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국형 에너지 전환의 병목과 해법

어떻게 에너지 전환을 실제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

by The Surplus Square

1. 들어가며

태양광 설비는 몇 달이면 서지만, 그 전기를 실어 나를 전력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한국은 글로벌 평균과 비교해 재생에너지 확장이 빠른 편이 아니다. 2024년 전 세계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가 32%를 기록했고, 저탄소 전원(재생에너지와 원전을 합한 개념)은 40.9%에 도달했다. 이 증가의 대부분은 태양광과 풍력에서 나왔다. 태양광은 2024년에만 약 480TWh가 늘었고, 풍력은 약 180TWh가 추가되었다. 태양광과 풍력의 글로벌 전력 비중은 각각 약 7%와 8%로 집계되었다. 2025년 중간 전망에서 국제에너지기구는 태양광과 풍력이 2025년 수요 증가분의 90% 이상을 감당하고 2026년에 6,000TWh를 넘어설 것으로 본다.


한국의 2024년 발전원 믹스는 재생에너지 기반 전기의 비중이 10%대 초반에 머물렀고, 저탄소 전원 비중은 약 40% 수준이었다. 원전 비중이 31.7%로 급증하며 석탄과 가스를 처음으로 앞질렀고, 재생에너지 및 기타는 12.0%였다. 재생에너지 내부 구성에서는 태양광 비중이 51.8%, 풍력이 5.3%였다. 이를 전체 전력 기준으로 환산하면 태양광 약 6.2%, 풍력 약 0.6% 수준이다. 같은 해 전 세계 재생에너지 32%와 비교하면 한국의 재생에너지 비중은 여전히 낮다. 한국은 글로벌 추세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풍력과 태양광은 아직 초기 단계이다.


핵심은 확장의 속도보다 공간의 불일치이다. 한국은 생산지와 수요지가 구조적으로 어긋나 있다. 재생자원이 풍부한 서남권과 동남권에서 재생에너지 기반 전기가 늘고, 수요는 수도권과 산업벨트에 더 빠르게 쌓인다. 남부에서 북부로 전력이 흐르는 북송 조류가 수십 년에 걸쳐 고착되었고, 최근 10년 사이 반도체 단지와 데이터센터 입지 증가로 그 의존이 더 커졌다. 수요지가 아닌 곳에 대규모 발전원이 추가되면 송전선과 변전소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데, 이 확충이 늦어지면서 병목이 누적되었다. 그 결과 접속 대기와 출력 제한이 반복되고, 재생에너지 기반 전기의 잠재력이 도시의 콘센트까지 닿기 전에 소진된다.



2. 수도권 전력 수요 급증과 재생에너지 자급 한계


수도권은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공간이다. 2024년 전력판매량 기준으로 서울 50,352GWh, 경기도 143,302GWh, 합계 193,654GWh이다. 연중 8,760시간으로 나누면 평균 약 22.1GW를 상시로 소비한다. 같은 통계에서 전국 판매전력은 549,821GWh이므로, 서울과 경기만 합쳐도 대략 3분의 1을 차지한다. 수치가 이미 답을 말한다. 수도권은 전력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문제는 이 거대한 수요를 수도권 내부에서 충당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밀도 개발과 높은 토지비용, 낮은 주민 수용성 때문에 대규모 재생에너지 기반 전기를 현장에서 만들 공간이 부족하다. 반대로 일사와 풍황이 유리한 서남해안과 남부에는 태양광과 풍력이 깔린다. 전력의 기본 흐름은 남쪽과 동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북송조류가 되었고, 이 흐름은 수십 년간 고착되었다. 최근 10년은 그 경사가 더 커졌다. 산업의 중력과 디지털 인프라가 수도권으로 더 촘촘히 쌓였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수사나 희망이 아니라 수치와 경로이다. 어디서 얼마를 만들고, 어디로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 구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반도체 벨트와 용인 클러스터이다. 이미 화성, 수원, 평택, 이천의 공장들은 거대한 부하를 올려놓았고, 용인 클러스터는 전력 수요를 16GW로 전제한 보고가 공개되었다. 2024년 우리나라 최대 전력수요 약 97GW에 견주면 16.5퍼센트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매우 공격적인 변전설비와 송전선 증설 없이는 물리적으로 맞추기 어려운 수준이며, 수도권 변전소의 여유와 피상전력 한계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점이 공식 보고서와 지역 보도에서 확인된다.


데이터센터는 수도권 전력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분산에너지법 시행으로 수도권 입지가 까다로워졌는데도 전기사용 신청은 수도권으로 쏠렸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6월까지 데이터센터 목적 전기사용 신청 290건 가운데 195건이 수도권이었고, 신청 용량만 20GW에 달한다는 국회 제출 자료가 보도되었다. 같은 시기 국정감사 이슈 분석에서는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최대 8.4GW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물론, 데이터센터 신청 수요는 부동산 용도변경에 따른 부수적 이익, 일단 밀어넣기식의 가수요가 상당수 존재한다. 그럼에도, 숫자 사이의 차이는 추계 범위와 전제의 차이이지만, 공통 메시지는 단순하다. 인프라가 앞서지 않으면 계획은 종이 위에 멈춘다.


