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위한 제언
이 글은 Cambridge 대학에서 출판한 In Search of Good Energy Policy을 읽고 2025년 현 시점에 필요한 아젠다를 고민하며 작성해봤다.
1. 좋은 에너지 정책의 이론적 탐색
1.1 정책 설계의 가치와 목표
에너지 정책은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를 반영하는 복합적 산물이다. 무엇을 “좋은” 에너지 정책이라고 볼 것인지는 단순히 기술적 효율이나 경제적 산출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정책 설계 단계에서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기후변화 대응을 중시하는 정책은 탄소 감축과 환경 보호의 가치를 최우선 목표로 삼을 것이며, 에너지 가격 안정과 산업 경쟁력을 중시하는 정책은 경제성장과 소비자 비용 부담 완화를 주요 가치로 둘 것이다. 이러한 가치 선택에 따라 정책의 내용과 우선순위는 크게 달라진다.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이 편찬한 In Search of Good Energy Policy에서는 에너지 정책의 핵심 주제로 정책이 다루는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 정량적 분석의 역할과 한계, 정책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복지 평가 방식, 정책에 대한 공공 신뢰 형성과 시민 우려 대응, 국가·지방정부·민간 등 다양한 행위자들의 역할 분담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곧 에너지 정책이 다양한 가치의 균형 위에서 설계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기술 경제적 성과지표만이 아니라 형평성, 지속가능성, 안전, 지역사회 발전과 같은 사회적 가치들이 정책 목표로 통합되어야 좋은 에너지 정책이라 부를 수 있다.
가치의 통합은 특히 에너지 전환(energy transition)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화석연료 중심의 체제에서 재생에너지와 청정에너지 중심으로 이행하려면 경제성뿐 아니라 환경윤리, 세대 간 정의, 지역 수용성등의 가치가 정책에 내재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이나 대형 송전설비 건설 정책에서는 안전과 환경 위험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미래 세대에 남길 부담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가치 기반 접근은 정책 목표의 정당성을 높여준다. 과거에는 에너지 정책이 공급 안정과 저렴한 에너지공급에 초점을 맞추면서 환경 파괴나 지역 불평등을 부차적 문제로 여긴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후변화 대응, 생태계 보호, 정의로운 전환이 글로벌 가치로 부상하면서 에너지 정책 설계에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 산업계는 경제성과 신뢰할 수 있는 공급을 가치로 삼지만, 시민사회는 환경과 안전, 소비자 권익을 중시할 수 있다. 정책 입안자는 이러한 가치를 조율하여 공공선(common good)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결국 좋은 에너지 정책은 단일 지표나 단일 가치가 아닌, 사회가 공유하는 다원적 가치의 최적 조합을 이루는 것이다. 과학기술적 해법만으로 미래 에너지 정책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으며, 정치학·경제학·철학·신학·사회학·역사학 등 인문사회 여러 분야의 통찰을 결합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곧 다학제적 접근을 통해 다양한 가치와 관점을 통합하는 것이 좋은 정책의 토대임을 시사한다.
1.2 기술적 합리성의 한계와 사회적 고려
전통적으로 에너지 정책은 기술적 합리성과 계량적 분석에 크게 의존해왔다. 수요 예측, 비용 편익 분석, 위험도 평가 등 과학적·공학적 접근이 정책 결정을 뒷받침해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술 합리성(rationality)는 정책의 효율성과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책 과정에서 기술적 합리성이 전부일 수는 없으며,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닌다. 계량화된 지표로 표현할 수 없는 요소들 – 이를테면 윤리적 판단, 사회적 정서, 문화적 맥락– 이 간과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을 둘러싼 의사결정을 생각해보자. 전문가들은 원전 사고의 확률이 극히 낮다는 정량적 위험 평가를 들어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할 수 있다. 반면에 일반 대중은 “아주 낮은 확률이라도 일단 사고가 나면 파국적 피해가 발생한다”는 질적인 우려를 가진다. 실제로 기술 관료들은 종종 대중의 감정적 반응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접근이다.
이 책(In Search of Good Energy Policy)의 한 챕터에서는 원자력 기술과 관련된 의사결정이 흔히 세 가지 잘못된 전제에 기반한다고 지적한다: (1)원자력과 같은 위험 기술에 대한 결정은 순전히 기술적인 사안이다, (2)이 과정에는 윤리적 고려가 개입하지 않는다, (3)대중의 감정적 반응은 비합리적이므로 배제해도 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모두가 틀린 가정임을 논증한다. 실제로 위험 기술에 관한 결정은 고도의 가치 판단을 포함하며 대중의 감정에는 윤리적 직관과 합리성의 요소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기술 만능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정책 결정 과정에 사회적·윤리적 고려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새로운 에너지 인프라 건설 시 단순히 경제적 비용과 편익만 따질 것이 아니라, 환경 영향, 공동체 해체 위험, 문화유산 훼손 여부등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수치화하기 어렵지만 정책 수용성과 지속가능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전문가의 과도한 자신감(hubris)에 대한 경계도 중요하다. 첨단 모델과 예측 기법도 복잡한 인간 사회의 미래 행동을 완벽히 예측하지 못하며, 전문가 집단도 고유한 편향과 제한된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배경의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함께 참여하여 지식의 편향을 교정하고 학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Precautionary Principle(사전예방 원칙)의 적용도 기술적 합리성의 한계를 보완하는 방식 중 하나다. 기술적으로 안전성이 완벽히 입증되지 않은 경우, 불확실성이 있더라도 최악의 위험을 고려해 예방 조치를 취하는 접근이다. 이는 전적으로 확률과 수치에만 기반한 결정이 예기치 못한 위험을 간과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예컨대 기후 변화와 관련한 정책에서, 기후 모델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사전예방적 조치로 탄소배출을 감축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이는 과학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 것보다 사회적 관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결국 좋은 에너지 정책은 기술적 분석과 사회적 판단의 균형위에 서 있다. 기술적 근거는 필수지만, 그것이 제시하는 방향을 민주적·윤리적 숙고를 통해 점검하고 보완해야 한다.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위험과 혜택까지 포괄하는 포용적 분석틀을 갖출 때, 비로소 정책이 현실 세계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정량화가 어려운 공기질 개선의 가치나 지역 공동체 상실 비용도 고려될 때 정책은 전인적인 합리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통합적 합리성이야말로 미래 에너지 정책의 성공 요건이라 할 것이다.
1.3 공공 신뢰와 정책의 정당성
공공 신뢰(public trust)는 에너지 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이론상 최적의 정책이라 할지라도,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얻지 못하면 실행 단계에서 좌절될 수 있다. 에너지 인프라 사업에서 주민 반대(NIMBY 현상)가 사업 지연이나 무산을 초래하는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좋은 에너지 정책은 내용적 타당성뿐 아니라 정책 과정의 투명성과 참여, 결과의 공정성을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아야한다.
공공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책 결정 과정이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어야 한다. 이는 관련된 이해관계자와 일반 국민이 충분한 정보를 얻고, 의견을 제시하며, 그 의견이 검토·반영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규모 풍력 단지나 송전선로 건설과 같은 사업을 추진할 때, 단순히 사후에 결과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 협의와 공청회, 지역 참여프로그램을 통해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참여적 거버넌스는 정책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을 높여 결과에 대한 신뢰도도 높인다.
또한 정책의 투명성이 필수적이다. 에너지 정책과 사업과정에서 위험 요소나 부작용을 과소포장하거나 숨길 경우, 단기적으로는 갈등을 회피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신뢰를 잃게 된다. 오히려 문제점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공개하며 보완 대책을 함께 제시하는 편이 낫다. 예컨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선정 문제나 송전탑 경로 결정처럼 민감한 사안에서는 정부가 과학적 평가 결과뿐 아니라 윤리적 고려, 대체안 검토 과정까지 상세히 공개하고 설명해야 국민들이 정책 입안자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신뢰 형성에는 일관성 있는 정책 신호도 중요하다. 정부가 한편으로는 친환경 에너지 확대를 약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화석연료 산업을 지원하거나, 정책이 정권마다 급변한다면 대중은 정부 의지를 신뢰하기 어렵다. 결국, 다분야 연구자들의 협업을 통해, 에너지 정책의 좋은 사례들이 공공과의 신뢰 관계속에서 성장해왔음을 인지해야 한다. 정책이 사회적 합의와 신뢰를 얻으면 위기 시에도 사회적 자본으로 작용하여 견고한 추진력이 생긴다. 예컨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 독일이 탈원전을 가속할 때 국민적 합의와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에너지 전환 정책이 큰 혼란 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반면, 신뢰가 부족한 정책은 작은 사고나 문제 발생 시에도 과도한 비난과 반발에 직면하여 추진 동력을 상실한다.
에너지 분야에서 기업과 정부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도 정책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국제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에너지 분야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76%)가 기업에 대한 신뢰(67%)보다 높게 나타난 반면,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오히려 기업을 정부보다 더 신뢰하는 경향도 보고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는 정책 결정의 전문성과 함께 공정성을 입증해야 한다. 에너지 정책 수립 과정에 외부 전문가, 시민사회 대표 등이 참여하는 독립 위원회를 활용하거나, 주요 정책에 대해 사회적 협의체를 운영하는 것도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공공 신뢰는 좋은 에너지 정책의 필수 조건이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지만, 투명하고 포용적인 정책 운영, 일관성 있는 가치 지향, 성실한 소통으로 꾸준히 쌓아갈 수 있다. 공공 신뢰를 얻은 정책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사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연한 조정과 지속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정책의 탄력성과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힘이며, 좋은 에너지 정책이 갖춰야 할 중요한 자산이다.
