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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Oct 22. 2020

나의 글은 스티커 메모에서 시작된다

딴짓 하기 제일 좋은 곳, 회사

Prologue

글이 잘 써지는 곳은 사무실,

글이 잘 써지는 때는 업무 중  

출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불현듯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글의 집합이기에 글을 모으려면 여러 가지 문장이 필요했고, 그 문장을 담을 공간이 바로 '스티커 메모 '였다. 술술 읽히는 글,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한 글을 어디에서든 최대한의 시간을 할애하여 최소의 에너지로 쓸 방법이 필요했다.  이직한 직장에서는 주 업무인 엔지니어링 일을 해야 했는데 사무실에서도 틈틈이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스티커 메모'였다.


스티커 메모는 다음의 규칙을 정해 색깔을 나누어 활용했다.

wk - 노랑 (업무를 의미)

bg - 초록 (로그를 의미)

id - 보라 (아이디어를 의미)

br - 진회 (브런치 글을 의미)


대개 회사에서 쓰는 스티커 메모의 대부분은 진회색이었는데 진회색 스티커 메모 들을 모아 하나의 브런치 글을 완성했다.





왕따 경력직의 장점 : 오롯이 혼자 있는 환경

주변에 직원들은 많이 있지만 사내 메신저로 대화할 친구 하나 없는 경력직 이직러인 직장인 이기에 철저히 고립된 환경이 주어졌다. 남들이 동기들과 채팅을 할 때 나는 스티커 메모에 글을 남겼다. 다들 쉬러 나가는 오후 3시부터 친구가 없는 나는 스티커 메모를 친구 삼아 떠오르는 문장들을 써내려 갔다. 가로 5센티, 세로 5센티로 설정해 둔 이 작은 메모장에 글을 담기에는 호흡 조절이 안되어 짧아지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한토막 한토막 만들기에는 정말 좋다. 여전히 친구 없는 나는 스티커 메모라는 최고의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은밀하면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하찮고 일상적인 경험)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을 만들어 일 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알랭 드 보통

나에게 힘이 되는 캐치 프레이즈인 이 문장을 바탕화면에 항상 띄워놓고 떠오르는 키워드와 문장들 나의 느낌 들을 마구 스티커 메모에 쏟아냈다. 문장들을 쏟아놓으며 '과연 이 이야기는 언제 끝나서 언제 엮어져 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이 급한 까,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 탓일까? 

글을 쓰기 위해 소요되는 절대적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브런치에서 글의 분량 별 읽는 시간을 글 옆에 '4분' 이런 식으로 제공한다. 이것을 보고 문득 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궁금했다. 자기 전 침대 맡에 있는 책을 꺼내 들어 한 페이지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새어 보았다. 한 줄에 32 글자씩 20줄이면 한 페이지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책 한권 쓰기,  쪼개어 보면 별거 아니네! 나만 열심히 쓰면 나도 작가가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커 메모에 모아둔 아주 작은 단어와 문장의 조합들이 모여 언젠가는 '월급쟁이 엔지니어'인 나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그렇게 작가가 되고 싶은 직장인의 마음은 커져만 가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I want to be a writer."

매일 15분간 화상영어를 하면서 처음 보는 외국인들에게 매일 영어로 이야기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을 자꾸 하다 보면 현실이 될 것만 같고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대뜸 "I want to be a writer."라고 했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내 어설픈 영어를 들어주는 것이 영어 튜터들의 Role 이기에 긍정적인 눈빛과 언어로 나에게 힘을 주었다. 이 말을 처음 했던 날 그 호주 외국인 아저씨는 본인도 작가라 소개하기도 했고, 그 아저씨를 포함하여 열의 아홉의 외국인들은 '그럼 책을 영어로 쓰니?'라고 질문을 했다. 물론 한글로 쓸 테지만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심장이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글이 번역되어 세계로 뻗어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상상하면 머리가 터질 듯이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해리포터를 쓴 작가 조앤 롤링 K 언니가 된듯한 느낌이랄까.






책 쓸 수 있는 가장 젊은 날

책을 쓰는데 용기를 주었던 것은 아무튼 OO 시리즈와 직업으로서의 작곡가라는 에세이집이었다. 이 책들을 읽으며 나도 책을 쓰고 싶어 졌다.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그 어떤 책이든, 책을 쓰고 싶었다. 브런치 북의 제목은 지금도 많이 사랑받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베스트셀러 제목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영감을 얻어 '예술가를 꿈꾸는 엔지니어'라고 지어 보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없고 더구나 창의성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 직군에 있다 보니 가장 힘들었던 제목 짓기였다. 단순하면서도 어디서 본듯한, 그런 제목들만 머릿속에 떠올랐기에 엔지니어인 내가 정할 수 있는 최선제목이었다. 이 매거진 안에 엔지니어로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먹고 마신 것, 보고 들은 것, 일하며 경험한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글감이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두뇌 풀가동이 시작되었다. 아참, 결정적으로는 이주윤 님의 책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감명 깊게 읽고는 '아, 나도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국역 4번 출구를 나와 차가운 아침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불현듯 이런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김OO 지음'이라고 쓰인 책을 내 손에 쥐는 상상.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벅차서 비타민 B를 먹은 듯 눈의 피로가 사라지고 눈이 맑아졌다. 그러나 현실 속 '예술가를 꿈꾸는 엔지니어'는 오늘도 스티커 메모에 눈치 보며 글을 쓴다. 직장생활 이제 10년 차를 바라보며 늘어난 스킬이라곤 빠른 눈치와 키보드 타자실력인데, 이 둘을 적극 활용하여 계속해서 스티커 메모에 글의 조각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교수님의 집무실처럼 내 이름의 집무 공간이 있고 거기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스티커 메모인 지금이지만 언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꿈꿔본다.


이 선언의 글이 훗날 다시 읽히는 성지 글이 되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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