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은 무엇일까? 에너지의 변화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의 고찰을 중심으로
(들어가며)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가벼운 마음이 필요했다. 책 제목만 본다면, 피상적 관계 혹은 생각의 얕음을 말하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들었다. 읽어보니 저자가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그 다양한 관심사들을 가벼움이라는 키워드로 묶었다. 어쨌든 가벼움으로 가는 흐름만큼은 가볍지 않다는 의도된 모순적 결론을 낳는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벼움, 하늘을 날겠다는 생각, 소비에 대한 생각,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욕구에서 시작해서, 과학기술과 의료기술의 발전과 사회 문화에서 가벼움을 다룬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가벼움에 대한 썰을 밤새 가면서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투머치 토커스러운 책.
(리뷰 방향)
'에너지 덕후'를 자청하는 나는 책을 10% 정도 읽었을 때, "에너지 역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가는 흐름이 있는데, 철학자인 저자가 이를 포착해서 (과연) 글을 썼을까?"는 의문이 들었다. '에너지', '전기', '발전기', '원자력', '석유' 등등으로 검색해보았고 '있음'에 안도했다. 리뷰는 당연히 '에너지' 중심으로 어떻게 가벼움으로의 변화를 해석할 수 있는가를 적어보려 한다. 의도치 못한 '연결'에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기후변화, 재생에너지, 화석연료, 원자력을 '가벼움'이라는 우산 아래 그 변화로써 에너지 전환을 이야기한다. 나중에 그 부분은 따로 묶어서 정리해볼 생각.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의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프랑스인으로 원전산업이 절대적인 환경(전력생산 비중 70~80%)에서 꽤 과감한 생각을 제안하는데, 그럼에도 현실론적으로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의 장점은 여러 주장을 나열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나 특정 이념이나 관점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점은 좀 장황해서 동어 반복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질 리포베츠키. 위키에 따르면, 그는 본래 마르크스주의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오직 바보만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현대성, 세계화, 소비주의, 현대 문화, 시장, 페미니즘, 패션, 미디어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글을 썼고, 그 안에는 개인주의라는 사조가 담겨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그는 "가벼움은 하나의 유행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자 사실이며, (그가 평생에 걸쳐 집중한) 개인주의와도 연결된다"라고 말한다.
디오르, 루이뷔통과 에르메스 등 럭셔리 브랜드가 다수 있는 '패션'의 국가 프랑스의 철학자답게(?) 가벼움이라는 화두를 빈번하게 패션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필요의 세계와 하찮은 세계는 서로 뒤섞이고, 서로 교차하고, 서로 교배한다.
저자는 책의 여러 곳에서 '하이퍼 hyper'라는 접두어를 활용하여, 특정 단어를 더 강조한다(흡사, 드래곤볼에서 사이언인, 초사이언인, 초초사이언인 등 계속 올라가는 기준에 따라 표현하는 언어의 한계성을 느꼈다). 가령, 개인주의의 다음 단계는 '하이퍼개인주의'라 부르는데 이를 '쿨함'과 빗대어 설명한다.
"하이퍼 개인주의적인 쿨한 질서는 가족주의적 중압감의 소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떤 측면에서 이 책은 진중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가볍다. 그래서 복잡한 책이라 볼 수 있다.
어디서든 말하는 이야기가 있다. 무언가 변화 혹은 진보는 우연과 필요, 누적과 순간(계기)으로 이뤄진다. 사회, 문화, 기술, 정치, 경제 등 우리를 표현하는 많은 추상은 종종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식이든 서로 개연성을 가진다. 물론, 인과관계를 따지면 '닭과 달걀'처럼 주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특정 단어를 중심으로 이를 아우르는 이야기는 꽤 의미가 있다. 개별 영역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포괄적으로 묶은 이야기의 세부내용에 '맞다' 혹은 '틀리다'를 따지곤 한다. 그러나 깊게 보는 사람은 크게 보는 의미에서의 관련성을 잘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가벼움'이라는 단어로 여러 이질적 대상들을 옅은 선이라도 연결한 이 책은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은 제목처럼 '가벼움'을 고찰의 대상으로 둔다.