1.4 다중 이해관계자 참여와 거버넌스
에너지 정책은 정부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지고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에너지 시스템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네트워크이며, 따라서 다중 이해관계자 거버넌스(multi-stakeholder governance)가 필수적이다. 여기서 이해관계자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공기업과 민간기업, 지역 공동체와 시민단체, 학계와 전문가 집단 등 에너지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영향을 받는 모든 행위자를 말한다. 좋은 에너지 정책은 이러한 여러 주체들의 협력과 견제, 참여를 유도하는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정부 간 협력이 중요하다. 에너지 정책은 국가적 차원에서 수립되더라도 실행은 지역 차원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재생에너지 단지나 송전선로 건설은 지역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 없이는 추진이 어렵다. 중앙정부는 거시적 안목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나, 지역의 사정과 민심을 잘 아는 지방정부의 참여와 지지가 없으면 정책은 현장에서 실현되지 못한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이 역할을 분담하고 조율하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중앙정부가 제도 설계와 재정 지원을 맡는다면, 지방정부는 사업 인·허가, 주민 협의, 지역 혜택 분배등의 역할을 맡아 현실에 맞게 정책을 구현할 수 있다.
둘째, 공공과 민간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현대 에너지 산업은 민간 기업의 기술력과 투자 없이는 발전하기 어렵다. 발전 설비 건설, 그리드 운영, 신기술 개발 등에서 민간 부문의 혁신과 효율성을 활용해야 한다. 좋은 에너지 정책은 국가의 역할과 시장의 역할을 적절히 배분함으로써 시너지를 낸다. 예컨대 정부는 탄소 가격제나 재생에너지 의무할당제(RPS) 등 규칙과 인센티브 구조를 만들어 시장 방향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투자와 기술 개발은 기업이 창의적으로 수행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규제 완화와 투명한 시장 환경 조성, 그리고 공정경쟁 보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동시에 시장 실패 가능성이 높은 공공재적 성격의 영역(기초 연구개발, 장기 인프라 투자 등)에서는 정부가 직접 개입하거나 보조금·세제혜택을 통해 보완하는 협력관계가 바람직하다.
셋째, 시민사회와 전문가의 참여도 거버넌스 구조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에너지 정책은 기술적 전문성과 함께 사회적 통찰이 필요하므로, 시민단체, 지역 커뮤니티, 학계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고 활용하는 제도적 채널이 중요하다. 이런 참여를 통해 정책은 사전에 다양한 영향 평가와 위험 분석을 거칠 수 있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특히 기후변화 정책이나 에너지 전환 같은 장기적 과제는 정권 주기나 시장 논리만으로는 충분히 다루기 어렵기에 초당적이고 초이익집단적인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좋은 에너지 정책은 이해관계자들이 상호 학습하고 협력하는 거버넌스 플랫폼을 제공함으로써 탄생한다는 점에서, 정책 설계자들은 과정으로서의 정책에 주목해야 한다.
넷째, 글로벌 거버넌스와 다자 협력역시 간과할 수 없다. 에너지 안보나 기후변화 대응은 한 나라만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기에, 국제 에너지 기구, 기후 협약, 지역 협의체 등을 통한 국제 공조도 중요한 이해관계자 축이다. 예를 들어, 국제 원유 시장의 안정을 위한 협력, 전력망 연계를 통한 전력 거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같은 무역 조치 등은 모두 국가 간 이해관계의 조율을 필요로 한다. 좋은 에너지 정책은 국내 거버넌스뿐 아니라 국제적 협력망 속에서 일관성과 신뢰성을 유지해야 한다.
다중 이해관계자 거버넌스의 구축은 때때로 의사결정의 속도를 늦추거나 복잡성을 높일 우려도 있다. 참여 주체가 늘어날수록 합의 도출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단견적으로 속도를 위해 일방향 정책을 추진하면, 실행 단계에서의 마찰과 반발로 인해 오히려 더 큰 지연과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포용적 거버넌스는 정책 결정에 시간은 들일지언정, 집행 단계의 안정성과 합의 기반을 제공하여 장기적으로 효율성을 높인다. 이 책에서도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얻은 교훈은, 단일 분야의 시각으로 좁게 본 정책 처방은 현실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마주치기 쉽다는 것이다. 다양한 행위자가 참여한 거버넌스는 이러한 시야의 협소함을 극복하고 정책의 적응력과 포용성을 높여준다.
1.5 탈탄소 에너지 전환을 위한 통합적 정책 프레임워크
21세기 에너지 정책의 가장 큰 도전은 탈탄소화(decarbonization)와 에너지 전환(energy transition)이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이 대두됨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체계를 재생에너지와 청정에너지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에너지, 환경, 산업, 기술, 금융 등 정책 영역을 통합적으로 묶는 거시적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다. 통합적 정책 프레임워크란, 목표와 수단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일관된 방향으로 설계된 정책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이는 조각조각의 개별 정책이 아닌 전체 시스템을 변혁하는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부문 간 통합이 중요하다. 에너지 전환은 전력 부문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송, 건물, 산업 등 모든 부문의 전기화와 효율화를 포함한다. 따라서 전력 공급의 탈탄소화와 함께 교통의 전기차 전환, 건물의 에너지 효율 향상과 난방의 저탄소화(예: 히트펌프 도입), 산업 공정의 전기화 및 청정 연료 대체 등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부문별 정책들이 상충하지 않고 상호 보완하도록 조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기차 보급 정책은 전력 생산의 청정화 정책과 보조를 맞춰야 실질적인 탄소 저감 효과를 낼 수 있다. 또 수송 부문 전기화에 따른 전력수요 증가에 대비해 전력망 강화와 저장 기술 개발이 연계되어야 한다. 이러한 종합적 관점 없이 각 부문 정책을 따로 추진하면, 한 부문의 성과가 다른 부문의 병목으로 인해 제약받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음으로, 정책 수단의 통합적 활용이 필요하다. 탈탄소 에너지 전환은 시장 메커니즘, 규제, 재정 지원, 인프라 투자, 연구개발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총동원해야 가능하다. 좋은 정책 프레임워크는 탄소가격제, 보조금, 기준규제, 공공 투자 등의 수단을 전략적으로 결합한다. 예컨대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서는 탄소 가격을 통해 화석연료에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동시에, 재생에너지 투자에는 보조금·세제혜택으로 유인을 제공하고, 전력시장 규칙을 개선하여 재생에너지가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제도적 기반을 바꾸는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이와 더불어 송전망, 배전망, 에너지 저장 등 물리적 인프라에 대한 공공 투자 계획도 통합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단들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설계될 때, 에너지 전환은 실행 가능하고 자체 강화적인프로세스로 들어선다.
시계열적 통합도 고려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 정책은 단기, 중기, 장기계획이 일관되게 연결되어야 한다. 흔히 2030, 2040, 2050년을 목표 연도로 설정한 단계별 감축 목표가 존재하는데, 이 목표들이 실현되려면 현재의 행동과 미래의 목표를 이어주는 경로(roadmap)가 명확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50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30년까지 어떤 발전원을 얼마나 확충하고,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언제 중단하며, 2040년대에는 어떤 신기술(예: 수소, CCUS 등)을 어느 정도 도입할 것인지 등의 이정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정표 간에도 기술적·경제적 정합성이 있어야 한다. 만약 2030년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 2050년 목표와 충돌한다면(예: 단기적으로 석탄 발전을 대폭 늘려 전기차를 충전), 장기 목표의 신뢰성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일관된 경로 설정과 그에 따른 정책 조정이 필수적이다.
통합적 프레임워크에서는 정책 간 트레이드오프 관리도 중요한 이슈다. 예컨대 에너지 안보와 환경 목표의 균형, 전력요금 안정과 투자 재원 확보, 산업 경쟁력과 기후규제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충 관계를 정책 패키지를 통해 완화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에너지 정책은 보건 정책 등 다른 분야 정책과도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타 분야의 교훈을 통합적으로 고려함으로써 더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탄소세로 에너지 가격이 상승할 경우 취약계층에 대한 보조나 산업 저탄소 전환 지원을 함께 묶는 정책 패키지가 필요하다. 이렇듯 하나의 목표만 보는 단편적 접근 대신, 다목적 최적화를 지향하는 정책 설계가 통합적 프레임워크의 지향점이다.
끝으로, 사회·문화적 통합관점에서, 에너지 전환 정책은 국민 생활양식과 산업 구조의 광범위한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도 프레임워크에 포함되어야 한다. 석탄산업 종사자나 에너지 취약계층처럼 전환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집단에 대한 지원 대책과 재교육,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이 함께 마련되어야만 에너지 전환이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하다. 다시 말해, 탈탄소라는 대의와 포용적 성장을 통합적으로 추구해야 정책이 폭넓은 지지를 얻는다.
