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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Jun 28. 2021

남편은 나의 든든한 글쓰기 조력자?

라 쓰고 '강제'에 취소선 긋는다



퇴근 후 틈틈이 출간을 위한 원고를 썼고 중간중간 일부를 브런치에 올렸다. 한번은 브런치에 발행을 앞둔 원고를 읽어보라고 H(남편)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어때? 읽어봐."


본인 피셜로는 수능 언어영역 만점 출신 (사실 무근)라고 해서 종종 조언을 구하는데, 가끔 기깔나는 제목을 뽑아 주기도 하며 글쓰기 라이프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강제로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찌나 귀찮아해 하는지.

아무튼,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글의 감수(?)를 부탁하니 왼손으로는 본인 발가락을 조물딱 거리고 오른손으로는 스마트폰을 쥐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힘차게 내렸다. (그가 좋아하는 웹툰 '기기괴괴'를 보는 속도로.) 그러면 내가 꼭 그런다.


"꼼꼼히 읽지 않구선!"




올해 초, 3개월간 '기록'을 주제로 쓴 원고 뭉치를 출판사에 투고했다. 출판사의 회신 메일을 기다리던 중, 한 출판사에서 긍정적인 검토를 해 보겠다며 한번 만나자는 회신이 왔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김칫국을 원샷 드링킹 하는 나에게 들려오근엄한 훈장님의 말씀이 있었으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방구소리 크다고 똥 시원하게 싸는 거 아니지. (근엄)



'푸핫.'

처음에는 키득 댔는데 자려고 누워서 그 말을 곱씹어보니 꽤나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뜻을 내포한 그의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하면서도 이성적인 조언이었다.


결국 긍정적인 검토를 하겠다는 출판사는 최종적으로 불발을 통보했다. 그리하여 원고는 아직 세상에 선보이지 못하고 '원고_210401.doc.'라는 파일로 남았다는 전설.




세종 대왕은 보위에 오르자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책상을 서재방에서 안방으로 옮기며 H는 그 공간의 이름을 '집현전'이라 명하였다. 방 하나를 내어주는 척하며 안방으로 이동했고, 이로서 안방 침대 옆에 책상을 공간은 '집현전'이 되었다.


H는 작은 방에 기타도 놓고 아령 같은 헬스기구도 가져다 놓으며 자기만의 공간으로 차지하려는 큰 그림을 그렸을 테다.


서재방을 내어주면서 에어컨을 사수했다. 안방에는 벽걸이 에어컨이 달려 있어서 여름에도 쾌적한데 작은방은 찜질방이라 여름에는 비수기 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시간에 글도 쓰고 책도 읽는 집현전에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해본다.


순이 아내의

명함을 더하기 위한

쟁 같은 삶의 피난처



남편이 차지한 서재는 그의 옷가지와 잡동사니로 가득한 소굴이 되었고 나는 좀처럼 발을 들이지 않는다. 방을 만들어주었건만 본인도 서재방에 잘 들어가지 않는 건 왜 때문인지... 남편이 서재방에서(최소 30분 이상) 읽는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이 글을 남편에게 검토.. 가 아니라, 이 매거진은 남편에게 비밀인 걸로 하고 글을 닫는다.



내일은 위즈덤 님이 바톤을 이어받습니다. 작가 4인이 쓰는 <남편이라는 세계>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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