현장의 병목은 이미 표면으로 올라와 있다. 호남 권역은 재생 설비 집중과 송변전 용량 부족으로 접속 대기와 출력 제한을 반복해 왔고, 전력당국은 보강 계획과 연동해 계통 접속을 단계적으로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시기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대동맥 송전선은 주민 반발과 인허가 지연으로 준공이 8년 늦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발전소는 서는데, 전기가 흐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결론은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생산지는 남쪽과 바깥에, 수요지는 북쪽과 수도권에 있다. 수요지가 아닌 곳에 대규모 발전원이 더해지면 송전선과 변전소가 반드시 따라붙어야 하고, 그때마다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표가 어긋나면 접속 대기와 출력 제한이 일상이 된다. 용인 클러스터의 16GW, 수도권 데이터센터 신청 용량 20GW, 그리고 지연된 대동맥 송전선이라는 세 숫자가 같은 그림을 가리킨다. 오늘의 수요 곡선과 내일의 설비 지도, 모레의 송전 경로를 같은 좌표에 올려놓고, 재생에너지 기반 전기가 실제로 도시의 콘센트까지 닿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독자가 다음 장에서 만나게 될 논의의 출발점이다.



3. 기업 RE100 추진의 장벽과 TCO 관점의 해법


RE100은 기업이 쓰는 전기를 100퍼센트 재생에너지 기반 전기로 바꾸겠다는 약속이다. 한국 기업도 그 약속을 요구받는다. 수출 계약의 납품 조건, 벤더 등록의 필수 질문, ESG 공시의 단골 항목이 되었다. 문제는 조달 수단과 가격, 그리고 신뢰다. 국내 전력 믹스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은 아직 낮고, 그리드는 병목 구간이 많아 원하는 시점과 입지에 맞춰 전기를 확보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업은 지금 가능한 버튼을 누른다. 그 버튼이 바로 녹색프리미엄이다.


녹색프리미엄은 한국전력이 파는 “재생 전력 인증 요금”이다. 기업이 일반 전기요금에 소정의 프리미엄을 얹어 사면, 재생 전기를 쓴 것으로 간주되는 제도다. 2024년 1분기 평균 낙찰가는 킬로와트시당 10.4원, 사실상 하한가 10원 부근에서 형성됐다. 같은 시기 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인 REC는 평균 수십 원대였다. 싸고 간편하니 선택이 몰렸다. 2024년 한국 기업의 재생 전력 조달에서 녹색프리미엄이 차지한 비중은 약 98퍼센트였다. 라벨은 빨리 달 수 있다. 다만 추가성은 약하다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전력구매계약(PPA, Power Purchase Agreement)는 다른 길이다. 발전사업자와 기업이 장기 계약으로 전력을 직접 주고받는 방식이다. 가격을 10년에서 20년까지 고정하거나 공식 지표에 연동해 변동폭을 제한할 수 있어 전력비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에서도 2021년 제도 도입 이후 규정 정비가 이어졌고 2025년 6월 기준 누적 체결량이 약 1.7GW까지 쌓였다. 글로벌과 비교하면 여전히 초기이며, 수요 대비 공급 측면에서도 갈 길이 남았다. 다만 성장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현장에서 부딪히는 벽은 세 가지다. 첫째, 가격의 층위다. 녹색프리미엄은 싸고 단순하다. REC와 제3자 PPA는 금융비용과 프로젝트 리스크를 함께 본다. 둘째, 제도 복잡성과 그리드 병목이다. 접속 심사 대기, 송전선로 과부하, 핵심 장비 납기 지연이 계약의 시간을 갉아먹는다. 셋째, 공급 포트폴리오의 얕음이다. 기업이 원하는 시간대와 입지에 맞춰 태양광과 풍력을 조합하려면 시장의 두께와 표준 계약, 집행 신뢰가 필요하다. 한국 시장은 이 세 축이 아직 얇다. 그래서 많은 계약이 “가능한 것”으로 수렴한다. IEEFA는 한국의 전력망 확충 지연과 비효율적 PPA, RPS 제도의 괴리를 병목의 핵심으로 지목했다.