요약하면, 좋은 에너지 정책을 위한 통합적 프레임워크란 “멀티 플레이어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같다. 지휘자인 정부가 큰 그림의 악보(장기 로드맵과 가치 지향)를 제시하고, 각 악기 파트(부문별·수단별 정책)가 조화를 이루며 연주할 때 아름다운 전환의 선율이 완성된다. 개별 정책의 성취가 모여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이루고, 그 변화가 다시 개별 분야에 피드백 효과를 주어 가속화되는 선순환 체계가 형성되는 것이 이상적인 그림이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을 통해서만 인류가 직면한 에너지 전환과 기후 위기의 과제를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2. 2025년 에너지 분야의 주요 동향과 국제적 긴장
2.1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IRA 대비
2025년 현재 미국의 에너지 정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인해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이전 바이든 행정부 시절 수립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Inflation Reduction Act)과 정반대의 기조를 보이며, 에너지 분야에서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독립’ 전략을 재강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IRA의 폐지 또는 축소를 공언했고, 실제로 취임 직후 이를 이행하기 위한 행정 조치들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한마디로 “화석연료 부흥”으로 요약된다. 그는 취임 직후 파리기후협정 재탈퇴를 선언했고, 석유·가스 시추에 대한 연방정부 규제를 완화하며 신규 시추 허가와 송유관 건설을 장려하고 있다. 특히 연방 토지에서의 원유·가스 시추 허가 절차를 신속화하고 환경규제를 완화하여 미국을 “에너지 초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조치는 2017~2020년 1기 트럼프 행정부 때의 “미국 에너지 우선(Energy Dominance)”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2기 행정부는 나아가 원유 수출 및 LNG 수출을 확대함으로써 동맹국에 대한 에너지 공급 영향력을 높이고, 국제 석유시장에서도 입지를 강화하려 한다. 동시에 석탄 발전 규제를 완화하고 이전 정부가 도입한 온실가스 배출 규제(예: 전력부문 탄소규제)를 폐지하거나 느슨하게 바꾸려는 시도를 진행 중이다.
IRA와의 극명한 대비는 청정에너지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IRA는 태양광, 풍력, 배터리, 전기차 등 청정에너지 기술에 대규모 세액공제와 보조금을 지급하여 탈탄소 산업육성과 배출 감축을 동시에 꾀한 정책이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공식 에너지 공약에서 재생에너지나 탄소중립이라는 표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태양광이나 풍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원 계획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리드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풍력 확대에 회의적인 시각을 비치기도 했다. 다만 역설적으로 연방 인허가 절차 간소화는 대형 풍력·태양광 프로젝트에도 적용될 것이기 때문에, 트럼프 정부의 규제 완화로 해상풍력 같은 사업의 심사 기간이 줄어드는 효과는 부수적으로 기대된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새 정부는 재생에너지 산업에 대한 직접적 지원보다는 화석연료 산업 지원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IRA를 완전히 뒤집는 데는 제약이 있다. 우선 IRA는 법률로 제정된 것이어서, 행정부가 마음대로 없앨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법률 개정을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데,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압도적으로 장악하지 않는 한 IRA 핵심 조항의 폐지 입법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실제로 2025년 현재 상원은 야당인 민주당이 필리버스터로 막을 수 있는 의석을 유지하고 있어, 전면 폐기법 통과는 어려운 상태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집행 단계에서의 발목잡기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예컨대 IRA가 배정한 재원 중 집행되지 않은 부분을 행정 명령으로 사용처를 재조정하거나 지출을 동결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그러나 이 역시 미국 헌법의 세출에 관한 의회 권한예산 집행 통제법(Impoundment Control Act)등에 저촉될 수 있어 법률적 쟁점이 되고 있다. 실제로 대통령이 의회의 예산 배정을 임의로 취소 또는 전용하는 것은 제한되며, 10% 이상 항목간 전용은 불가하도록 IRA 조항이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IRA의 완전 무력화보다는 부분적 조정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정치적 역풍이다. IRA로 인해 이미 많은 일자리와 산업 투자가 공화당 지역구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 창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텍사스, 오클라호마 등 풍부한 태양광·풍력 자원을 가진 주들은 IRA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로 지목되며, 해당 주의 공화당 정치인들도 지역 경제 효과로 인해 IRA 폐지에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텍사스는 IRA 이후 대규모 재생에너지·배터리 공장 투자가 이루어져 2030년까지 가구당 $78의 에너지 비용 절감 및 고용 증가가 예상된다는 연구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방 차원에서 지원을 거둬들이면 지역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어,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IRA의 청정에너지 세제혜택을 연장하거나 조정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한다. 즉,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도 IRA의 친환경 조항 중 일부는 유지 내지 수정하는 타협이 이뤄질 수 있다. 특히 IRA의 미국 내 에너지 안보 및 제조 부흥취지(예: 배터리 생산 크레딧 등)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어젠다와도 합치되는 면이 있어, 전면 폐지보다는 재활용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리하면, 2025년 미국 에너지 정책의 양상은 트럼프 대 IRA라는 큰 틀의 충돌로 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화석연료 증산과 규제 철폐를 전면에 내세워, 바이든 시절의 기후 중심 정책들을 뒤집고 있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파장을 일으켜, 미국의 파리협정 이탈과 기후 재정 공약 축소 등으로 글로벌 탄소중립 노력에 차질이 우려된다. 반면, 미국 국내에서는 이미 청정에너지 전환의 경제적 혜택을 체감하는 지역과 산업계의 반발도 존재하여 정책 시행에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수년간 미국은 연방 차원의 정책 급변과 주(州) 차원의 대응 간 긴장, 그리고 공화·민주 간 에너지 철학의 대립이 계속되면서 에너지 분야 정책의 불확실성이 높을 전망이다. 이와 같은 미국 내부의 정책 변화는 세계 에너지 시장과 기후외교에도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2.2 중국: 공격적인 전기화와 청정기술 가속
중국은 2025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규모 큰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로 부상했다. 중국 정부는 전기화(electrification)와 청정기술 육성을 국가 전략의 핵심에 두고 막대한 자원과 정책 역량을 투입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몇 년간 중국의 재생에너지 및 전기차 보급 속도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며, 2025년에 접어들면서 그 가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선, 재생에너지 설비의 폭발적 증가가 두드러진다. 중국은 이미 태양광과 풍력 발전 능력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데, 2025년 들어 그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2025년 5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중국은 불과 5개월 만에 태양광 발전 설비 용량 약 198GW와 풍력 46GW를 신규 설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수치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5개월간 폴란드나 터키의 전체 전력 수요에 맞먹는 설비를 추가한 것”에 비유되기도 했다. 이러한 추세로 중국의 누적 태양광 설비는 이미 1,000GW(1테라와트)를 돌파하여 전 세계 태양광 용량의 거의 절반을 중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2025년 봄에는 월간 태양광 설치량이 93GW에 달해 “중국이 한 달 동안 초 단위로 100장의 태양광 패널을 깔았다”는 묘사가 나왔을 정도다. 이는 중국 정부가 14차 5개년 계획 및 탄소중립 목표(2060년)를 향해 재생에너지 투자를 총력 밀어붙인 결과로 풀이된다. 특히 서북부 사막지대의 초대형 태양광단지, 연해 지역의 해상풍력단지, 광대한 송전망(HVDC)으로 연계된 프로젝트들이 집중 추진되어 이러한 기록적인 증가를 견인하고 있다.
둘째, 전기자동차(EV) 등 수송 부문의 전기화에서도 중국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2024년 중국의 신차 판매 중 전기차(배터리 전기차+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비중은 이미 30%를 넘었고, 2025년에는 신차 판매의 60% 정도가 전동화 차량이 될 것으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2025년 상반기 중국 내수 자동차 시장에서는 매달 신규 판매 차량의 절반 이상이 전기차로 집계되기도 했다. 이는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높은 수준으로,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를 급속히 대체해가는 양상이다. 판매량으로 보면 2025년 중국에서 연간 1,400만 대 이상의 전기차가 팔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수치는 불과 2년 전에 전 세계 판매량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의 배경에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 지원과 민간 기업의 경쟁이 함께 있다. 중국 정부는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과 세금감면을 수년간 제공해왔고, 2023년 보조금 종료 이후에도 전기차 구입에 대한 구매세 면제, 노후차 교체 보조 등다양한 장려책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대도시에서는 전기차에 차량 번호판 발급 우선권을 주거나 도로 통행 제한에서 제외하는 등 혜택을 부여하여 수요를 이끌었다. 여기에 더해, BYD, 테슬라 상하이 공장, 지리(Geely) 등 국내외 기업들의 대규모 생산 투자와 가격 경쟁이 맞물려 전기차 보급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청정기술 가속은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외에도 배터리, 에너지저장, 전력망, 원전, 수소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로 이뤄지고 있다. 특히 배터리 산업에서 중국은 글로벌 공급망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CATL, BYD 등 중국 기업들은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60% 이상을 공급하며 규모의 경제와 기술력을 동시에 키워가고 있다. 태양광 제조 분야에서도 폴리실리콘 원료부터 태양광 패널 완제품까지 글로벌 가치사슬의 80% 이상을 중국 기업들이 점유하고 있으며, 대규모 투자와 정부 지원으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석권했다. 그 결과 전 세계 태양광 패널 가격이 하락하고 보급이 촉진되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중국 내에서는 기업들이 출혈경쟁을 벌여 2025년 1분기 주요 태양광 제조사들이 80억 위안 이상의 손실을 기록하는 등의 과잉 설비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를 중국 언론은 “죽음의 순환(death cycle)”이라 표현하며 산업 재편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 과잉과 손실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장기적 산업 패권 확보를 위해 청정기술 투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중국제조 2025’ 전략 아래 전기차, 배터리, 신에너지 기술이 전략산업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중앙 및 지방정부의 보조금, 저리융자, 토지 제공 등으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중국의 에너지 정책에는 에너지 안보와 기후대응 두 가지 목표가 동시에 자리한다. 한편으로 중국은 세계 최대 탄소배출국으로서 국제사회에 2030년 이전 탄소배출 정점, 2060년 탄소중립 달성이라는 약속을 했다. 이를 지키기 위해 재생에너지 확충과 전기화 가속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동시에 중국은 석유와 가스를 대량 수입하는데, 지정학적 리스크 속에서 수입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국내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전략적 과제가 되었다. 전기차 보급은 석유 수요 억제에 기여하고, 재생에너지 발전은 석탄과 수입 LNG 소비 증가를 억제하여 에너지 자급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즉, 청정에너지 확대가 곧 에너지 안보 강화로 이어지는 측면이 있어, 중국 정부가 강력히 드라이브를 거는 배경이 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2025년 초에도 “신에너지 산업의 세계 최장(value chain)을 구축했다”고 자신할 만큼 이 분야 성과를 내세웠는데, 실제로 중국은 신재생 발전설비, 초고압 송전망, 전기차 및 배터리 제조, 희토류 등 핵심 소재 공급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배력을 확보해가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공격적 행보는 국제적 긴장과 협력의 교차를 불러온다. 한편으로 중국산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가 세계 청정에너지 전환 비용을 낮추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어 각국은 중국의 생산력에 의존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다른 한편,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중국 독점적 공급망에 대한 우려로 대응 조치를 취하고 있다. 미국 IRA는 중국산 배터리 부품 사용시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의 탈중국 디커플링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EU 역시 역내 클린기술 제조를 촉진하는 넷제로 산업법(NZIA)을 추진하며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 한다. 또한 중국이 거대한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위해 글로벌 원자재 시장에서 리튬, 코발트, 구리, 니켈 등의 수요를 폭증시키면서, 자원 확보를 둘러싼 경쟁과 가격 상승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2025년 중반 중국과 EU는 오히려 청정기술 협력을 강화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기후 대응을 위한 부분적 공조를 모색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기후정책 후퇴에 대응해 중국-EU가 기후 리더십을 함께 유지하자는 계산이 담겨 있다.
