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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Aug 08. 2023

엄마의 첫 유럽여행

사진 보다 진한 감동이 되기를 바라는 딸의 그림 선물


 엄마는 평생 딱 한번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그 한번의 여행이 딸로서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여행을 가겠다마음가짐으로 시작해서 긴 비행 시간 동안의 피로, 시차로 인한 어지럼증, 낯선 음식에 대한 시도, 자주 오지 않는 곳인 만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그 외에도 수많은 허들이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 바로 '유럽여행' 이니까. 환갑을 앞둔 엄마가 친한 여사님들과 같이 유럽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나는 쌍수를 들고 반겼다. 짐꾼 역할을 한 이승기 처럼 내가 같이 갔으면 좋았겠지만 마음맞는 벗들과 진한 우정을 나누며 '꽃보다 누나'의 주인공들이 될테니.


20대 후반부터 30대 초까지는 매년 인생의 숙제처럼 해외여행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열심히 다녔다. 그러고 보니 정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에게는 같이 가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의 친구 여사님들 중 왕고참인 '한 여사님' 을 필두로 총 네명의 60-70대 여성들이 떠났으니 그 무리의 이름을 '한 여사와 벗님들' 이라 지어보겠다. 여행 중 날씨도 좋았고, 음식도 입맛에 맞았고 가이드는 어찌나 말재담꾼인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며, 가이드가 했다는 '여사님들에게 통할만한 개그' 이야기를 엄마는 내게 풀어주곤 했다.  



이탈리아 기차에서 스마트폰을 도둑맞은 이력이 있는 나는 엄마에게 자꾸만 사진을 바로 바로 보내라고 했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와이파이가 안되는 곳이라고 호텔에 가면 보내겠다고 했고 띄엄 띄엄 사진을 보내왔다. 엄마는 왜 유심카드를 사지 않았을까. 아마도 '한 여사와 벗님들'의 여행 과정 속에 유심칩은 필수 아이템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때로는 불편 했겠지만 그래도 웹상에 연결되지 않고 친구들과의 여행에 흠뻑빠졌다는 이야기니 '오히려 좋은'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엄마가 보내온 사진 중 하나를 골라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찍은 사진도 좋지만 그 사진을 그림으로 간직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일테다. 또 그것은 명품 지갑이나 다이슨 에어랩 처럼 돈을 들여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딸이 직접 그려준 그림은 '한 여사와 벗님들'사이에서 대단한 이야기거리이자 자랑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 보면서 엄마가 눈에 담았던 곳을 그림으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나는 사진을 엄지와 검지로 키웠다 줄였다를 반복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단지와는 다르게 붉은색지붕과 연노란색 분홍색 등의 벽으로 이루어진 단독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체스키 크롬로프 였다.




엄마는 그 날 연한 핑크색 패딩을 입고 스카프를 둘렀다. 약간은 쌀쌀한 날씨이지만 당신이 가진 가장 멋스러운 아이템으로 멋을 낸 엄마였다. 사진 속 엄마는 내 눈에는 김자옥보다 예뻤다. (우리 엄마가 늘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송혜교보다 예뻐어-)



집집마다 색깔이 다르고 주택단지 건너편 울창한 숲속 나무들에도 같은 여러 초록빛이 있었기에 색색의 마카를 펼쳐 놓고 색을 입히는데도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완성한 그림을 다이소에서 구매한 A5사이즈 아크릴 액자에 끼우니 제법 그럴싸했다.



나는 엄마보다 더 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여행 그림을 그려준 딸은 없다. 그래서 문득 엄마와 같이 여행을 가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늘 건강한 모습으로 세계를 여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실물보다 조금 더 통통하게 그렸다.


9988 234,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일만 아프고 3일째 날에 죽자! 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우리 엄마는 이제야 환갑이니 엄마의 청춘은 지금 부터다.  지금부터 나는 엄마의 전속 화가가 되어 엄마의 여행 그림을 많이 그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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