻는 나날들


  그러나 공항 개항을 서두르던 정부는 반대동맹에 대해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 1971년의 두 차례에 걸친 행정대집행을 비롯하여 기동대와 반대동맹은 피를 피로 씻는 싸움을 거듭하였다. 농민과 학생들은 단케츠고야(団結小屋, 단결가옥)를 거점 삼아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각목, 죽창, 낫으로 무장하고 분뇨, 농약, 화염병을 투척하며 저항하였다. 투쟁이 계속되면서 반대동맹 그리고 기동대와 공항공단직원 양측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반대동맹이 사용한 연락용 드럼통. 드럼통을 두들겨 동맹원을 소집했다. "공항분쇄"



제1차 행정대집행 당시 반대동맹원과 학생들이 사용한 침낭. 우측 상단은 ‘일본 사회주의 청년동맹 해방파’ 계열의 대중조직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이, 하단은 ‘소년행동대’가 사용했던 물건으로 보인다.



1971년 9월 16일 토호 십자로 사건(東峰十字路事件)을 다룬 아사히신문 1면 기사. 제2차 행정대집행을 지원 중이던 기동대가 반대파의 게릴라부대에 의해 포위, 각개격파 당했다. 기동대 측에서만 실명, 전신화상 등의 중상자가 80여 명이나 되었으며 토호십자로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포위 당했던 1개 소대에서만 3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산리즈카 투쟁은 대중적 지지를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농민들 내부에서도 동요가 일어났다.



고이즈미 요네(小泉よね). 그녀의 집은 공항건설 과정에서 행정대집행 처분을 받은 유일한 민가였다. 1971년 9월 20일, 집 앞에서 벼 탈곡을 하던 그녀는 기동대에 의해 앞니가 부러진 채 끌려나왔다. 그녀의 집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해체되었다. 집을 잃은 그녀는 반대동맹의 조립식 주택에서 살다가 1973년 12월 병사했다. 향년 67세. (사진출처 : http://shitou.cocolog-nifty.com/blog/2018/05/post-d51b.html)



1971년 10월 1일 자살한 청년행동대원 산노미야 후미오(三ノ宮文男)의 유서 사본. 그의 장례식 때 배포되었다. 그는 그가 나고 자란 고향땅 신사의 연못에 투신했다. 당시 22세. "공항을 이 땅에 가지고 온 자들을 증오한다." "가장 인간답게 살려는 인간이 어째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하는가."라고 그는 썼다.




산리즈카 투쟁에서 반대동맹원들과 학생들이 사용한 가지각색의 게바헤루(ゲバヘル 투쟁헬멧). 공항분쇄, 반전 등의 구호나 전학공투회의, 프롤레타리아청년동맹 등 조직명을 적어 자신을 표현하였다.



키노네 청년행동대 단결가옥 앞에서 찍은 소년행동대의 단체사진. 농번기에 농사일을 돕던 풍습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년행동대가 결성되었다. 키노네 단결가옥은 아직도 공항부지 한가운데 사유지로 남아있다. 현재 키노네 단결가옥은 키노네 펜션(木の根ペンション)으로 운영중이며, 각종 문화행사들을 주최하고 있다.


"약동하는 젊은 힘!" 1971년, 잡지 소년점프에서 소년행동대의 모습을 화보로 담았다.



노인행동대장 스가사와 카즈토시(菅沢一利)를 소개한 잡지 기사와 그의 유품들. 그는 천황과 함께 모택동을 존경하는 아니러니한(전혀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인물이었다. 그가 모택동을 존경하게 된 것은 신좌익 학생들의 영향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나누어준 모택동 배지와 소위 '붉은 보서'라 불리는 모택동 어록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궁내청 소유의 고료목장을 공항공단에 넘기지 말 것을 덴노에게 청하는 노인행동대의 상주문. 68년 4월 18일 작성. 노인들이 메이지 덴노 대부터 역대의 덴노를 얼마나 숭배해왔는지 강조하면서 자비를 청하고 있다.



'나리타공항문제 원탁회의'― 민중의 피를 대가로 얻은 교훈


  결국 농민들의 저항을 힘으로 분쇄하고 속전속결로 공항 건설을 추진하려던 일본정부의 기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반대동맹에서 많은 농민들이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고, 공항공단 · 경찰관계자 및 시설에 대한 신좌익 조직의 방화, 폭탄 테러 등의 파괴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항공단 측은 산리즈카 · 시바야마 안이 결정된 66년으로부터 12년이나 지난 1978년이 되어서야 겨우 한 개의 활주로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개항을 코앞에 둔 3월 26일 제4인터내셔널을 비롯한 신좌익 조직의 관제탑 점거 · 파괴로 나리타 국제공항은 5월이 되어서야 겨우 개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리타공항이 일단 개항하자 지역사회는 경제적으로 나리타공항에 의존하게 되었다. 언제까지고 공항 건설 반대투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90년대에 들어서자 반대동맹의 일부 분파를 중심으로 정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으며, 일본정부는 지역주민과의 사전 합의 형성 노력을 소홀히 한 사죄를 하였다. 이후 정부와 공항, 지역주민들은 나리타공항문제원탁회의를 구성하여 해결책을 모색하였고, 이러한 대화의 노력과 성과들은 일본 공공정책 운영의 모델이 되었다. 일본사회가 막대한 피를 지불하고 얻은 교훈인 셈이다.


  관람을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앞서 나를 안내했던 기토 상은 버스 노선을 물어보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정류장까지 배웅해주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기토 상은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공항 동쪽 공유지에 있는 산리즈카 물산에서 만드는 랏쿄가 엄청 맛있다는 이야기.(지금도 공항 동쪽은 공유지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산리즈카 물산 또한 반대파가 공항건설 저지를 위해 만든 회사다.) 욘사마와 장금이 이야기. 문화교류처럼 한일 간의 정치적 관계도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


  기토 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국가 간에는 어떨지 몰라도 양국 민중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에 대해 생각하였지만, 너무 오랜만의 리스닝과 스피킹으로 일본어가 엉망진창이 되어서 말을 아꼈다.


  기토 상은 나리타공항행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역사관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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