요약하면, 2025년 중국의 에너지 부문은 “양적 팽창과 질적 과제”라는 두 단면을 보여준다. 전례 없는 속도의 재생에너지·전기차 확산으로 탈탄소 전환의 규모를 선도하면서도, 한편으로 급속 성장에 따른 산업 과잉과 국제 마찰이라는 질적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청정에너지 가속화는 세계 에너지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세계 전력 생산에서 중국의 태양광·풍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2025년에 25%를 넘어서고, 글로벌 EV 시장의 절반 이상을 중국이 차지하는 등, 중국발(發) 에너지 전환이 글로벌 표준과 경제 흐름을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은 미국 및 서방의 정책 대비와 기술 경쟁을 촉발함으로써, 국제 에너지정책의 경쟁적 협력체제(coopetition)를 형성하고 있다.
2.3 에너지 안보와 탈탄소화의 교차: 정책 기조의 변화
2025년 에너지 정책의 글로벌 화두는 에너지 안보(Energy Security)와 탈탄소화(Decarbonization)간의 관계 재정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는 종종 에너지 안보(안정적 에너지 공급)와 환경목표(탄소 감축)가 상충 관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의 에너지 위기와 기후위기를 거치며 많은 국가들의 정책담론에서 두 가지는 모순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즉,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탈탄소화를 가속화하고, 반대로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에너지 안보 전략을 재편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이 흐름의 기폭제 중 하나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글로벌 에너지 위기였다. 특히 유럽연합(EU)은 러시아 가스 의존으로 인해 심각한 에너지 안보 위협을 겪자, 단기적으로 대체 가스 도입과 수요관리로 버티는 한편 중장기 대책으로 재생에너지 확대와 효율 향상을 주된 해법으로 선택했다. EU 집행위가 2022년 내놓은 긴급 계획인 REPowerEU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 목표를 상향(40%→45%)하고, 태양광 지붕의무화, 풍력 프로젝트 인허가 간소화, 수소산업 육성 등 대대적인 청정에너지 가속 패키지를 담았다. 이는 러시아산 화석연료를 조속히 대체함으로써 에너지 자립을 높이고 동시에 기후목표 달성을 앞당기려는 전략이었다. 그 결과 2023~2024년 유럽에서는 사상 최고 속도로 태양광과 풍력 설비가 보급되었고, 2025년 들어 EU 전력의 약 40%를 재생에너지가 생산하여 천연가스 발전 비중을 크게 낮추는성과를 냈다. 유럽의 사례는 에너지 안보와 탈탄소화가 상호보완적으로 추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가 태양광 패널과 풍차를 짓는 속도가 곧 푸틴의 에너지 영향력을 줄이는 속도”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즉 국내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는 수입 화석연료를 대체함으로써 에너지 안보 자산이 된다.
미국의 경우에도 바이든 행정부 시절 추진된 IRA와 인프라법(IIJA)등에서 에너지 안보 논리가 강조되었다. 미국은 중동 석유와 러시아 광물 등 해외 공급망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국내에서 청정에너지를 생산·제조함으로써 일자리 창출과 에너지 자립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IRA의 공식 명칭부터 “인플레이션 감축”이지만, 실제로는 Clean Energy Security Act라 불러도 될 만큼 국내 에너지 안보 투자가 골자였다. 예컨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광물 공급망을 미국 또는 동맹국으로 제한하여 중국 의존을 낮추고, 미 남부 지역에 대규모 태양광·풍력단지 건설을 지원함으로써 국내 안정적 전력 공급을 추구했다. 이러한 노력은 탈탄소화와 동시에 지정학적 리스크 감소라는 이중 목표를 가졌다. 2025년 트럼프 행정부로 바뀐 뒤에도 이 기조를 완전히 되돌리기는 어려운데, 에너지 안보 명분으로 국내 제조 및 생산을 장려하는 부분은 새 행정부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인도, 한국등도 각기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을 연계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중국은 앞서 언급했듯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보급을 통해 석유수입을 줄이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일본은 2011년 후 원전 가동 중단이후 늘어난 화석연료 수입을 줄이고 탄소중립을 위해, 재생에너지+수소+원전 재활용을 3대 축으로 한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X)전략을 추진 중이다. 이에는 소형모듈원자로(SMR)개발과 재생에너지 망 확충을 통해 국내 전력 자급률을 높이겠다는 안보적 고려가 있다. 인도는 석탄 의존도를 낮추고 전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태양광 500GW목표를 내걸었는데, 이는 대기오염 개선과 에너지 자립을 동시에 노린 것이다.
에너지 안보-탈탄소 교차의 정책적 표현은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에너지(transitions that are secure and sustainable)”라는 슬로건으로 나타난다. 2024년 세계경제포럼(WEF)은 에너지전환 지수 보고서에서 “대부분 국가에서 탈탄소화가 에너지 안보를 개선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실제로 태양광과 풍력은 연료비가 없고 자국 내 자원으로 생산 가능하다는 점에서, 글로벌 연료시장 변동에 휘둘리지 않는 에너지 주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된다. 반면 화석연료에 의존할 경우 OPEC+의 감산 결정이나 분쟁에 의한 공급차질 등 외부 변수로 에너지 안보가 취약해진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재생에너지·원전·수소 등 무탄소 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것이 곧 에너지 안보전략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다만 과도기적 단기에는 양자 간 긴장도 상존한다. 예컨대 2022년 유럽 일부 국가는 가스 부족을 겪자 석탄발전 가동을 일시 증대했는데, 이는 기후목표와 충돌하는 선택이었다. 또 2023년 국제 LNG 시장에서 친환경국가와 개발도상국이 경쟁하자,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부국-빈국 간 형평성 문제도 나타났다. 이러한 예시는 단기 에너지 안보 조치와 장기 탈탄소 목표를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한 고민을 남긴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은 이중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재고 비축, 연료 다변화, 수요관리 등으로 안보를 유지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구조적 전환을 통해 화석연료 의존 자체를 줄이는 방향이다.
국제 협력 측면에서도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이 서로 엮이고 있다. 2025년 현재 G7, G20등의 합의문을 보면 “에너지 안보와 기후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협력”을 강조하는 문구가 반복된다. 예를 들어 G7은 2025년까지 석탄발전 해외금융 중단에 합의하면서, 에너지 빈국의 재생에너지 전환 지원을 통한 에너지 안보 강화 의제를 포함시켰다. 또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나 탄소세 협력논의에서는, 기후 대응이 무역 질서와 에너지 공급망에 영향을 미치므로 투명한 국제 룰을 정해 모두의 에너지 및 경제 안보를 해치지 않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국가 간 비교를 해보면, 유럽연합은 에너지 안보와 탈탄소의 결합이 가장 선진화된 사례이다. 기후중립 법제화와 러시아 에너지 의존 탈피를 동시에 추진하며, 이를 통해 2030 재생에너지 45%, 2050 순배출 제로라는 목표를 흔들림 없이 견지하고 있다. 미국은 정치권의 양극화로 연방 정책은 지그재그를 걷고 있으나, 주정부(州)와 민간 부문에서 탈탄소와 에너지 안보의 결합이 계속된다. 예컨대 캘리포니아 등은 2035년 내연기관차 퇴출과 신재생 100% 전력 목표를 통해, 스스로 에너지 공급망을 클린화하면서 안보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국가주도로 화석연료 수입 감소와 청정에너지 증대를 일괄 추진하는 독특한 모델이며, 석탄 자급이라는 안보적 고려로 인해 오히려 석탄발전이 완만히 감소하는 한계도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탈탄소 흐름 속에서 에너지 안보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다. 석유 수요 감소 시대에 대비해 자국 경제 안보를 위해 재생에너지와 원전, 수소산업에 투자하고, 동시에 저탄소 석유이미지 제고로 시장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 이처럼 나라마다 접근법은 다르지만, 에너지 안보와 탈탄소화의 융합은 2025년 에너지 정책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결론적으로,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깨끗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 나라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고, 반대로 안정적 에너지 공급 기반 없이는 지속적인 탈탄소 추진이 어렵다. 2025년의 현실은 이 교훈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각국 정책입안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에너지 전략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향후 국제협력의 의제 설정에도 반영되어, “안보와 기후를 아우르는 글로벌 에너지 거버넌스”라는 담론으로 발전하고 있다.
