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 여름의 도전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서 쓰는 글

by 아코더

출처 : 롯데케미칼 블로그


증류탑이 환류비에 따라 단수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고민하다 보면 공장이 눈앞에 촥 펼쳐진듯 선명하게 보이기는... 개뿔. 공학의 문장은 도저히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찬 공기로 뇌를 잔뜩 식힌 채 '나는 인공지능 로봇이다.'라고 머릿속으로 되뇌며 외우려고 들어야 그 아리송한 공학의 세계를 반쯤 알듯 하다.



그보다는 머리를 말랑하게 해 주는 에세이의 한 문장을 읽고 싶다. 어디선가 휘리릭 내 곁에 날아온 참새가 도망가지 않고 아이콘택트를 하는 순간처럼, 마음을 움찔거리게 하는 글을 읽고 싶다.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읽던 책을 억지로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 당분간 너희들과의 이별을 선언하며 읽다만 책들을 도서반납함에 털어 넣는다. 그러고는 '아, 잠깐만 신간 도서 뭐 들어왔나 보고만 갈까.' 하고 서가에 들렀다. 서가 사이에서 책 냄새를 맡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커피를 공부하고 싶어졌다. 커피의 역사와 인문학은 물론이요, 커피를 맛있게 내리고 플레이팅 하는 것 까지 섭렵하고, 숨은 동네 카페를 다니며 후기를 글로 쓰고 싶다. 이럴 때가 아닌데. 꼭 시험때가 되면 관심없던 곳에 관심이 피어난다. 커피 관련 책들이 잔뜩 꽂힌 서가 앞에서 든 아쉬운 마음과 다음번에 꼭 커피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싶어 사진을 찍었다.



분석화학 / 분리 공정 / 화학반응공학 / 공업수학 / 알기 쉬운 고분자 / 고분자공학개론 / 단위조작...

집에 돌아와 내 책장도 찍었다. 알기 쉽지 않은 고분자를 공부하거나 단위를 조작하는 그 오묘한 비밀을 머리싸매며 고민한다. 그렇다. 나는 수험생이다. 엄밀히 말하면 재수생이다. 작년에 화공기술사 필기 시험을 합격하고 실기 면접에서 불합격 하면서 1년을 기다린 끝에 올해 실기 면접을 본다. 그것도 9일 후에.




환류비가 작아질 수록 단수는 아주 커지며 최소환류비라는 블라블라...

10여년 전 공부하던 전공 서적을 꺼냈다. 대학교 3학년 때 공부하던 단위조작이라는 책이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다시는 그 책을 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소환한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일터에서 수행하는 실무 사이의 드넓은 간극을 바짝 좁히는 공부를 하고 있다. 이론을 실무에 녹여 그것이 자연스럽게 체득된 사람으로 빙의된 다음, 관련 질문을 받았을 때 이론과 실무경험을 속사포랩으로 쏟아내야 하는 시험이 바로 다음주에 보게 되는 기술사 면접시험이다.


응시료만 자그마치 87,100원이다. 삼성전자 주가 보다 비싼 시험 응시료를 작년과 올해 두번이나 냈다. 작년에는 아쉬운 점수로 떨어졌지만 올해는 꼭 되어야 한다. 삼성전자 주식이 87,100원까지 오르는 것보다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지금의 내게는 더 간절하다. (물론 시험 끝나면 삼성전자 주가야, 8만전자, 9만전자 향해 가즈아~!)



100살 전에 죽어야 사망보험금 4천만원을 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을 들었으므로 가능하면 99세 말까지 살면 좋겠다. 그러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은 66년쯤. 앞으로 내게 남은 66년 인생에서 한번쯤은 무언가에 불태워 이룬 다음 남은 인생 66년 동안 뿌듯해 하며 살고 싶다. "할머니가 서른셋에 화공기술사를 땄단다." 라고 손주들에게 말할 날을 꿈꾼다.



한정된 시간속에서 하고픈 것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고통의 나날을 자처했다. 다음주면 이 징그러운 과정이 끝날텐데, 그 날이 오기도 전에 냅다 마중 나가서 '~하면 리스트' 를 만들었다. '~하면 리스트'라 하믄, '수능' 끝나면, '취업'하면, '결혼식' 끝나면 등, 인생의 허들을 뛰어넘고 나서 하겠노라고 만든 리스트다. 그 리스트에 순간순간 뜬금포로 생겨난 관심을 욱여 넣는다. '일단 거기 들어가 있으렴. 시험 끝나고 관심 가져줄게.' 하며 말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미래가 되지 않는다.
- 피터 틸, 제로 원 -


그 어느때보다 시계 눈치를 보며 살아간다. 9시 30분이다. 글을 닫고 공부해야겠다.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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