여기서 총소유비용(TCO, Total Cost of Ownership)가 등장한다. TCO는 전력의 총소유비용이다. 단가만이 아니라 조달 지연의 기회비용, 가격 변동성 헤지 비용, REC 확보 비용, 접속 실패 리스크, 인증 준수 비용을 모두 더한 값이다. 믿을 수 있는 하나의 공공 그리드가 정시에 충분한 전력을 공급해 줄 것이라는 전제에서 벗어날수록, 기업은 “단가가 조금 비싸도 일정과 품질이 보장되는 계약”을 선호한다. 특히 대기업과 대형 데이터센터, 반도체처럼 전력 품질과 무정전이 생존과 직결되는 수요는 TCO를 본다. 단가가 낮아도 리드타임이 불확실하고 차단 위험이 높다면 선택지에서 밀린다. 반대로 장기 PPA로 가격을 고정하고, 공급 리스크를 분산하면 회계상 비용은 다소 높아도 경영 리스크는 낮아진다. 한국 시장에서 TCO 의사결정이 대기업 중심으로 자리 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급 신뢰에 대한 “국가 보증”만으로는 기업의 리스크 관리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국적 RE100 기업은 장기 PPA로 조달 단가와 변동폭을 완화하고, 잉여분은 REC로 보완한다. 국내에서도 같은 흐름이 서서히 나타난다. 다만 한국은 그리드 제약과 시장이 크지 않고 조합의 자유도가 낮다. 결과적으로 녹색프리미엄 의존이 길어졌고, 장기 계약의 누적 규모는 아직 작다. 이 간극이 수출 경쟁력으로 번질 수 있다. 해외 바이어가 요구하는 것은 “녹색 라벨”만이 아니라, 실제 재생 전력 사용의 추가성과 검증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해외 통계를 보면 전 세계 RE100 회원사의 31퍼센트 이상이 PPA로 조달하지만, 한국 수출기업 중 PPA를 활용하는 비중은 20퍼센트 안팎으로 파악된다.


지금 한국의 기업 RE100은 “싸고 쉬운 표”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 장거리표인 전력구매계약은 팔리기 시작했지만 자리가 넉넉하지 않다. 그 사이 기업의 계산서는 단가에서 총소유비용으로 넘어간다. 언제, 얼마나, 어떤 품질로 공급받을 수 있는가. 이 세 질문에 답하는 계약이 곧 경쟁력이다. 정책 의지는 보조금의 크기겠지만 빠른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결국 돈의 문제로 귀결된다.




4. 전력망 구축 지연의 구조적 원인 – 갈등, 비용, 시간의 병목과 개선 방향


국내 전력망 확충 속도가 재생에너지 보급과 첨단 산업의 전력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전력망이 부족하면 태양광·풍력 발전기의 발전량을 제때 흡수하지 못해 발전 제한이 발생하고, 이는 에너지 전환의 걸림돌이 된다. 이처럼 전력망 건설이 지연되는 것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넘어 사회적 갈등, 투자 부담, 제도적 병목이라는 복합적인 원인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송전선로와 변전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지역사회의 반발이다. 초고압 송전탑은 길이가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고 탑 높이도 30~60미터에 달한다. 송전선이 지나가는 지역 주민들은 경관 훼손, 전자파 건강 문제, 토지 가치 하락과 같은 우려를 제기한다. 반면 송전선이 실어 나르는 전기는 주로 수도권이나 대규모 산업단지에 공급되는 경우가 많아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인식을 갖는다. 이는 ‘우리 동네에는 필요 없다’는 님비 현상으로 나타나며, 밀양 765kV 송전선 사건처럼 10년 이상 갈등이 이어지는 사례도 있다. 미국 MIT가 분석한 여러 장거리 송전선 사례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발견된다. 연구진은 “송전선로가 농지·숲·마을을 가로질러 전기를 먼 곳으로 운반하는데, 해당 지역에 직접적인 혜택이 거의 없다”는 점 때문에 주민들의 강한 반대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은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오히려 더 심화될 수 있다.


