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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Sep 21. 2022

모든 사물에는 면이 있다


면. 후루룩 쩝쩝 면 말고 선과 선으로 이루어진 면이다. 펜 드로잉을 배울 때 선생은 나에게 선이 아닌 면을 그리라고 했다. 모든 사물에는 면이 존재하니 자전거 페달을 그릴 때도  선이 아닌 면으로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밑그림을 그릴 때 선생은 그 점을 자주 지적해 주었다. 맞는 말이었는데도 무심코 선으로 그렸는데 특히나 고치기 어려운 이유를 알았다. 직업병이었다.


이전에 설명한 Piping & Instrument Diagrams 에는 화학공장 속을 유영하는 다양한 두께의 배관이 그려진다. 25mm만큼 가는 배관도 있고 뚱뚱한 아저씨 허리둘레보다 큰 42인치짜리 배관도 있다. 그렇지만 배관이 아무리 크다 한 들 도면에는 같은 굵기로 그린다. 국 원통형의 면으로  이루어진 배관도 가는 선으로 그리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도 습관처럼 면이 아닌 선으로 처리하기 일쑤였다.


만화를 그린다면 모르겠지만 정물화를 그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물의 면면을 자세히 관찰할수록 그 버릇은 고쳐졌는데 선생의 코멘트가 아니었다면 몰랐던 점이었을 테다. 화학공장의 설계 도면을 그리는 일과 취미로서의 그림은 달랐다.


예를 들어 컨트롤 밸브는 도면상 이처럼 귀엽게 그려지는데,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리면 아래와 같은 형태가 나타난다.



선을 열 번도 안 그어 밸브 하나를 완성했는데, 실제 밸브를 자세히 바라보면 무수한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다. 더욱이 캐드로 그린 도면을 모노크롬 모드, 즉 흑백모드로 출력하고 보면 흰 바탕에 검정색 선이 전부다.

 

하지만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색연필로 채색을 하고 보니 늘 무심코 그렸던 컨트롤 밸브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림의 힘이란 이런 건가 싶을 만큼 2차원 설계 도면만 보고 그리던 엔지니어의 손으로 이렇게 현장에 설치되는 밸브를 직접 그려보니 세세한 내부가 조금 선명하게 다가온다.


브런치에 글을 써보고자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취미다. 어쩌면 무력감을 느꼈던 업무에도 좀 더 열의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내일 출근하면 또 어떤 그림을 그려볼까 하고 도면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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