'가벼움'에 대한 고찰은 어떨까? 문화적 가벼움, 기술적 가벼움, 가치의 가벼움. 큰 흐름으로 정리가 된다. 나 스스로 아주 약간의 깊이가 있는 에너지 역시 그렇다. 기술적 한계로 스스로 해결했던 시절을 거쳐, 커다란 파이프 라인과 송배전 설비로 연결된 거대 산업을 이루었다. 근데, 이제 또 다른 기술의 발전으로 다시 중앙에서 지역으로, 집중에서 분산으로 바뀌고 있다. 에너지 역시 가벼움이 미래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에너지'의 가벼움 중심으로 다시 정리해볼까 한다.
이 책은 가벼움을 정말 360도로 관찰한다. 기술, 경제, 기능, 심리, 미학, 실존적 가치를 탐색한다. 어떤 부분은 가볍게, 또 일부는 꽤 진지하게 탐색한다. 가벼움을 무겁게 탐색하는 모순적 모습을 일부 나타내기도 한다.
가벼움은 문체론적 이상이거나 도덕적 악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하나의 포괄적 역학이 되었고, 수많은 영역을 관통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었으며, 기술적 · 경제적 · 기능적 · 심리적 · 미학적 · 실존적 가치를 가진 하나의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이 되었다. 앞으로는 무거운 것에 맞선 가벼운 것의 싸움을 표현하는 영역이 급증할 것이다. 하이퍼 모던 시대는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다차원적인 가벼움의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저자는 '가벼움'을 수많은 영역을 관통할 수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여긴다.
가벼운 것의 질서는 생활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태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포괄적인 경제적 · 문화적 기능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생활의 전체 측면은 과도한 소비자본주의와 더불어 끊임없는 변화와 유동성, 그리고 유혹으로 이루어지는 가벼운 논리로 재구성되고 있다. 유행의 시스템과 유사한 기능이 유혹의 자본주의로서의 하이퍼 모던한 자본주의를 조직한다. 기발한 제품과 재미난 광고, 텔레비전 게임과 비디오, 버라이어티 음악, 공연. 경제적인 것과 하찮은 것의 대립이 무뎌졌고, 우리의 현실원칙은 이제 가벼움의 원칙과 뒤섞였다.
가벼움의 질서는 개인에 머물지 않는다. 이제 보다 포괄적인 영역에서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가벼움을 추구하기보다는 세상이 가벼워졌기 때문에 우리 역시 보다 더 가벼워지게 되었다.
집단생활과 개인생활의 변화는 가벼운 것이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또 다른 방식으로 증명한다. “물처럼 유동적이고”(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가변적인 유형의 두 번째 현대성이 첫 번째 현대성(엄격하고, 도덕적이며, 관례적인)과 단절하면서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이퍼 모던 시대에 개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불안정성이다. 이들은 끊임없는 변화와 일시적인 것에 지배당하고,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짓누르는 듯 갑갑한 집단적 강제가 사라지고, 셀프서비스가 일반화되는 한편 고용과 계약이 불안정해졌다. 바로 이것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계속 이동하는 개인주의가 확실히 자리 잡게 만든 하이퍼 모더니티의 사회적 동력이다.
이 책은 하이퍼모너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굳이, "그게 뭐야?"라고 찾아볼 필요는 없다. '현대'의 진보 정도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여기서 우리는 '불안'이라는 단어를 뽑아낼 수 있다. '불안'의 이유는 가벼움이다.
가벼운 것의 질서는 생활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태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포괄적인 경제적 · 문화적 기능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생활의 전체 측면은 과도한 소비자본주의와 더불어 끊임없는 변화와 유동성, 그리고 유혹으로 이루어지는 가벼운 논리로 재구성되고 있다. 유행의 시스템과 유사한 기능이 유혹의 자본주의로서의 하이퍼 모던한 자본주의를 조직한다.
우리의 삶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는 소비 역시 가벼운 논리로 설명된다.