전력망 구축 지연의 두 번째 요인은 막대한 투자 비용이다. 정부는 제10차 송·변전설비계획을 통해 2036년까지 약 56조5천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지만, 한국전력공사의 재무 악화와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사회적 저항으로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 해외 사례에서도 지연으로 인한 비용 증가가 큰 문제로 드러난다. 예컨대 미국의 뉴잉글랜드 청정에너지 연결(NECEC) 사업은 주민투표와 법정 소송으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건설비가 5억 달러 증가해 총 15억 달러가 되었고, 이 비용은 결국 전력 수요지인 매사추세츠주의 전력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에서도 투자비 증가가 결국 전기요금 또는 세금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는 적기 건설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세 번째 원인은 행정 절차의 병목이다. 송전망 건설은 계획 수립과 예비타당성 조사, 환경영향평가, 인허가 등 여러 단계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부처와 이해관계자의 협의가 필요해 허가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MIT 연구는 미국의 여러 장거리 송전선 프로젝트에서 설계부터 최종 승인까지 10~15년이 걸렸다고 보고하며, 이를 줄이기 위해 주민 참여를 초기 단계부터 강화하고 인허가 절차를 통합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한국 역시 2023년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통해 일부 핵심 송전망 사업에 예타 면제를 적용하고 인허가를 패키지로 처리하는 제도를 도입했지만, 절차를 단순화하는 동시에 주민 의견 수렴과 환경 보호를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정책 수립과 실행과의 간극에서 주민 반대라는 복병은 모든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전력 인프라는 거의 모두가 환영하지 않은 혐오시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합의에 이르는 방식과 그 추가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 같은 구조적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여러 차원의 개선이 필요하다. 우선 주민 수용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계획 단계부터 지역 주민과 소통하고 그들의 우려를 들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MIT 연구는 개발자가 주민들의 요구를 듣고 광대역 인터넷 설치 등 구체적인 혜택을 제공하면서 갈등이 완화된 사례를 소개한다. 한국에서도 송전선 주변 지역에 전기요금 할인, 마을 발전기금, 재생에너지 프로젝트 참여 기회 등을 제공해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보상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 이득보다는 지속적인 이익의 공유가 필요하며, 명확한 원칙을 수립하는 형태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제도적인 정비도 필요하다. 정부는 국가 기간 전력망 사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부처 간 협업을 강화하고, 환경영향평가와 인허가 심의를 동시에 진행하는 원스톱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 MIT 연구는 주정부와 개발자 간의 명확한 비전 공유와 교통·도로 등 기존 인프라를 활용한 송전선 부지 확보 방안을 제시한다. 또한 투자비 증가를 막기 위해 일정과 비용을 연동하는 인센티브를 도입하고, 허가 지연으로 발생한 추가 비용은 사업자와 수요지 전력 소비자가 함께 부담하도록 정책을 설계하는 등의 비용 분담 구조 개선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술적 대안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 전력망 확충만으로는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모두 처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가상발전소(VPP)를 활용해 지역에서 생산된 전력을 저장하거나 수요를 유연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GridLab와 Brattle Group의 연구는 VPP가 혼잡 지역에 배치될 경우 전력망 혼잡을 완화하고 송·배전 설비 확충을 지연시키거나 회피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뒤편에 설치된 자원들이 전력 공급 능력을 확보하면 전력망 업그레이드를 줄일 수 있다고 밝힌다.


NREL과 국제에너지기구(IEA) 보고서는 배터리 에너지 저장 시스템(BESS)이 그리드 안정성을 높이고 피크 수요 대응, 주파수 조정, 블랙스타트 능력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재생에너지를 신뢰할 수 있는 전원으로 전환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분산형 자원을 확대하고 지역별 생산과 소비를 연계하면 갈등과 비용을 줄이고 보다 유연한 전력망 운영이 가능하다. 기술적 기반 확보와 함께 제대로 된 시장 형성이라는 어려운 목표가 있지만 재생에너지 용량 확대와 함께 새로운 혁신을 일으킬 시장의 조성은 필수적이다.


요컨대 전력망 구축 지연은 주민 갈등, 투자 부담, 행정 절차 지연이라는 복합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주민과의 신뢰 구축, 투자 구조 개편, 인허가 절차의 효율화, 에너지 저장과 가상발전소 등 대안 기술의 도입, 그리고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 구축을 통해 전력망을 적기에 확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국의 경우 특히 수도권과 지방 간 전력 수요와 공급의 차이가 심화되면서 문제가 더욱 커지고 있다. 수도권, 특히 서울은 그동안 외부에 의존해 전력을 공급받아 왔지만, 장기적으로는 이같은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적인 에너지 자립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내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가상발전소(VPP)를 적극적으로 구축해 수요지 인근에서 전력을 저장·조절하고, 전력망 혼잡을 완화하는 대안적 방법을 병행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병행될 때, 수도권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체가 외부에 의존했던 전기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면서 지속 가능한 에너지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5. 지방 재생에너지 공급 과잉과 전력 인프라 미연계


한국의 에너지 전환이 본격화되면서 재생에너지 확대와 탈탄소화 목표는 꾸준히 상향 조정되고 있다. 정부는 2024년 이후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누적 보급량을 78GW로, 2035년에는 107.8GW로 설정했으며, 최근 환경부 김성환 장관은 이를 넘어 2030년 100GW, 2035년 150~200GW 목표를 언급해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를 더욱 높이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적 목표 설정이 탈탄소 목표나 국가 온실가스감축목표(NDC)의 측면에서는 바람직해도, 전력망 병목과 수요지·공급지 격차가 심각한 한국의 현실에서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전력망이 확충되지 않으면 늘어난 재생전력은 계통에 흡수되지 못하고, 발전 제한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현재 재생에너지 설비는 넓은 부지가 필요한 특성 탓에 전남·전북 등 남부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2023년 기준 호남권의 평균 전력 수요가 6.2GW에 불과한 반면, 상업운전 중인 재생에너지 설비는 11GW에 달했다. 2031년까지 32GW 규모의 추가 설비가 계통 접속을 대기하고 있어 총 43GW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전남 해남, 고흥, 보성과 같은 지역에는 대형 풍력·태양광 단지가 들어섰지만, 한전의 송전선과 변전소 용량은 포화 상태여서 많은 발전소가 출력 제한을 겪는다.


