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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Nov 04. 2021

누수를 마주하는 자세


우리  현관에서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우에 작은방이 하나씩 있다. 왼쪽에 있는 작은방1은 반려인의 취미활동방이라 건조기에 세탁물을 넣을 때만(?) 들어가고, 작은방2는 시스템장을 설치해서 옷 갈아입을 때만 들어간다.   


누렇게 된 작은방1

집에 몇 년 살다 보니 작은방1의 도배가 누렇게 변색되었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방안에서는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건조기, 디지털피아노 그리고 책장 속 책들의 외침이었다.


"이게 방이냐! 벽지를 봐라!"

"우리도 깨끗하게 새 단장해달라! 투쟁! 투쟁!"


그 외침을 들으면서도, 미안하지만 작은방1의 문을 무심히 닫는다.



주말 오후, 작은방2에 들어가보니 평일 동안의 피로가 쌓인 옷 무더기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옷 가지들이 너부러져 엔트로피가 증가한 드레스룸에서 나는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옷가지들을 정리했고, 그 시간은 집 정리를 넘어서 주말마다 치르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하루정도 더 입어도 될만한 옷은 착착 개켜 넣고 퀴퀴한 옷은 그대로 세탁통에 골인! 옷더미를 정리하고 고개를 든 순간, 아니 저것은? 천장과 벽의 도배지가 물을 먹은듯 색이 진해져 보였다. 손바닥으로 벽을 탁탁 만져보니 축축 젖어 있었다. 물은 아래에서 위로 솟을 수 없으니 물길은 분명 윗집으로부터 시작했을 터. 그때 한창 <손 더 게스트>라는 귀신 나오는 드라마를 빠져 보던 중이어서 물 묻은 벽면이 더없이 기괴해 보였다.


깜빡이 없이 불쑥 끼어든 차에 놀라듯, 마냥 무방비 상태로 들이닥친 불행 앞에 놀랐고 무서운 생각이 엄습했다. 하지만 정신 차려서 물길을 찾고 원상복구를 해야 했다. 일단 윗집부터 찾아갔다. 윗집에는 노부부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덧. 노부부가 얼마나 노부부냐면, 반려인이 저 분들은 내일 돌아가셔도 호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윗집 화장실이 누수의 근원지라 예상했지만 물길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윗집은 불편을 감수하고 오래된 장판까지 다 뜯어 누수 원인 찾기에 협조해 주었다. 그렇게 누수의 근원지를 찾던 중 윗집의 옆집이 의심되었다. 윗집의 옆집으로부터 꼴꼴꼴 넘어오는 물줄기가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누수로 지저분해진 작은방2



그 사이, 윗집에서 수상한 공사를 했고 그 이후로는 물이 넘어오지 않았다. 추측으로는 실리콘이나 어떤 무언가로 물이 넘어가는 것을 차단한 것 같았다. 설상가상 윗집의 옆집이 이사를 가면서 집주인이 바뀌게 되었고,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집에서 윗집에 소송을 걸고 윗집은 윗집의 옆집에 소송을 걸어야 하는 복잡다단한 상황이었다.


이웃 대하기 담당은 반려인이 도맡았으므로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윗집은 윗집대로 불편을 겪었고 오랜 시간 우리 집의 누수피해로 인해 심적 스트레스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윗집 아들의 명함만을 건네받은 채 상황을 종료하기로 합의 했다. (만약 내가 전면에 나섰더라면 따지고 들었을 테지만) 이웃간에 네 탓 내 탓 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각자의 집은 각자가 처리하자는 합의였다. 덕은 쌓았지만 지저분한 벽과 천장을 보며 한동안 작은방2도 외면해야 했다.


작은방2 도배 완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더이상 누수가 발생하지 않음을 확인했고 끝내 우리 돈으로 도배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더 이상 그냥 보고 살수는 없으니 정면돌파다. 쌩돈 50만원을 공사비용으로 들여야 했지만 썩어 있던 벽을 고치고 하얗게 도배를 하니, 앓던 이를 치료하듯 개운했다.


작은방1도 도배 완료



문득, 형의 옷은 사주고 동생의 옷은 사주지 않았을 때, 부모가 느끼게 되는 감정이 들었다. 작은방2도 하얗게 단장을 했으니 도배 한 김에 작은방1도 단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작은방1의 공간을 채우던 건조기, 디지털피아노 그리고 책(책장은 그대로 두었다.)들을 빼고 도배 준비를 했다.


 '그동안 너희들의 외침을 외면해서 미안해.'


화이트 도배를 하고 작은방1과 작은방2를 바라보니 처음 만난 연인의 마음처럼 설레었다. 계절은 겨울이 다가오지만 작은방들은 봄을 맞은 듯 화사하다. 도배를 하며 비워두었던 짐을 채웠다. 작은방1과 작은방2가 단장한 만큼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물건들을 더 소중히 여기며 잘 지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또 한 번 삶의 터널 하나를 건넜다.



* 언젠가 이 얘기를 글로 쓰고 싶었는데 기회을 제공해 주신 아바매글 글밥 코치님 감사합니다. (핫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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