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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Aug 03. 2023

그림이라는 취미로 사우디 발주처와 소통하기

살람 말리쿰!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초등학생이 책가방에 준비물을 챙기듯 출근 가방에 준비물을 챙긴다. 준비물이라 하면, 스케치북, 피그먼트 라이너, 수채물감, 붓, 후데 만년필, 지우개 인데, 매번 똑같은 준비물인데도 늘 꼭 하나씩 빼먹기 일쑤다. 준비물 낭낭히  가방을 메고 퇴근 후 마트 문화센터에 가서 사람들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 화요일 퇴근 루틴이다. 모인 사람들의 대다수가 직장인인데 최소 부장님 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도 있고, 맑은 눈을 가진 열정 가득한 여자 대리도 있다. 나는 꼰대도 아니요 MZ도 아닌 '낀대'인데, 그 사이에 어울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남녀도 계급장도 없이 모두 그저 '예술가' 이다.


선생님이 오늘 그려야 할 그림 프린트를 나눠주면 연필 스케치를 시작으로 그림을 완성해가는데에 몰입한다. 물통에 물을 담아 붓에 묻은 물감을 씻는 건 어린 시절 다 뗀 일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물통에 붓을 담궈 휘휘저으니 기분이 말랑말랑해진다. 어렸을 때는 색깔이 섞여 회색 물이 된 물처럼 '노잼' 인 미술시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미화된다고 하지 않던가. 개목걸이 마냥 걸고 있던 사원증을 벗어 던지고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가면을 바꿔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1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1시간 동안 그린 서로의 그림을 보고 아낌없이 칭찬을 주고 받다 보니 우리는 춤추는 고래가 되며 조금씩 성장한다.


사우디아라비아 프로젝트를 하던 중에 만난 발주처 중 나즈라니 라는 사람이 있었다. 직급은 우리나라로 치면 부장급 이었고, 작은 외삼촌 또래인 나즈라니씨는 블랙핑크를 좋아하는 어린 딸 두명과 늦둥이 아들이 있었다. 나와 Whatsapp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 어플) 으로 업무 관련 내용을 주고 받곤 했다. 프로젝트 설계 진행 30%, 60%, 90% 마다 3D 모델 리뷰 라는 미팅을 했는데 기간이 보통 한 달 정도여서 서울사무소에서 직접 만나 미팅을 갖기도 했다. 90% 모델 리뷰 미팅이 끝나고 우리는 여의도의 한 Bar 에서 만났다.


마니또에게 선물을 주듯이 선물 교환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자식 집에 들르며 손수 만든 고추장, 김치, 반찬 등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만 양손 가득 챙겨 온 할머니 처럼, 나도 나즈라니씨도 서로에게 줄 좋은 선물만을 고심하여 챙겨왔다. 나즈라니씨는 나에게 사우디 에서는 집집마다 있다는 대추야자 나무 열매인 타무르, 문구덕후인 내가 좋아하는 키링과 펜을 선물해주었는데, 굿즈들에는 사우디의 특징인 낙타와 배가 그려져있었다.


이에 화답하여 한국스러운 선물들이 한 가득 담긴 쇼핑백을 건네었는데, 내가 준 선물은 K-코스메틱이 유명한 만큼 나즈라니씨 아내에게 선물할 미스트, 아이들을 위한 한국산 초코칩 과자였다. 그리고 대망의 사우디 액자 그림을 꺼내 들었다.  


나즈라니 : 슈크란! (대단히 감사해요!  شكراً جزيلاً)

나 : 아프완 (천만에요! عفوا)


A4 사이즈 캔버스에 그린 그림을 보고 나즈라니 씨는 신나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함께 만난 팔레스타인 출신 인사팀 여자분도 놀라워 했다. 내심 쑥스러웠지만 그림에 대해 찬찬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구글에서 사우디 아라비아 라고 검색해서 찾은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중간에 히잡(중동나라 사람들이 입는 외투) 을 둘러 쓴 사람과 낙타는 내가 애드립으로 그린 거라고 했다. 남성 전통 의상은 구트라라 부르고 여성 전통 의상은 차도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 한복에도 옷마다 저고리, 조끼, 마고자, 두루마기, 치마 등 세부명칭이 있듯이 사우디에도 의복에 더 디테일한 명칭이 있다며 나즈라니씨가 내게 설명해 주었다. 더 나아가서 프랑스어에 남성명사, 여성명사가 있듯이 아랍어도 남성명사, 여성명사가 있다고 했다. 그림 하나를 보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우리나라에 대해 줄줄이 사탕같은 대화를 이어나갔는데, 정말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인생의 경험이었다.



몇 주간 걸쳐 완성한 사우디아라비아 그림을 선물하는 일은 참 보람찼다. 퇴근 후 직장인에서 예술가로 변신하면서 조금씩 계발했던 미술활동으로 그림도 완성하고, 견문도 넓히며 새로운 인생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100점짜리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우디 아라비아를 많이 찾아보다 보니 가 보진 않았지만 꼭 제2의 고향처럼 느껴졌다. 나즈라니씨와는 아직 까지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사우디에 언제오냐고 자꾸만 묻는 나즈라니 부장님은 자기 집 잘 보이는 곳에 그림액자를 걸어놨다며 사우디에 오면 화로에 구운 양고기를 대접해 주겠다고 한다. 다시 만나는 날에는 작은 외교대사관이 된 마냥 경복궁을 그려서 선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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