설비가 늘어도 전력망이 따라오지 못해 잉여 전력이 버려지고 있으며, 발전사업자들은 금융비용만 부담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반대로 수도권과 대규모 산업단지의 전력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송전망 병목과 지역 사회의 반발로 지방에서 생산된 전력을 원활히 보낼 수 없다. 이러한 공급과 수요의 괴리가 재생에너지 확대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재생에너지 목표가 현실성을 갖추려면 수요지와 공급지 모두에서 균형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우선 수요지, 특히 수도권과 대도시에서는 가능한 한 재생에너지 설비를 직접 설치해야 한다. 옥상 태양광, 건물일체형 태양광(BIPV), 도심형 풍력, 지열 냉난방 등 다양한 분산형 설비를 통해 수요지 내에서 전력 생산을 늘리고, 전력망 부하를 줄여야 한다. 도시의 전기 수요가 급증하는 데이터센터, 전기차 충전소, 대형 상업시설 등도 자체적으로 재생에너지와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갖추어 피크 부하를 낮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요지에서 재생에너지 발전을 늘리면 송전망 건설 부담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수용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지자체들은 도심 내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 대한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주민참여형 사업을 통해 도시민의 참여를 촉진해야 한다.


한편 공급지인 남부 지역에서는 잉여 전력을 흡수할 징검다리 수요(bridge demand)가 필요하다. 징검다리 수요란 송전망이 확충되고 산업 구조가 재편되기 전까지 잉여 전력을 소비해 줄 임시·전략적 수요를 의미한다. 지역에서 재생전력으로 가동할 수 있는 산업이나 설비를 유치하고, 전력 소비 시점을 유연하게 조절하여 전력망 혼잡을 완화하는 것이 목표다.


예를 들어, 전력이 남는 시간에 물을 전기분해해 그린 수소를 생산하거나 해수 담수화 플랜트를 운영하는 것이 있다(다만, 현재 그린수소 및 해수담수화는 R&D 실증 단계로 수십 MW 단위에 그쳐 징검다리 수요로 한계가 있다). 또한 데이터센터, 배터리 제조공장, 암호화폐 채굴시설처럼 전력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가동 시점을 조절할 수 있는 산업을 유치해 잉여 전력을 흡수하게 할 수 있다. 추가 수요를 발생시키는 발상은 기존 화석연료 기반 수요를 청정 전력으로 변환하는 탈탄소화에 직접적인 기여는 단기적으로 높지 않다.


다만, 전력망 구축과 지역 대규모 재생에너지 구축 간의 시간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말 그대로 징검다리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미국에서는 2023년 데이터센터가 176TWh의 전력을 소비해 전력 소비의 4.4%를 차지했으며, 2028년까지 두세 배 증가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어, 이러한 대규모 수요처가 잉여 전력 활용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암호화폐 채굴도 미국에서 전력 소비의 0.6%~2.3%를 차지하며, 전력이 남는 시간에 집중해 가동할 수 있어 잠재적 브릿지 수요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산업을 남부 지역에 유치하려면 토지와 인프라 제공, 세제·전기요금 인센티브, 전력 사용 시간에 따른 요금제 등 다양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정책은 다양한 도구를 병행해야 한다. 2024년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은 재생에너지 설비가 집중된 지역에 전력 수요를 분산시키고, 수도권에 집중된 전력 다소비 산업을 지방으로 유도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한전은 수도권 데이터센터 인허가를 제한하고 비수도권 데이터센터에는 전기설비 부담금을 감면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또한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를 도입하여 전력 공급이 풍부한 지역에는 낮은 요금을, 전력이 부족한 지역에는 높은 요금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에 위치한 대기업과 하이테크 산업을 단순히 전기요금 차등만으로 지방으로 이동시키기는 어렵다. 수도권은 인력·교통·물류·인프라가 집중돼 있어 경제적 이점이 여전히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루 홈런’식 대규모 이전보다는, 지역 특성에 맞는 여러 ‘안타’를 쌓아가는 전략이 현실적이다.


또한 재생에너지와 분산형 자원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마이크로그리드와 ESS 지원도 강화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8년까지 1,247개 마이크로그리드 사이트가 구축되었으며, 태양광·풍력과 ESS를 결합해 독립적으로 또는 중앙 그리드와 연계해 전력을 공급하는 구조다. 이러한 시스템은 도서나 농촌 지역에서 송전선 없이도 전력을 공급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 재생에너지 확대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규모와 경제성은 한계가 있으며, 대규모 잉여 전력을 흡수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브릿지 수요는 중장기적 전력망 확충과 분산형 시스템 확대 사이에서 생기는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종합하면, 지방 재생에너지 공급 과잉과 전력 인프라 미연계 문제는 재생에너지 목표를 무한정 상향한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공격적인 목표는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으로서 중요하지만, 전력망 병목과 수요·공급지의 격차가 해소되지 않으면 공허해질 수 있다. 수요지에서는 재생에너지를 가능한 한 많이 깔아 자가소비를 확대해야 하고, 공급지에서는 브릿지 수요를 창출해 잉여 전력을 지역 경제 활성화로 연결해야 한다. 국가 계획과 지자체의 창의적 정책, 산업계와 시민사회의 참여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재생에너지 확대와 탈탄소화 목표가 현실적인 성과로 이어질 것이다.