3. 이재명 정부를 위한 한국 에너지 정책의 향후 권고
3.1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 가속화
신정부인 이재명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서 최우선 과제는 대한민국의 에너지 시스템을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환하는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한국은 2050 탄소중립을 선언했지만, 2020년대 중반 현재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10% 내외에 머물러 세계 평균(30%)은 물론 OECD 평균(33%)에도 크게 못 미치는 실정이다. 이 격차를 줄이고 글로벌 에너지전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향후 5~10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새로운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를 상향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이전 정부가 COP28에서 공언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3배 확대” 공약을 구체화하여,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비중을 3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를 통해 한국의 신재생 발전 용량을 100GW 수준으로 확충하면, AI 데이터센터나 반도체 클러스터 등 신산업 수요 증가분을 충분히 감당하면서도 탄소배출을 억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재생에너지 중심 전환 가속화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입지와 인허가 규제 혁신이다. 한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밀도가 높아 태양광·풍력 단지 개발 시 부지 확보와 각종 인허가 과정에서 많은 장애가 있었다. 이재명 정부는 기존의 복잡한 인허가 절차를 일원화·간소화하는 원스톱 인허가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풍력 발전의 경우 환경영향평가, 주민 동의, 군사시설 협의등에서 병목이 컸는데,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중앙정부 차원의 패스트트랙 승인제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태양광 발전은 농지, 산지 이용 규제를 합리화하여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부지를 충분히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훼손이 적은 염해간척지, 폐염전, 공장지붕, 고속도로 휴게소 부지등 유휴부지를 최대한 발굴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태양광 설치를 장려할 수 있다.
둘째, 기존 에너지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원자력과 화석연료를 기저전원으로 삼고 재생에너지는 보조적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재생에너지를 주류 전원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망 운영방식도 유연하게 바꾸어야 한다. 변동성 재생에너지의 특성을 수용할 수 있도록 스마트 그리드,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반응(DR)등의 기술과 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예컨대, 일조량과 풍량에 따라 공급이 출렁이는 태양광·풍력을 안정적으로 활용하려면 에너지 저장시설구축이 필수인데, 이에 대한 투자 지원 및 시장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수요 측면에서 전력 피크 시간에 수요를 조절하거나 잉여 재생에너지 발생 시 전기차 충전이나 수전해 수소생산에 활용하는 등 융통성 자원을 활성화해야 한다. 물론, 수소의 활용은 현재 실증단계에 있으며 R&D 관점에서의 추진에 해당된다. 다만, 기술적 성숙과 활용가능성을 장기적으로 계속 탐색해나갈 필요가 있다.
셋째, 산업 전략과 연계한 재생에너지 확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재생에너지 산업은 그 자체로 미래 핵심 산업일 뿐 아니라, 반도체, 자동차, 화학등 주력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인프라가 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공급망의 탄소배출을 따지는 RE100을 요구하고 있고, 수출시 탄소발자국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에서, 국내 제조업의 전력원 녹색화는 산업 생존과 직결된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는 산업부문과 에너지부문 정책을 연계해, 산단 자체 태양광·풍력 설치, 직접전력구매(PPA) 촉진등을 통해 기업들이 재생에너지를 쉽게 조달하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한국 기업이 해외시장에서 재생에너지 분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국내 시장을 키우고 경험을 축적시키는 전략도 중요하다. 한국이 앞서지 못하면 재생에너지 공급망을 중국, 미국, 유럽 등에 의존해야 하고 이는 산업 및 안보 리스크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므로 국내 풍력 기반 기술, 태양광 모듈, 배터리 등의 제조 기반을 확보하고, 이를 위한 내수 시장 확대와 R&D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 물론, 현실적 제약을 고려할 때 한계가 존재하겠지만 최소 수요 확보라는 정책적 과제를 지속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 인식 제고와 참여 프로그램을 통해 에너지전환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과거의 편견이나 이해 부족을 해소하고, 국민이 에너지전환의 주체로서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농민 태양광 사업, 주민참여형 협동조합 풍력발전등을 확대하여 지역 주민들이 재생에너지 확대의 이익을 함께 누리도록하면 자연스럽게 보급 속도가 올라간다. 또한 가정과 상업 부문에서 자기 소비형 태양광+배터리 시스템을 설치하도록 지원하고, 시민들의 전기 효율향상 행동(에너지 절약 캠페인, 에너지 효율등급 가전 사용 등)을 장려하여, 공급과 수요 양 측면에서 저탄소화 노력이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조치들을 종합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재생에너지 중심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이행을 Moonshot(담대한 목표)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 경제의 미래 경쟁력과 국민의 환경 복지를 위해, 더 이상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다. 빠른 성과를 내면서도 지속가능한 전환을 이루기 위해,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민간의 창의적 참여를 결합한 국가적 프로젝트로 재생에너지 확대를 가속화해야 할 것이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은 물론 글로벌 에너지 질서 변화 속에서 대한민국의 에너지 주권과 산업 주권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3.2 전기요금 체계 개편과 민간 주도 에너지 성장
한국 에너지정책의 또 다른 핵심 개혁 과제는 전기요금 체계의 근본적 개편을 통해 민간 주도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현재의 전기요금 구조는 오래된 공기업 독점 체제와 정책적 요인에 따른 왜곡으로 인해 시장신호 기능을 상실한 측면이 있다. 2022~2023년 국제 연료가격 급등 시기에 한국전력공사가 요금을 원가에 미치지 못하게 억제하면서 누적 적자가 수십조 원에 달한 바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민간 부문의 투자 유인이 떨어지고 에너지 산업의 지속가능성이 훼손된다. 이재명 정부는 전기요금 체계를 합리화함으로써 시장원리와 정책목표를 조화시키고, 아울러 민간 기업이 에너지 신산업에 적극 뛰어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전기요금 개편의 방향으로 우선 제시되는 것은 원가연계형 요금제의 확립이다. 전기 생산·공급에 필요한 연료비와 설비비용, 탄소비용 등을 투명하게 반영하여, 현실적인 요금수준을 책정해야 한다. 특히 산업용 전기요금은 그동안 교차보조 등으로 저렴하게 유지되었지만, 탄소중립 시대에는 전력다소비 산업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가격 시그널이 필요하다. 2024년 말에 한 차례 산업용 요금을 9.7% 인상한 조치가 있었지만, 여전히 원가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므로 단계적 추가 인상이 불가피하다. 물론 급격한 인상은 물가와 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으므로 예측 가능한 장기 조정계획을 발표하여 연차적으로 현실화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취약계층 보호 대책으로서 필수사용량 보장공제 등 사회적 지원을 병행하여 에너지 빈곤층의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시간대별·계절별 요금제가격구조 개편을 통해 수요관리와 재생에너지 활용을 촉진해야 한다. 현재 획일적인 요금 체계는 전력 피크 억제나 남는 전력 활용에 유연하지 못하다. 이를테면 경부하 시간대 요금 할인과 최대부하 시간대 요금 할증을 강화하여,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피크를 줄이고 저렴한 시간에 전기를 쓰도록 유도할 수 있다. 또한 잉여 재생에너지 전력에 할인요금을 적용하거나 심야전력을 활용한 전기저장 난방장치 보급 등 부하이동 프로그램을 만들면, 재생에너지 변동성 대응에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정교한 가격시그널은 시장 효율을 높이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민간 주도 에너지 성장을 위해서는 전력산업 구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발전 부문에 민간 IPP(민자발전사업자)가 일부 참여하고 있지만, 송배전과 소매 판매는 한전과 그 자회사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이 구조에서는 민간기업이 소비자에게 직접 전기를 판매하거나 혁신적인 전력서비스를 내놓는 것이 어렵다. 최근 정부가 기업들의 재생에너지 구매를 위해 한전 중개를 통한 제3자 PPA를 도입했지만, 복잡한 절차와 높은 비용으로 활성화가 미미한 상황이다.
이재명 정부는 전력산업의 부분적 경쟁 도입과 시장접근성 제고를 추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생에너지 전력의 직접거래 시장을 활성화하고, 일정 요건 하에서 민간 전력소매사업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전의 재무 부담과 투자여력 제한을 고려하면, 송배전망 투자에도 민간자본 참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력망을 공기업이 소유하더라도 민간투자로 확충하거나 민간운영을 허용하는 모델이 있는데, 한국도 과감한 개선을 고민할 시점이다.
또한 신사업 분야에서 민간의 역할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에너지 저장, 분산형 에너지, 수요관리, 에너지효율 서비스(ESCO) 등은 민간기업이 혁신을 주도하기에 적합한 영역이다. 이를 위해선 관련 제도의 유연화와 데이터 개방등이 필요하다. 예컨대 현재는 일반 소비자가 남는 전기를 이웃에게 판매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향후 스마트미터와 블록체인 기술 등을 활용해 P2P 전력거래를 시범 도입할 수 있다. 또한 가상발전소(VPP)사업을 활성화하여 수많은 소규모 분산전원을 하나의 발전소처럼 묶어 운영하고 시장에 참여하도록 허용하면, 민간의 창의적 비즈니스 모델이 창출될 수 있다.