가벼움은 더 이상 달콤한 시적 몽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가벼움은 기술화된 우리의 일상을, 소형화된, 유목민처럼 이동하는 우리의 세계를 참조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우리의 기술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소형화되고 가벼워지고 비물질화된다. 우리는 공기처럼 가벼운 장치를 이용하여 전 세계의 모든 음악을 듣는다.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태블릿을 이용해 영화를 본다. 마이크로 전자기술, 초소형 로봇, 현미 수술, 나노 기술 등 무한히 작은 것이 혁신과 발전의 새로운 경계로 자리 잡았다. 이제 가벼움은 스타일보다는 새로운 소재와 디지털 네트워크, 극단적 소형화에서 읽힌다. 우리는 상상의 가벼움에서 세계로서의 가벼움으로 옮겨온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혁명 운동'이 아니라 '나노 파워'의 확실성과 무한히 작은 입자들의 제어, 비물질의 지배다. 거대한 정치적 혁명의 시대가 확실히 오고 있으며, 이 혁명은 그것이 지각되지 않는 것과 손댈 수 없는 것에 대해 이루어지지 때문에 더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기술 세계 역시 가벼워진다. 스마트폰, 태블릿이라는 이제는 익숙해진 다목적 장치와 나노 기술 등을 통해 극단적 세밀한 세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이제 그의 '가벼움'에 대한 고찰 중 내가 조금은 잘 알고 있는 에너지에 대한 부분을 정리, 해석해보고자 한다. 이 책을 리뷰하면서 꽤 신뢰가 갔던 이유는 에너지 영역에서의 가벼움에 대한 생각이 훌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화석 자원의 고갈과 지구온난화로 말미암은 산화탄소 생흔의 적하라는 시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석유와 원자력에 의지하지 않고 풍력 에너지와 태양 에너지, 지열 에너지, 해양 에너지 등 재생 에너지에 의지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이, 에너지 혁명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1차 연료를 덜 사용하고 더 이상 자연자원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지 않음으로써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가벼운 에너지’의 도입과 연성 에너지의 비약적인 발전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에너지의 변화가 의미하는 작업을 ‘헤라클레스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었다. 미래 세대의 장래를 보장하고 지속 가능한 가벼운 것의 문명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이 일을 해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기후변화'로 화석연료에서 나와야 한다. 원자력 발전은 '기후변화'에는 적합하나 '경제성'과 '사회적 수용성'에 문제가 많다. 또, 전체 에너지 시스템의 증폭하는 '가변성'에 대처하는 '유연성'이 부족하다. 이를 고려해서 그는 재생 가능한 '연성' 에너지원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며, 어마어마한 힘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헤라클레스적'이라고 부른다. 무거운 화석연료에서 벗어나기에 이를 '가볍다'라고 표현한다.
항공기나 자동차에 적용된 이러한 다이어트 요법의 기저에는 에너지를 덜 소비하고 탄소 배출을 제한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경량화 경쟁은 재충전을 하지 않고 주행할 수 있는 거리를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늘리기 위해 무게가 최대한 가벼워져야 하는 전기자동차가 발달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의 30%가량을 차지하는 이동(Mobility) 영역의 주요한 과제는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는 항공, 자동차, 철도, 선박의 '경량화'를 요구한다.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하고 연비는 개선되어야 한다.
이 역학이 모든 영역에서 똑같이 발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선 분명히 해두자. 전 세계의 에너지 소비에서는 화석 에너지(석유, 가스, 석탄)가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핵에너지는 전기 공급에서 여전히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대규모 인프라와 엄청난 규모, 거대한 시설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 정반대다. 심지어는 은행도 너무 커져서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어졌다. 그렇기는 해도 가벼움의 원칙은 에너지와 항공학, 전기통신, 자동차, 은행, 외과학뿐 아니라 게임과 음악, 사진, 영화, 건축,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영역으로 침투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 새롭게 건설되는 발전설비 용량의 70% 이상이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이다. 그러나 재생에너지가 전체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 수준에 그친다. 그중 절반은 확장성이 제한된 수력발전이며, 폭발적 증가세를 보이는 태양광과 풍력은 5% 수준 정도이다. 우리가 1800년대 초반부터 열심히 땅 속에 묻힌 자원을 꺼내 쓰고 있는 화석연료의 비중은 80% 수준이다. 이 비중의 무게만큼 가벼움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다만, 변화의 추세와 방향은 명확하는 점은 분명하다.