6.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폭증과 남부 지방 재생에너지 공급의 기회


데이터센터는 디지털 경제의 심장으로서, 최근 몇 년 사이 급증하는 전력 수요의 주범으로 떠올랐다. 특히 AI와 빅데이터 산업의 성장으로 연산 능력을 높인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가 확산되면서, 단일 시설의 전력 소비가 중소 도시 전체와 맞먹는 수준까지 치솟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 중 20%가 전력망 미비로 가동 지연 위험을 안고 있으며, 버지니아·독일 등 주요 클러스터에서는 계통 접속 대기 기간이 평균 7~10년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수도권 역시 전력망 부족으로 2024년부터 신규 데이터센터 전기 공급이 제한되었고, 올해 상반기 착공한 프로젝트가 단 한 곳에 그치는 등 전력 인프라가 포화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국에서는 데이터센터를 부담이 아닌 ‘기회’로 보는 지역이 많다. 전북·전남·경남 등 남부 지방은 풍부한 태양광·풍력 자원을 이용해 지역 내 전력을 남겨두고 있다. 이 잉여 재생전력을 데이터센터에 공급하면 지역 내에서 전력을 생산-소비하는 ‘에너지 고속도로’ 모델을 구축할 수 있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다. 매일경제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분산특구를 통해 중앙집중식 전력 체계가 남부의 전력을 수도권에 전달하는 기존 방식이 사회적 갈등과 재생에너지 변동성으로 한계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고, 분산형 발전을 지역에서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차세대 전력망을 추진하고 있다. 특구에서는 태양광·풍력·연료전지 등 분산형 전원을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가상발전소(VPP)에 통합하여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충전소에 직접 공급하고, 전기차 배터리를 활용한 V2G(차량-그리드)까지 연계한다는 계획이다. 물론, 이런 계획은 방향은 맞지만 실효성 있는 실행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처럼 데이터센터 유치는 재생에너지 활용을 높이고 지역 수익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거론되지만, 몇 가지 현실적 제약도 존재한다. 첫째,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전망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AI 서비스의 확산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지만, 대규모 시설의 투자 결정은 시장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 둘째,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끊김 없는 전력 공급이 필수다. 전력망 병목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상쇄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발전원이 필요하다. 지방에 위치한 데이터센터가 초기에는 가스·LNG 발전이나 소규모 디젤 발전 등의 피크 대응 자산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셋째, 장기적으로는 데이터센터를 RE100(100% 재생에너지) 기반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물리적인 재생전력 공급이 가능할지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전력구매계약(PPA)이나 탄소중립인증 등 금융적 수단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실제 시간대별 전력 생산과 소비를 맞추지 못하면 RE100 목표 달성이 어려울 수 있다.


결론적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폭증은 전력망에 큰 부담을 주지만,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부 지방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만, 가스발전 공급 여력이 데이터센터 유치의 단기적인 주요 요소로 고려될 수밖에 없다. 현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잠재력이 높다고 무조건 데이터 센터 유치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7. 스마트 영농과 농업 전기화 – 전력망 유연성 확보를 위한 부하 자원


농업은 오랫동안 에너지 소비의 주변부로만 인식돼 왔지만, 디지털 전환과 전기화가 본격화되면서 전력망 유연성 확보를 위한 핵심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스마트팜과 정밀 농업 기술의 도입은 농업 현장의 전력 사용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그 사용 패턴을 세밀하게 제어할 수 있게 해준다. 대형 유리온실에서 작물 생장을 촉진하는 LED 보광조명, 온습도 조절용 HVAC 시스템, 양액 공급 펌프, 공기 순환 팬 등은 모두 전기로 구동된다. 이들 부하는 작물의 생장 주기와 일정 부분 독립적으로 운전할 수 있어, 전력 공급 상황에 맞춰 가동 시점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낮에 태양광 발전이 남아돌 때 인공조명을 풀가동하고, 저녁이나 전력 피크 시간에는 조명 밝기를 낮추거나 일시 소등할 수 있다. 논물 관개나 비닐하우스 난방에 사용하는 펌프와 보일러 역시 전력 공급 상황에 따라 가동 시기를 앞당기거나 늦춰, 남는 전기를 흡수하고 피크 부하를 완화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이런 농업 수요반응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례가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의 프로젝트는 농업용 관개 펌프에 IoT 기반 제어장치를 설치하고 가격 신호에 따라 가동을 조절하는 방식을 시험했다. 해당 프로젝트는 2025년까지 40MW의 피크 부하 감소를 달성하고 농업 펌프를 시간대별 전력 가격에 연동해 수 분 내에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기술 개발을 통해 농민들은 관개 요구와 운영 제약을 입력하면 추천 관개 계획을 받아 실행할 수 있으며, 이는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시간으로 펌프 가동을 자동으로 이동시킨다. 이러한 접근은 신재생 확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하를 순식간에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전력망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농업의 전기화와 스마트 영농을 촉진하면 이와 유사한 이점을 기대할 수 있다. 아직도 디젤 엔진에 의존하는 관정 펌프나 농기계를 전기 모터 기반으로 전환하고, 이를 재생에너지 및 ICT 기술과 연계한 스마트 제어를 도입한다면, 농촌 지역에서 남는 태양광·풍력 전력을 흡수하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 태양광 패널 아래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영농형 태양광은 이러한 개념을 잘 보여주는 모델로 평가된다. 낮에는 태양광 설비에서 생산한 전기로 농업용 설비를 가동하고 남는 전력은 판매하며, 전력 피크 시에는 농업용 부하를 일시적으로 낮춰 계통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영농형 태양광은 농지 생산성과 에너지 생산을 동시에 달성해 농가 소득을 높이는 효과도 있으며, 정부는 이러한 사업모델을 분산에너지 특구의 일환으로 육성하고 있다. 태양광 패널 밑에서 자라는 작물은 적절한 차광 효과로 품질이 향상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어, 재생에너지와 식량 생산의 ‘일석이조’ 전략으로 주목받는다.