이러한 민간 주도의 성장은 에너지 시장의 투명성과 규제 합리화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최근 IEEFA 보고서에서는 한국 재생에너지 통합이 지연되는 원인으로 높은 PPA 비용, 경직된 규제, 한전의 독점적 지위등을 지적하며, 전력시장 개혁과 전기요금 합리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는 에너지 분야 규제를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고, 실증사업을 통한 규제샌드박스를 확대하여 새로운 기술과 사업모델의 실험을 장려해야 한다. 특히 전력중개사업, 에너지관리 AI 서비스, EV 충전망 연계 그리드서비스등 융합 분야에서는 선제적으로 규제 문턱을 낮추어야 민간 투자가 몰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전 및 발전공기업의 역할 재정립도 고려해야 한다. 공기업은 공공성에 집중하고, 시장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은 민간에 맡기는 분업 전략이 필요하다. 한전의 만성 적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요금 현실화와 더불어 조직 효율화 및 기능 조정이 불가피하다. 예컨대 한전이 소매판매 독점을 내려놓고 송배전망 관리 및 정책적 전력구매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개편하는 방안도 장기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구조개편은 국민 삶과 산업에 큰 영향을 주므로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거쳐 신중히 추진하되, 민간의 창의와 자본을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큰 틀을 설정해야 한다.
전기요금 체계 개편과 민간 주도 성장 전략은 궁극적으로 에너지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것이다. 가격 왜곡을 바로잡으면 에너지 효율 투자가 경제성을 가지게 되고, 기업과 소비자가 스스로 절약하고 생산하는 문화가 자리잡는다. 민간 참여가 확대되면 신기술 도입이 빨라지고 양질의 일자리와 신산업이 창출된다.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긍정적 효과를 국민에게 충분히 설득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초기에는 일부 반발이나 부담이 있겠지만, 투명하고 공정한 체계 구축을 통해 국민 신뢰를 얻는다면, 장기적으로 한국 에너지 산업의 체질 개선과 미래 경쟁력 제고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3.3 선제적 송전망 확충과 전력계통 강화
송전망 인프라의 조기 확충은 이재명 정부 에너지 정책의 성패를 가를 핵심 요소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기화 가속으로 전력 이동량이 대폭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를 지탱할 튼튼한 전력망(capacity)이 없다면 발전 설비를 지어도 활용하지 못하는 병목이 생긴다. 한국은 이미 송전망 부족으로 인한 재생에너지 출력 제한사례를 겪고 있다. 특히 태양광·풍력 자원이 풍부한 전남·전북·제주 등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요가 많은 수도권으로 보낼 송전선로가 미비하여, 발전소가 가동을 멈추는 일이 잦다. 전력망은 건설에 긴 시간이 걸리고 주민 수용성 문제로 지연되기 쉬우므로, 수요 증가와 발전소 건설을 한참 앞서가며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우선 ‘에너지 고속도로’ 프로젝트를 국가 핵심 인프라 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 ‘에너지 고속도로’란 전남 해안과 서해 해상에 집중 건설될 거대한 풍력·태양광 단지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까지 보내는 초고압직류송전(HVDC)망을 의미한다. 이전 정부에서 공약으로 언급되었으나 지지부진했던 이 사업을 조속히 구체화하여, 경북 울진~경기 하남을 잇는 HVDC 사업 등의 지연 사례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표를 2030년대 초반으로 두고 단계별 공사를 추진하며, 재원 조달은 한전 단독 부담이 아닌 한전+민간컨소시엄+정책금융등이 결합된 형태를 모색할 수 있다. 또한 전력망 계획을 수립할 때 분산형 전원과 스마트그리드 확산을 감안하여 유연하고 지능적인 계통으로 설계해야 한다. 단순히 송전선 추가가 아니라 전력망의 디지털화, 실시간 모니터링 및 제어 고도화를 통해,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수용할 수 있는 스마트 전력망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송전망 조기 투자는 에너지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발전소를 먼저 짓고 송전은 나중에”라는 식이었으나, 이제는 “발전 계획과 연계하여 동시에 송전망을 계획”하거나, 오히려 미리 주요 거점간 망을 깔아놓고 발전유치를 촉진하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컨대 대한민국 서남해안에 수십GW급 해상풍력을 구상한다면,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뛰어들 수 있도록 해저케이블과 연계망 건설 일정을 국가가 먼저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전사업 인허가 후 송전 인프라가 없어서 사업이 표류하는 일이 벌어진다.
송전망 확충에서 가장 큰 장애는 지역 주민의 반대(송전선 님비)이다. 고압 송전선이 지나가는 지역 주민들은 전자파 우려나 경관 훼손 등을 이유로 강하게 반발하고, 이로 인해 노선 선정과 공사가 다년간 지연되는 사례가 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재명 대통령이 공약한 ‘햇빛·바람연금’ 제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햇빛·바람연금은 원래 재생에너지 발전소 인근 주민에게 수익을 배당하는 이익공유형 정책으로 구상되었으나, 현재 정부는 이를 송전망 경과지 주민에게 우선 적용하는 안을 추진 중이다.
핵심은 주요 전력망이 지나는 지역 주민들에게 금전적 혜택을 제공하여, 송전 인프라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는 것이다. 산업부는 이를 위해 신안군, 여주시 구양리등 재생에너지 이익공유 성공 사례를 분석해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신안군에서는 2021년부터 태양광 발전소 초과 수익의 30%를 주민에게 분기별로 배당하여 1인당 연 최대 600만원까지 지급하고 있는데, 군민의 40% 이상이 이미 혜택을 받았다. 이러한 모델을 송전망에도 적용해, 송전선로 주변 60m~1km 이내 주민이나 변전소 인근 주민이 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하면 정부가 접속비용 등을 지원하는 방안을 특별법 시행령에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도심 지역에서 망 건설이 필요한 경우에는 해당 주민들이 다른 지역의 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하여 수익을 얻도록 우회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처럼 경제적 보상과 이익 공유를 통해 주민 협조를 구하면, 송전망 사업의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송전망과 함께 배전망과 분산전원 연계망 강화도 중요하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기차 충전수요 급증으로 지역 배전망의 과부하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변압기 용량 부족이나 배전선로 용량 한계로 인해 태양광 접속 신청이 거부되거나, 전기차 충전속도 제한이 걸리는 일도 생긴다. 이를 해결하려면 분산에너지특구와 같은 정책을 통해 지역 단위로 마이크로그리드 투자를 유도하고, 배전망 역시 스마트화 및 증설을 추진해야 한다. 한전은 2028년까지 10조원을 투자하여 배전 설비를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는데, 정부는 이러한 투자가 적기에 이뤄지도록 감독하고 지원해야 한다. 특히 도서 지역이나 농어촌처럼 재생에너지 잠재량은 크나 계통 여유가 부족한 곳에, 에너지저장장치 설치 보조와 계통연계 비용 지원을 통해 발전사업이 이루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전력계통 강화는 궁극적으로 전력 공급의 신뢰도 제고와 에너지전환의 뒷받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다. 송전망 투자는 초기 비용이 크지만, 완공 후 수십 년간 국토의 에너지 혈맥으로 기능하며 경제 전반의 효율을 높인다. 반대로 계통 부족은 블랙아웃 위험 증가와 발전기 가동제약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 이재명 정부는 송전망을 국가안보적 인프라로 인식하고, 고속도로·철도 건설에 준하는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한다. 또한 이런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면서 투명한 소통과 주민 소득 증대를 함께 도모함으로써 사회적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앞서 3.1 재생에너지 가속화에서 언급한 목표 달성도 결국 강건한 전력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을 발하는” 송전망에 과감히 투자하고 혁신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전력 시스템의 안정성과 청정성을 모두 확보하는 지름길이다.
3.4 재생에너지·송전 사업의 이익공유와 지역 수용성 제고
에너지 인프라 사업의 지역 수용성(local acceptance)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재생에너지 확대도, 전력망 확충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한국은 국토가 좁고 사람과 시설물이 밀집해 있어서 “우리 지역에는 안된다”는 님비 현상이 에너지 분야에서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부 지역에서는 인식 변화 조짐도 보인다. 경제적 이익 공유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사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추세를 강화하고 제도화하여, 에너지 사업을 지역발전의 기회로 인식하게 만들고 주민 참여를 제도권 내로 흡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
재생에너지 이익공유제는 이미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사업자 주도로 시행되고 있다. 전남 신안군의 사례가 대표적인데, 신안군은 8.2GW 해상풍력 발전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주민참여형 지분투자와 수익 배당을 제도화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2021년부터 신안군 내 태양광 발전소 초과수익 30%를 주민에게 분배하여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고, 그 결과 신안군은 두 해 연속 인구 증가를 기록하는 등 지방소멸 위기 극복의 모범으로 평가받았다. 여주시 구양리 마을의 경우 주민협동조합이 1MW급 태양광 발전소를 직접 운영하며 매달 1천만원의 수익을 마을버스 운행, 마을식당 운영 등 공동복지에 쓰고 있는데, 이처럼 수익을 개인이 아닌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모델도 주목할 만하다. 정부는 이러한 선도 사례들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재생에너지 개발이익 공유에 대한 법제화와 표준화된 가이드라인마련이 필요하다. 현재는 개별 사업자가 자발적으로 또는 지자체 협약을 통해 시행하고 있지만, 이를 전국 차원으로 높이기 위해 산업부 고시나 특별법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은 주민 지분 참여 또는 이익배분 계획을 포함하도록 의무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의무화에 따른 사업자 부담도 고려하여, 주민 투자 시 세액감면이나 장기저리 융자 지원 등의 인센티브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 또한 수익 배분 방식은 현금 배당뿐 아니라 전기요금 할인, 지역개발기금 조성등 다양한 형태가 가능하므로, 지역 여건에 맞게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체감할 수준의 실질적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형식적인 소액 지원으로는 인식을 바꾸기 어렵다. 신안군의 햇빛연금처럼 연 수백만원 수준의 혜택이 되어야, 농업 소득이나 기존 생업에 준하는 보상이 되므로 참여 유인이 크다.
