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단계 중 선행업무를 하는 부서에 있다 보니 프로젝트 초반에는기본적인 설계 데이터를 후행설계부서에 전달하는 업무를 하게 된다. 또 프로젝트 중반에는 설계 데이터 상 문제를 바로잡는 솔루션 제공자의 역할을 한다. 일에 대한 주인의식과 자부심까지 급여에 포함된 건 아니지만 화학공장 전반에 대한 숫자들을 다루는 업무 특성 상 그러한 것들을 강요받다보니 스트레스는 기본 옵션으로 따라온다. 스트레스 관리는 나 자신 말고 대신 해 줄 사람이 없다. 회사 고민을 머리에 이고 퇴근해 봤자 흰 머리가 생기거나 대머리가 되거나 둘 중 하나 일테니 저녁에는 완전한 오프모드를 만들자는 게 내 주관이다.
오랜만에 대학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목요일에 시간 되면 만나자는 물음에 목요일은 중창단 모임이 있어서 안된다고 이야기를 했다. 목요일 말고 다른 날 만나자고 하려했는데 달력을 보니 다른 요일에도 저녁일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나마 한가한 날이 월요일이었다. 월,화,수,목,금 중 월요일을 빼고는 모두 저녁 스케쥴이 들어차 있었다. 일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야근을 결단코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와 아이가 없는 지금이 내 삼십대마지막(?) 황금기라는 생각 때문에 무리하면서 평일 저녁를 채웠다. 화요일은 그림 수업, 수요일은 교회 성가대, 목요일은 중창단 모임, 금요일은 글쓰기 수업. 선배와는월요일에 약속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평일 저녁을 이렇게 빡빡히 채워두어서 주말로 향하는일력을 힘차게 넘길 수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요일에 나는 퇴근을 하고 문화센터에 가서 펜이나 붓을 들고 스케치북에 그날의 주제를 완성해 간다. 그러다 보면 놀랍게도 1시간 20분이 뚝딱 지나 있고 수요일로 향하는 밤 시간이 찾아 온다. 수요일 저녁은 교회 성가대 연습을 하고 예배를 드리면 저녁 3시간이 꽉 채워진다. 교회에서 받은 충만감 때문인지 집에 오면 꿀잠모드로 쉽게 전환하고 바로 목요일 아침을 맞는다.
목요일 저녁에는 중창단 연습이 있는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음악을 만드는 시간이다 보니 가장 생기가 넘치고 에너지를 얻는다. 교회음악과를 전공한 분들과 함께 하는 중창단 모임에서 나는 사실 서당개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아마추어 이기에 단원분들의 입모양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어깨너머로 소리내는 법을 배우고 화음을 맞춰간다. 전문 성악가들의 음악을 듣는 것도 함께 부르는 것도 힐링이 되기에 평일 저녁 중에는 목요일 그 시간에 가장 내면이 채워진다.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금요일로 넘어가게 되는 그 무드를 너무나 사랑한다. 우와, 벌써 금요일이구나~!
금요일 저녁은 도서관에서 하는 글쓰기 수업이 있다. 화,수,목요일 저녁에 음악, 미술활동을 통해 느꼈던 생각을 정리하고 그 때 얻은영감을 끄집어내글을 쓰며 일주일을 마무리한다. 각기 다른 위치에서 일주일을 살아 온 사람들과 합평을 하며 나와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나누다 보면 왠지 퀴퀴한 냄새가 나던 집안을 환기할 때 느끼는 상쾌함 비슷한 걸 느낄 수 있다.
위에 글 에서는 화, 수, 목, 금은 알차고 짜임새 있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 혼자 산다' 처럼 현실을 담노라면 그 날의 에너지를 소진하여소파로 몸을 던지고 옷가지를 널부러 뜨리며 한숨 돌리는 장면이 펼쳐진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 방과후 시간을 학원 스케쥴로 가득 채우고 집에 돌아온 아이처럼 말이다.
저녁을 가득 채우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 기술직 종사자로서 오전 오후 업무를 하며 살아간다. 나 키울 돈을 벌어야 하니 본캐모드 켜야지 어쩌겠는가. 하루하루 쳇바퀴 굴려가며 하루 살이 같은 인생 같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러쿵 저러쿵 살아가다 보면 내 인생에 많은 이야기 보따리가 채워져 업그레이드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마치 꼬부기가 어니부기를 거쳐 거북왕으로 진화 하듯이 지혜로운 할머니가 되어 있기를 그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