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죽으러 가는 길(?)'도 아닌데, 남친은 결혼 전 하고 싶은 걸 다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사우디에 가기 전 남친은 몇 천만원짜리 고가의 오토바이를 샀다.(BMW GS 뭐라고 하더라.) 그는 돈과 젊음을 영혼까지 끌어 모았다. 오토바이 보험 관련 우편이 행여 본가로 가서 부모님께 들키지 않도록 내가 살던 집으로 전입신고를 해 두었다. 사우디에 가 있는 동안 혼자 사는 내 등본에 '동거인'으로 남친이름이 쓰여 있게 된 것이다.
현장 파견을 가면 4개월에 한번씩 휴가를 나온다. 이십대초반도 아니고 서른이 가까워가는데 팔자에도 없는 고무신을 신게 되다니. 휴가를 나오면 오랜만에 만나기도 하고 오랫동안 같이 있지도 못하기에 보통의 데이트를 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연예인 커플 마냥 휴가 때마다 파리, 런던, 빈, 헝가리 등 해외 데이트를 즐겼다. 한강유람선을 타보진 않았지만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보며 세느강을 건너는 유람선을 타면서 말이다.
살라말리쿰
사우디 움 우알이라는 지역에서 살면서 남친은 아랍어를 배워 왔다. 'ㅎ'발음과 'ㅋ'발음을 섞은 킇 같은 발음이 많이 들어간다. 뜻은 모르겠으나 지명이나 이름에는 '알' 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특징이다. 건설회사 직원 신분이어도 초청비자 없이는 사우디 출입은 불가하니 갈 수 없는 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로웠다. 까만 밤하늘에 수많은 별빛이 쏟아지듯 반짝거리는 모습은 아마 사우디 움우알 만한 곳이 없을 거라고 했다. 전쟁과 테러가 오가는 위험국이지만 밤하늘 별빛은 우리나라 어느 시골마을보다 밝게 빛났단다.
움우알 사무실은 간이로 지어진 현장 사무실이어서 모래바람이 불면 노트북에 모래가 쌓였다는 무용담을 들려주곤 했다. 인터넷이라는 '통신망'이 있었기에 다른 시간과 공간속에 살면서도 실시간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얼굴 안 보면 마음이 멀어지는 것은 롱디커플이 겪어야 할 숙제. 6시간이라는 시차를 이겨내고 영상통화를 했다. 사우디에서 남친이 퇴근 후 영상 통화를 걸면 한국은 밤 12시가 넘었다. 주로 그때 영상통화를 했는데 나는 늘 피곤하고 남친은 늘 상쾌했다.
현장 발령이 끝나기 전 마지막 휴가를 받아 남친이 한국에 왔다. 상견례를 하고 결혼식장을 계약한 후 다시 남친은 사우디로 떠났다. 나는 신부 혼자 하는 결혼 준비를 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어
현장 파견 2년이 흐르고 준공이 다 되어갈 때쯤 파견을 마치고 남친이 돌아왔다. 그가 결혼준비를 위해 등본을 출력하려는데 출력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안 나오더란다. 몇 시간 후, 사우디의 아침이 밝았다. 사우디 현장에서 남친과 함께 일했던 동료의 아내(거기도 사내부부)에게서 캡쳐 사진 한장이 카톡으로 날아왔다.
이유인즉슨 남친이 출력한 등본이 사우디에 있는 현장 사무실에서 출력이 되었던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가 보니 아이피 주소가 연결되어 한국에서 출력해도 사우디 움 우알 현장 복합기에서 나온단다.
그야 말로 '다 된 비밀 결혼에 동거인 등본 뿌리기'였다. 사우디 현장 사무실 복합기 위에 남친이 출력한 등본이 떡 하니 있었는데 거기에는 '동거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현장 아저씨들의 수다는 아줌마들의 그것만큼 빨랐다. 이렇게 된 이상 예정보다 빠르게 결혼을 알려야 했다. 그리하여 사우디로 등본을 보내고 얼마 후 침착하게 청첩장을 돌렸다. 청첩장을 받은 동료들은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지만.
그놈의 ‘아이피주소’가 다 뭔지. 한국에서 출력 버튼을 눌렀을 때 사우디 복합기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통신기술이 높은 궤도에 올랐음을 몸소 깨달은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3개월 후 남친은 남편이 되었고 나는 이직을 했다. 더 이상 사내커플이니 사내부부니 알나리깔나리를 들을 일은 없게 됐지만 그날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나저나, 사우디 밤하늘의 별은 현장 사무실에서 등본이 출력되던 그날 밤도 여전히 밝게 빛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