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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Nov 23. 2021

가스비도 따뜻해지겠지

방이 따뜻한 만큼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1998년에 지어졌는데, 그때 보일러를 설치한 이후로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보일러실까지 들어가 누런 보일러를 봤다. 보일러가 오래되었다며 250만원이나 후려쳤지만 우리가 집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보일러를 교체하지 않았다. 별다른 불편함이 없어서였다.


어느 날 보일러실에서 부품 사이로 물이 똑똑 새는 걸 발견했다. 보일러가 돌아갈 때면 뚝뚝뚝뚝 새었으니 가만 두었다가는 베란다에 홍수가 날 판이었다.


보일러 점검 기사 아저씨를 불렀고, 점검 기사 아저씨는 손전등을 켜고 보일러실을 들여다봤다. 이 보일러는 부품까지 단종되었고, 부품에 지금처럼 물이 닿으면 위험하니 꼭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단 5분 만에 점검을 끝낸 아저씨는 출장비 18000원을 받았다. 배가 아파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어제 뭐 먹었어요?" 묻고 배를 대충 꾹꾹 누르며 스트레스성 장염이라고 말한다. 단 5분 만에 진료실을 나와 초진 진찰비까지 얹어서 병원비를 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암이 의심된다고 해서 진단을 건너뛰고 수술부터 감행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을까. 진단비 명목의 출장비를 내면서도 이럴 거면 바로 교체해주지 그랬냐고  내심 생각했지만, 카드결제가 된다며 카드리더기를 꺼내 보인 아저씨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며칠 뒤, 진짜 수리 기사님이 등판했다. 보일러 연식만큼 연배가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수리 기사 아저씨는 이 집 지어질 때 이 보일러를 자기가 설치했다고 했다.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연통 공사까지 완료했다. 아저씨는 그 전 아저씨처럼 카드리더기를 꺼내 보이셨고 59만원을 일시불로 긁었다.


60만 8천원 어치의 보일러를 들였더니 바닥이 확실히 뜨끈뜨끈해서 수면양말을 신지 않아도 된다. 보일러실에 물도 더 이상 새지 않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난방 버튼을 눌렀다. 보일러실에  샐 걱정이 없으니 보일러 틀 때도 주저함이 없어졌다. 후끈후끈한 바닥에서 가스비 고지서 받을 생각을 하니 잠시 마음이 두근두근하다. 방바닥이 따뜻해진 만큼 가스비도 따뜻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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