스마트 영농은 기후 저항성 농업(climate-resilient agriculture)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기후 변화로 폭염·가뭄·한파가 빈발하면서 전통 농업은 생산성과 품질이 불안정해지고 있다. 스마트 온실과 수직농장 같은 고도 환경 제어 시설은 외부 기후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만큼 전기 수요가 크다. 그러나 전력망 관점에서는 이런 설비를 유연 부하로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겨울철 농업 난방을 전기 보일러와 열저장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저장된 열을 밤에 활용하면 전력 피크를 낮출 수 있다. 또한 열 펌프와 축열조를 설치해 낮 시간의 잉여 전력으로 물을 가열·저장한 후 저녁에 난방에 사용하는 방식도 있다. 이런 열저장 기술은 전기 수요를 시간적으로 이동시키며 재생에너지 발전 변동성을 흡수하는 데 효과적이다. 농업용 냉난방 시설과 저장 창고 역시 배터리와 함께 사용하면 주파수 조정과 비상 전력 제공 등 추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스마트 농업을 대규모 유연 수요로 발전시키려면 기술적, 시장적, 정책적 기반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기술 측면에서는 센서와 자동제어 시스템, 에너지 관리 시스템(EMS)이 필요하며, 대용량 열저장·전기저장 설비가 개발돼야 한다. 시장 측면에서는 농업용 전기를 대상으로 하는 수요반응 프로그램과 시간대별 전력요금제를 마련해 농가가 전력 사용 시점을 조절하도록 유도하고, 그 대가로 요금 할인이나 보조금을 제공해야 한다. 정책 측면에서는 영농형 태양광과 스마트팜에 대한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전력망 연계 규정을 개선해 농촌 지역에서도 분산에너지 거래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농업 전기화를 통한 탄소 감축과 기후 적응 효과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탄소시장 참여를 확대하면 농민들에게 추가 수익을 제공할 수 있다.


나아가 농촌 지역의 디지털 전환과 에너지 자립을 연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농촌은 인구 감소와 경제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에너지 전환 시대에는 능동적인 전력 수요 조절자로 거듭날 잠재력이 크다. 스마트 영농과 농촌 분산에너지 정책을 연계해 농업 부문의 전기 부하를 지능적으로 관리하면, 농촌 지역은 재생에너지 생산 거점을 넘어 전력 수급 균형에 기여하는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기후 저항성 농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기존 농업용 에너지 수요를 전기 수요로 전환하며 열저장 등 기술을 활용하여 부하를 이동시킨다면 재생에너지 차단 비율을 낮추고 전력망의 신뢰성을 높이는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8. 암호화폐 채굴의 유연 부하 활용 – 조건부 수용 가능성과 재생전력 혼잡 완화


암호화폐 채굴은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의 보안 인증과 거래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전기를 소비하는 산업이다. 이 때문에 채굴 산업이 탄소 배출을 늘리고 전력망을 압박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채굴 설비의 전력 사용이 매우 탄력적이라는 점에서, 전력망의 유연성을 높이는 잠재적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채굴기(ASIC, GPU)는 전력만 공급되면 24시간 연속으로 작동할 수 있지만, 특정 시간에 반드시 가동해야 하는 엄격한 스케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력 공급 상황에 따라 손쉽게 가동률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어, 에너지 과잉 구간에는 잉여 전력을 흡수하고 공급이 부족하면 빠르게 전력 사용을 줄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암호화폐 채굴을 ‘가상 배터리’에 비유하는 논거가 된다. 낮에 남는 재생전기로 비트코인을 채굴했다가, 전력 피크 시간에는 채굴을 중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력을 저장한 효과를 얻는다는 비유다.