송전망 이익공유도 앞서 3.3에서 다룬 대로 병행되어야 한다. 송전망은 발전소보다 지역에 주는 직접 혜택이 적기 때문에, 주민들이 더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에 정부는 송전선 경과지 주민들에게도 발전소 이익공유와 연계한 혜택을 줌으로써, 망 인프라에 대한 주민 수용성을 확보하려 한다. 예를 들어, 대규모 풍력발전단지에서 나오는 수익 일부를 인근 송전선 주변 마을에도 배분하는 방식이다. 산업부는 이미 국가기반전력망특별법 시행령에 주민이 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하면 송전망 접속비 지원이 가능토록 근거를 마련했고, 앞으로 제도 시행 시 세부절차를 명확히 할 예정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송전탑이나 변전소 주변 주민들도 재생에너지 사업의 투자자로 참여하여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결국 발전과 송전의 이익공유를 결합하면, 에너지 생산-수송 전 과정에서 지역사회가 혜택을 공유하게 되는 셈이다. 정부는 이 모델을 전국 주요 전력망 프로젝트(예: 신한울~서울 HVDC 등)에 적용해 갈등 없이 조기 준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 수용성을 높이는 또 다른 축은 소통과 참여다. 단순히 돈을 준다고 모든 반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존중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정부와 사업자는 초기 기획 단계부터 주민설명회, 공개토론, 의견수렴 창구를 운영해 쌍방향 소통을 해야 한다. 특히 환경영향평가 과정 등에 지역 주민대표와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협의회를 구성하여, 우려사항(조망권, 소음, 생태 영향 등)에 대해 함께 해결책을 찾는 접근이 필요하다. 주민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객관적 데이터 제공 및 보완대책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면 신뢰가 형성된다. 예를 들어 풍력단지 주변 소음 문제 제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방음시설을 설치하거나, 조류 충돌 우려에 대해 터빈 회전속도 조절장치를 부착하는 등의 대응이 그 사례다.
또한 지방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에너지 사업을 지역발전 비전과 연결지으면 주민들도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컨대 “우리 군은 100% 재생에너지 자립도시를 만들어 청정산업을 유치하고, 주민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식의 지역 에너지 전략을 수립하고 홍보하는 것이다. 실제로 태양광 연금을 도입한 신안군은 그 성과를 주민들에게 보여주며 “소멸 위기에서 벗어난 사례”로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다. 다른 지자체들도 벤치마킹하여 에너지로 부흥하는 지역모델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중앙정부는 재정 및 정책적으로 이를 지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형평성과 전국민적 공감대도 고려해야 한다. 특정 지역 주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결국 전기요금 인상 요인으로 전체 국민에게 비용 전가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익공유 비용은 가능하면 발전사업 수익 내부에서 충당하도록 하고, 불가피하게 전력요금에 반영될 경우 그 효과와 필요성을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민이 납득하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재생에너지 이익공유로 인한 요금 영향은 kWh당 몇 원이지만, 이를 통해 수십 GW 설비가 제때 준공되어 중장기적으로 전기요금 안정에 기여한다”는 식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익공유제가 특정 지역만의 특혜가 아니라, 국가 에너지전환을 촉진하기 위한 사회적 투자임을 인식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결국 지역과의 상생없이 에너지 전환은 불가능하다. 정부는 주민 이익공유와 참여 강화 정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재생에너지=지역경제 발전”이라는 공식을 전국에 정착시켜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주민들은 더 이상 발전소나 송전선을 기피대상이 아니라 지역 소득원이자 미래 희망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에너지 정책의 사회적 기반이 튼튼해지면, 기술과 자본 투입 이상의 강력한 추진력이 생긴다. 한국은 높은 사회자본으로 유명한 나라가 아니지만, 에너지 전환 분야에서만큼은 신뢰와 협력의 성공 스토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익공유와 수용성 제고 정책은 그 핵심 열쇠이며, 이재명 정부의 의지와 리더십에 달려 있다.
이상 살펴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좋은 에너지 정책은 가치 다원성과 사회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하며, 기술적 해법과 인간적 통찰의 조화 속에서 나온다. 2025년의 국제 에너지 정세는 에너지 안보와 기후목표의 결합, 미국과 중국의 정책적 대립과 경쟁, 그리고 청정에너지로의 대전환 가속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의 새로운 정부는 재생에너지 중심 체제로의 과감한 전환, 왜곡 없는 시장 체계 구축과 민간 활력 증진, 미래를 내다본 전력망 투자, 지역과 함께하는 상생 모델 정착을 통해 지속가능하고 경쟁력 있는 에너지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에너지 정책은 하루아침에 성과가 나는 영역이 아니며, 오랜 시간 꾸준한 노력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 내딛는 올바른 한 걸음이 10년 후 대한민국의 에너지 지도를 바꿀 것이다. 정부의 과감한 리더십과 국민 모두의 동참으로, 한국이 글로벌 에너지전환의 선도국가로 우뚝 서길 기대한다.
<참고자료> 책에서의 원자력 정책에 대한 내용 소개
핵 위험에 대한 인식: 기술적 합리성과 공공의 감정
원자력 발전과 관련된 정책 결정에서 또 하나 큰 장애이자 과제는 사회적 수용성과 대중의 정서 문제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나 특히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시설(저장소) 후보지 선정과 같은 이슈는 극심한 지역사회 반대와 전국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이러한 논쟁은 종종 매우 감정적 양상으로 전개된다. 주민들과 시민들은 원전 사고의 가능성, 방사성 폐기물의 위험성 등에 두려움과 우려를 표하는 반면, 과학자나 정책결정자, 원자력 업계 관계자들은 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한 위험 평가는 다르다며 대중의 반응을 비합리적 공포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정책결정자들의 대응은 대체로 두 가지 극단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전문가주의적 함정(technocratic pitfall)이라 불릴 수 있는데, 전문가들의 판단과 통계 수치를 절대시하여, 일반 대중의 정서적 우려를 무시하거나 설명과 소통 없이 강행하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포퓰리즘적 함정(populist pitfall)으로, 여론의 감정적 반대를 정책 결정의 절대 기준으로 삼아 과학적 타당성과 무관하게 정책을 좌우하는 태도다【Roeser 2018】.
전자의 예로는 일부 국가에서 정부가 위험은 미미하다며 주민 의견을 배제하고 원전 정책을 추진하는 사례를 들 수 있고, 후자의 대표적 사례로는 독일이 후쿠시마 사고 직후 사회적 여론에 밀려 탈핵 결정을 급박하게 내린 것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접근법 모두 원자력 기술의 사용에 대한 진지한 도덕적 숙고와 공론 형성을 가로막는다는 공통된 문제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 의사결정이 기술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져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되고, 위험 수용에 대한 시민들의 자율적 결정권이 침해된다. 후자의 경우, 감정적 여론이 이성적 검토를 압도하여 에너지 정책이 단기적 감정에 휘둘리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략 모색이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원자력과 같은 위험 기술에 대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옳을까? 우선 짚어야 할 것은, 흔히 전제되는 몇 가지 잘못된 가정들이다: (1) 위험한 기술에 대한 판단은 순전히 기술적 문제다, (2) 따라서 거기에는 윤리적 고려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3) 공중의 감정적 반응은 비합리적이므로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정은 모두 사실과 어긋나며, 위험 거버넌스를 그르치는 원인이 된다.
6.1 위험의 기술적 평가와 윤리적 가치
현대 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위험의 정의는 대체로 발생 확률 × 결과의 심각도라는 공식에 기반한 것이다. 예컨대 원전 사고 위험은 “노심 용해와 같은 중대 사고가 일어날 확률에 그 사고로 인한 피해(예컨대 예상 사망자 수)”를 곱한 값으로 표현되고는 한다. 이러한 정량적 위험평가(QRA) 기법은 겉보기에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의사결정 도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많은 가치 판단과 한계를 안고 있다. 첫째, 계량화의 어려움이다. 원전 사고처럼 복잡한 사건에 대해 정확한 발생 확률을 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인적 오류나 조직 문화, 복합 재난 등 예측하기 어려운 요인들은 확률 계산에서 누락되기 쉽다【Downer 2015】.
실제로 과거의 원전 사고들은 설계 결함보다는 인재와 복잡한 원인들이 겹쳐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요인은 통계적 자료가 부족하거나 고유하게 불확실하기 때문에, 숫자로 표현된 위험 값은 허구적인 정확성(false precision)을 가장할 수 있다.
둘째, 평가 범위와 지표의 선택은 윤리적 판단이다. 위험평가에서 “원하지 않는 결과”로 무엇을 포함할지는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사망자 수나 재산 피해액 같은 지표가 쓰이지만, 이는 핵사고의 모든 피해를 대변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후쿠시마 사고 이후 수만 명의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일부 지역은 수십 년 이상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금지구역이 되었다. 고향 상실, 공동체 붕괴, 정신적 고통과 같은 요소는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기 어렵다. 또한 방사능으로 인한 장기적 건강 영향(암 발생 등)이나 환경 훼손(토양 및 생태계 오염)은 피해가 서서히 드러나므로 단기 통계에 잡히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간접적·비가시적 피해까지 모두 고려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물리적 인명 피해 위주로만 보려고 한다. 어디에 기준을 둘 것인가는 결국 사회가 어떤 가치를 중시하느냐의 문제다.