만일 지금 모든 나라가 미국인들처럼 살아간다면, 지구가 네 개 필요하다. 물체들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지만, 1970년대부터 우리가 ‘환경에게 진 빚’은 계속해서 무거워지고 있다.
쓰레기만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온실효과와 기후온난화의 주범인 탄소 배출의 증가를 목격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경종을 울리는 보고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기술 자체도 온실가스 배출에 기여한다. 일간지 하나를 다운받으려면 세탁기를 한 번 돌릴 만큼의 전기가 필요하다. <타임>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사람들은 바이트를 순환시키기 위해 전 세계의 모든 항공기를 이동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50퍼센트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바이트의 비물질성 뒤편에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석탄의 무거운 무게가 있다. 2013년에 발표된 카본4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이 난방을 하면서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2008년부터 1인당 14퍼센트 감소했지만 전자제품을 생산하면서 생긴 폐기물은 무려 40퍼센트나 증가했다.
인류의 눈부신 발전, 특히 산업혁명 이후 찬란한 성취는 지구 환경에게 빚을 쌓아가며 이뤄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누적이 지나치게 무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지구가 필요한 것은 인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가 지구가 필요할 뿐이다.
미래학자들은 후기 석탄시대의 도래와 석유를 비롯한 화석에너지에 기초를 둔 산업 시설의 소멸에 대해 언급한다. 인터넷과 재생에너지의 결합으로 특징지어지는 미래의 문명에서, 중앙으로 집중된 1 · 2차 산업혁명 활동은 현장에서 에너지를 모아 저장했다가 남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줄 수 있는 다수의 소형 에너지 발전소(사무실, 주택, 건물)로 대체된다. 21세기에는 무거운 시설물과 거대한 규모의 발전소, 메이저 석유 · 가스 · 원자력 회사는 줄어드는 대신 아주 작은 에너지 회사와 발전소가 여기저기 세워지면서 위계적 관리가 아닌 협동적 관리의 메커니즘이 자리 잡게 된다.
대형 컴퓨터가 소형 컴퓨터와 인터넷망, 모바일 컴퓨터에 자리를 양보한 것처럼, 에너지 시스템도 21세기에는 분산되어 그물 모양을 이룬 가벼운 것의 기술을 향해 변화해 나갈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 따라 가벼운 것의 혁명은 크게 약진해 에너지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전기는 벽면에 위치한 콘센트에 플러그를 꼽기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뒷면의 변화는 잘 감지하고 있지 못한다. 왜, 에너지 산업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저자는 VPP(가상발전소, Virtual Power Plant)의 개념과 분산 에너지원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라고 있다. IT 기술의 발전과 분산화된 가벼워진 에너지 시스템은 서로 연계되어 협동적 관리 메커니즘으로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럼 미래에는? 산업생산제일주의와 핵, 화석연료, 집약 농업과 어업에 대한 비판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유기농과 전기자동차, 자연에너지, 세제 〔세금제도〕의 녹화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가고 있다. BEPOS, 즉 에너지 사용에서 흑자를 내는 주택의 개념은 잘 정립되고 있으며, 주택의 에너지 소비를 제어하는 것이 목적인 홈오토메이션 설비들이 증가하고 있다. 태양에너지와 풍력에너지 설비는 2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고 있다. 2008년에 의결된 유럽연합 기후에너지정책은 유럽 국가들이 온실가스 배출을 2020년 이전에 적어도 20퍼센트 줄이고, 에너지 총생산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을 20퍼센트로까지 끌어올리며, 에너지 소비를 적어도 20퍼센트 줄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유럽재생에너지회의EREC는 지금부터 2030년까지 유럽연합의 에너지 소비 가운데 약 45퍼센트가 재생에너지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유럽풍력에너지협회EWEA에 따르면, 풍력에너지 하나만으로도 유럽의 전기 수요를 약 30퍼센트까지 충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유럽의 기후변화 대응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그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그럼에도 느리다는 환경론자의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영역은 주택, 교통(이동), 에너지원(발전)을 포괄한다.
그렇지만 너무 나가지는 말자. 앞으로도 대규모 발전소는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이다. 지금도 청정에너지는 수력발전 설비를 갖춘 공장과 댐 등 거대한 시설에서 생산된다. 중국은 거대한 건설 현장과 원자력발전소, 엄청난 규모의 수력발전 댐에 대한 열광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높이가 185미터, 폭이 2305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싼샤댐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댐이다. 이 댐을 건설하느라 150만 명의 주민이 이주하고, 여러 개의 도시가 사라졌다. 전 세계에서 72개의 핵발전소가 건설되고 있으며, 581개의 원자로 프로젝트가 2030년까지 예정되어 있다. 롤랑 베르제르 연구소에 따르면, 건설되어야 할 원자로의 숫자는 123~224개가 적정 수준이지만 실제로는 435~489개가 건설될 것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일본은 후쿠시마의 대재앙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정책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말했듯, 변화는 긴 시간을 요구한다. 그래서 에너지 영역의 변화를 일순간의 '혁명'이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함께 서서히 변화하는 '전환'이라 말한다. 대형 발전소로 대표되는 석탄, 원자력 발전은 꽤 오랜 기간 존속하게 될 전망이다. 물론, 기후 변화 위험이 기후 붕괴 혹은 재앙 수준으로 심각해지면 극적인 변화가 올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소형화와 디지털화 경쟁이 매우 무거운 설비와 완전히 물질적인 도구들의 과다 사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구적 소비 방식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비물질화된 정보처리 기술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금속과 에너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신경제에 필요한 에너지와 재료를 얻기 위해 매우 무거운 산업 활동도 이루어진다. 깊은 천공, 대규모 채광, 수압으로 암석 부수기, 핵분열. 엄청난 양의 흙과 물을 이동시키고,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화학반응을 일으켜야만 하는 광석과 화석연료 추출. 심지어는 경제의 비물질화 시대에도 대규모 수단을 동원하는 광산 산업과 지하자원 없이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땅속에 파묻힌 재료가 ‘클라우드’의 비물질적인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가벼운 것이 대규모 광석 채굴과 거대한 광산 개발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 자원의 개발이라는 물질적 현실 없이는 경제의 비물질화도 이루어질 수 없고, 환경에 대한 ‘공격적’ 개입 없이는 비물질적인 것의 경제도 존재할 수 없다.
에너지원이 '가벼움'으로 향하는 길목 역시 '무거움'의 그늘에서 완벽히 벗어나긴 어렵다. 신경제 혹은 탈탄소경제에서도 에너지와 재료는 필요하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구 자원을 착취하는 일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는 없다. 산업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적 궤도를 걷더라도 말이다.
가벼운 것에 대한 열망은 비인간화의 형태로 간주되는 시설물의 거대주의에 대한 적대적 반응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장마르코 장코비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적은 양으로 사용할 수 있는 탄소 제거 에너지만 좋아한다. 적으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 그것이 많아지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환경과 맺는 관계 속에서 구상하는 의미와 방식과도 관련된다. 녹색 건축 또는 생태 건축은 이렇게 순풍에 돛 단 듯이 잘되어 나가고 있다. 이 녹색 건축의 목표는 건축물에 필요한 에너지 양을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며,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에너지 전환의 돛은 '가벼움' 향한 항해를 지속한다. 여러 숙제를 본질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하나 현재 위험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싶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단순화와 투명함이라 현대적 요구와 생태계에 압박을 가하는 행위를 완화시켜야 한다.
가벼움과 무거움 간의 긴장과 역학이 일순간 변화하지는 않겠지만 그 무게 중심은 점차 가벼움으로 옮겨가고 있음은 분명하지 않을까?
책을 소개한 기사를 보면, 내가 맘대로 정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 난 에너지 덕후라서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254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