셋째, 위험과 편익의 분배 문제다. 단순 합산된 위험 수치만 가지고 결정을 내릴 경우,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에 어긋날 소지가 크다. 예를 들어 “전체 사회에 미치는 순효용이 크면 소수에게 일정 희생을 강요해도 된다”는 식의 공리주의적 접근은, 소수 집단(원전 주변 지역 주민 등)의 자율성과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원자력 발전의 이익(전기)은 사회 전체가 누리지만, 사고 위험이나 저준위 방폐장 등 부담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윤리적으로는 “피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의 동의와 공정한 보상”이 중요하지만, 단순 위험지표는 이런 맥락을 담아내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시간적 관점에서 경제분석 기법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경제학에서는 미래의 편익이나 피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할인율(discount rate)을 적용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먼 미래일수록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는 뜻이다. 이 방식은 합리적 투자 분석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세대 간 윤리에 있어서는 큰 결함이 있다. 예를 들어 100년 후 미래세대의 생명이나 안전을 현재세대보다 낮게 취급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경제모델에 따르면, 높은 할인율을 쓰면 수만 년 후의 방폐장 위험은 사실상 0에 수렴하는 수치로 평가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런 계산은 현세대의 이해관계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결과를 낳으며, 미래세대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호도한다. 이처럼 전통적인 “기술적 합리성(technical rationality)” 기반의 위험평가 방법은 실제로는 윤리적 가치 판단이 스며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Krimsky & Golding 1992; Shrader-Frechette 1993】. 따라서 위험에 대한 순수 기술적 접근은 불완전하며, 윤리적 성찰과 보완이 필요하다.
6.2 감정의 역할: 두려움과 분노가 가리키는 것
일반 대중은 전문가들과 달리 위험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정성적 요소를 많이 고려한다는 것이 실증 연구들을 통해 밝혀졌다【Slovic 2000】. 예컨대, 사고 발생 시 피해 범위, 피해의 되돌릴 수 없음, 통제 가능성 여부, 공포 유발 이미지 등은 대중의 위험 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핵발전소 사고의 경우, 비록 확률은 낮아도 일단 일어나면 대재앙적 결과를 낳는다는 점 때문에 강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또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전문지식이 없으면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통제 불가능한 위험으로 인식되어 더욱 불안과 공포를 야기한다. 이러한 감정적 반응은 일각에서 비이성적이라 비판받지만, 사실 그 밑바탕에는 앞서 논의한 윤리적 고려 사항들이 반영되어 있다【Roeser 2006; 2018】.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감정(emotion)이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는 요소라고 여겨왔으나, 현대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는 오히려 감정이 없다면 인간은 도덕적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Damasio 1994; Nussbaum 2001】. 감정은 우리의 가치관과 신념을 반영하며, 무엇을 옳고 그르다고 느끼는지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분노는 부당함을 감지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고, 공포는 큰 해악의 가능성을 직감할 때 생긴다. 죄책감이나 책임감은 우리의 행위로 남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될 때 발현되는 감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원자력에 대해 시민들이 보이는 부정적 감정들은 상당 부분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신호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앞서 언급했듯, 통상적인 위험산정으로는 저확률-고피해 시나리오와 고확률-저피해 시나리오가 동일한 수치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은 전자, 즉 아주 드물지만 일단 발생하면 치명적인 시나리오에 훨씬 민감한 경향을 보인다. 원자력 사고가 대표적이다. 이는 단순히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한 번의 사고로 영구적 삶의 터전 상실이나 대규모 환경 파괴가 발생하는 상황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적 거부감은 원자력 발전을 판단함에 있어 정량 지표에 드러나지 않는 중대한 윤리적 측면—예컨대 개인과 공동체의 지속성,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질, 자연에 대한 책임—을 환기시켜준다. 체르노빌 이후 넓은 지역이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장면, 후쿠시마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눈물 흘리는 주민들의 모습은, 단순 사망자 수 통계로는 표현되지 않는 도덕적 충격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이를 통해 우리는 원자력 사고가 단순 숫자로 셈해지는 피해 이상의 인간적 비극과 윤리적 문제를 수반함을 깨닫게 된다.
또 다른 예로 핵폐기물 문제를 생각해보자. 수십만 년 동안 관리가 필요한 폐기물을 남긴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미래 기술의 발전이나 관리 체계로 해결될 수도 있다고 낙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미래세대에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며, 우리가 이런 유산을 남겨도 되는지 도의적 갈등을 경험한다. 이러한 감정은 세대 간 책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로 하여금 쉬운 길(현세대의 편의)만 취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어려운 길(현세대의 부담 증가)을 고민하게 만든다. 반면 극단적으로 기술 낙관주의에 빠져 “미래에 가서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이러한 감정적 직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억누르는 것일 수 있다. 요컨대, 원자력 정책을 둘러싼 공공의 감정은 그 자체로 정책 판단의 중요한 요소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이 곧 감정에 휘둘리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지시하는 윤리적 쟁점들을 이성적·집단적 숙의로 풀어나가자는 뜻이다. 예컨대 주민들이 처분장 건설에 반대하며 보이는 두려움과 불신은, 단순한 NIMBY로 치부하기에 앞서 그들이 절차적 정의(정당한 의사결정 과정)와 투명성, 그리고 미래 안전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임을 헤아려야 한다. 그들의 감정 속에는 “왜 하필 우리 지역이 희생되어야 하는가?”라는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 “정부와 전문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신뢰와 책임에 대한 의문, “우리 아이들과 후손은 어떻게 되나?”라는 세대 책무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 이러한 물음들은 하나같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논의 주제들이다.
결국, 효과적인 원자력 거버넌스를 위해서는 전문가의 과학적 판단과 시민의 정서적·윤리적 직관을 통합하는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위험에 대한 정량적 정보는 중요하며, 이는 의사결정의 한 축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윤리적 가치 판단과 시민들의 수용성이 반영되지 않은 정책은 지속가능하지도, 민주적 정당성을 갖기도 어렵다. 따라서 정책입안자들은 공청회, 시민배심원단, 참여적 기술평가 등의 방법을 통해 시민들이 자신의 감정과 우려를 표현하고 토론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건설적으로 논의에 포함시켜 잠재된 윤리적 쟁점을 표면화하고 함께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이다【Roeser 2011b; Nihlén Fahlquist & Roeser 2015】. 이러한 포용적 거버넌스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사회는 원자력 에너지의 활용 여부 및 방식에 대해 숙의 민주주의의 원칙 하에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원자력 에너지 이용에 관한 주요 윤리적 쟁점들을 검토하고, 앞으로의 정책 및 연구 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자력에 대한 회의가 커졌지만, 동시에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수요 증가로 인해 원자력은 여전히 현실 세계의 선택지로 남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자력 거버넌스의 개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그 핵심에 윤리의 통합이 놓여야 함을 강조한다. 우선, 새로운 기술 시대의 옛 문제인 원자로 안전과 핵폐기물 관리에 대해 세대 간 정의와 형평성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기술적 개선으로 사고 확률을 낮추고 폐기물의 위험성을 줄이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지만, 어떤 기술 경로를 택할 것인지 자체가 윤리적 판단을 동반한다. 현세대의 이익과 미래세대의 부담 사이 균형, 안전과 경제성의 우선순위 등을 투명하게 따져 묻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이는 사후적 평가뿐 아니라 사전적 정책 설계 단계에서 윤리적 고려가 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 국경을 넘어선 협력과 정의가 필요하다. 다국적 핵폐기물 처분이나 원전 사고의 파급 효과 등을 생각할 때, 원자력의 위험과 책임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법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부당한 위험 전가를 막고, 공동의 안전 책임을 지는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지도자들과 국제기구, 전문가 집단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거버넌스 틀을 마련하는 노력이 시급하다. 여기에는 국제 감시 강화, 투명한 정보 교류, 공동 대응체계 등이 포함될 것이다. 더 나아가, 원자력 기술을 둘러싼 의사결정 권한을 다자간 협의체나 국제 기구로 이양하는 방안도 열린 마음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 인류 전체의 안전과 미래라는 대의 앞에서, 협소한 국익이나 주권 논리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 대중의 참여와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자력 정책은 기술적으로 복잡하고 전문성이 요구되지만, 그 결과와 위험을 감당하는 것은 시민사회 전체다. 따라서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 차원에서 시민들의 의견 개진과 숙의 참여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원자력에 대한 대중의 감정적 반응을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정당한 우려와 가치관을 정책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갈등을 해결하고 정책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기술적 rationality(기술적 합리성)뿐 아니라, 시민들의 생활 세계에 기반한 합리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궁극적으로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수준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며, 그 합의는 정보의 공유와 열린 대화 속에서만 도출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학계와 전문가 사회의 역할도 강조하고자 한다.
원자력의 미래는 불확실성이 크며, 다양한 시나리오로 전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기술의 발전(소형모듈원자로, 핵융합 등), 에너지 정책의 변화(재생에너지 확대, 탄소중립 목표),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 등에 따라 원자력의 위상은 달라질 것이다. 학계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고 선제적으로 윤리적 평가와 제언을 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사후적으로 잘잘못을 평가하는 것을 넘어, 예방적이고 책임있는 혁신(responsible innovation)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기술윤리학자, 공학자, 사회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미래 세상을 내다보며 보다 정의롭고 민주적인 기술 시나리오를 설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원자력 에너지의 이용 여부와 방식은 기술적 분석과 더불어 깊은 윤리적 통찰이 요구되는 사회적 선택이다. 원자력이 지속가능하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에너지가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우리의 윤리적 상상력과 협력적 거버넌스 역량에 달려 있다. 과거의 교훈과 현재의 논의를 바탕으로, 감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숙의 민주주의를 통해 원자력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미래 세대에게 떳떳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는 비단 원자력 분야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마주한 모든 과학기술 윤리 문제에 시사점을 준다. 윤리적으로 건전한 에너지 미래를 향한 여정에서, 원자력 에너지의 운명을 결정짓는 논의가 더욱 투명하고 포용적이며 책임있는 방향으로 전개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