최근 연구와 사례는 채굴의 유연 부하 잠재력을 뒷받침한다. 학술 분석에서는 암호화폐 채굴 부하가 전력시장에 참여하면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의 수익성이 높아지고 잉여 전력의 출력 제한량이 줄어들며, 결과적으로 전기요금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전력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면서도 일정한 기본 부하를 제공하기 때문에, 재생에너지 투자에 경제적 동인을 제공하고 계통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텍사스 전력시장(ERCOT)에서는 2022년부터 large flexible load(LFL) 규정이 도입돼, 피크 수요가 75MW 이상인 데이터센터와 암호화폐 채굴 시설을 대규모 유연 부하로 분류한다. EIA의 2024년 전망에 따르면, ERCOT 내 LFL 고객의 전력 수요는 2024년 대비 60% 증가한 540억 kWh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며, 이는 2025년 ERCOT 총 전력 소비의 약 10%에 해당한다. 이러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ERCOT은 재생에너지 증가와 병행해 LFL 소비자에게 수요반응 참여를 요구하고 있으며, 암호화폐 채굴 시설을 포함한 일부 대규모 부하가 자발적 절전협약을 맺어 고수요 시 전력 소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ERCOT는 LFL 고객이 도매 전력가격이 일정 수준(예: MWh당 100달러)를 초과할 경우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을 가정해 수요 전망을 작성하고 있다. 이러한 계약은 채굴기 운영자가 실시간 가격 신호나 계통 지시에 따라 부하를 줄일 수 있게 해주어, 대규모 컴퓨팅 부하가 전력망 안정성에 기여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암호화폐 채굴 부하를 전력망 유연 자원으로 활용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채굴에 사용되는 전력은 잉여 재생에너지로 제한되어야 한다. 화석연료 기반 전력까지 동원한다면 오히려 온실가스 배출을 늘려 에너지 전환 목표에 역행한다. 따라서 채굴기는 재생에너지 출력이 과잉되는 시간과 지역에서만 가동하고, 전력 수급이 타이트해지면 즉시 전력 사용을 감축하는 운영 규칙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구현하려면 채굴 설비와 전력회사 간 실시간 통신·제어 시스템이 필요하며, 채굴 업계가 전력시장 보조서비스나 급전 지시에 따라 반응하도록 계약상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 또한 계통 영향 평가를 통해 지역별 공급 능력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채굴시설을 허가해야 한다. 예컨대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부 지역에 채굴 부하를 집중시켜 송전망 혼잡을 완충하되, 지역의 다른 전력 수요를 잠식하지 않도록 총량을 관리해야 한다. 사업자에게는 망 이용료나 계통 보강 비용을 일부 부담시키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투명한 정책과 적절한 규제가 중요하다. 암호화폐 채굴은 가격 변동성이 높고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일 수 있으며, 자금세탁이나 전력 과소비 논란이 뒤따를 수 있다. 따라서 지방정부와 전력당국은 채굴 시설의 위치와 규모, 전력 사용량, 탄소 배출 감축 효과 등을 면밀히 검토한 후 허가를 내주어야 한다. 또한 채굴 산업이 갑작스레 붕괴하거나 규제 강화로 사업이 철수하는 경우에 대비해, 부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다른 유연 자원을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채굴 부하를 지역 사회 발전과 연계해, 예를 들어 채굴 수익의 일부를 지역 재생에너지 투자에 재투자하는 구조를 마련한다면 주민 수용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암호화폐 채굴 부하는 재생전력 혼잡 문제를 완화하고 전력망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할 잠재력이 있는 새로운 퍼즐 조각이다. 잉여 재생전력이 공급을 초과하는 시간에는 채굴기로 흡수해 발전소 출력 제한을 줄이고, 전력 수요가 급증할 때는 채굴을 중단해 전력을 확보함으로써 가상 발전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부 수용은 잉여 재생에너지 사용, 실시간 제어 시스템 구축, 엄격한 인허가 및 총량 관리, 사회적 합의와 투명한 규제를 충족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 암호화폐 채굴 부하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안정성을 돕는 유연 부하 자원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9. 갈등 조정과 비용 분담 – 공정성 확보를 위한 사회적 설계


에너지 전환은 기술적 도전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과 공정성 문제를 수반한다. 대규모 송전망 확충과 재생에너지 설비 확대는 특정 지역의 환경·경관에 영향을 미치고, 토지권·건강권 우려를 불러일으키며, 혜택은 먼 지역에 돌아가는 일이 많다. 이런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에너지 전환이 “정의로운 전환”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낳았다. 즉,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편익을 공정하게 분담하고, 갈등을 최소화하는 제도적 설계를 마련해야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투명한 정보 공개와 주민 참여다. 과거 밀양 송전탑 사태와 같은 갈등은 충분한 정보 공유와 주민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악화됐다. 독일과 영국 등은 송전망 계획 단계부터 주민 설명회와 의견수렴을 법제화해 입지 선정과 환경영향 완화 방안을 함께 모색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나라도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시행 과정에서 공청회와 주민 협의회를 통해 각계 의견을 듣고, 지역별 갈등 조정협의회를 상설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분산에너지 특구 논의에서 나타났듯이 지방정부와 지역 전력회사는 경쟁력 있는 전기요금으로 데이터센터 유치에 나서고, 잉여 전력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방안을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의 협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 이익 공유와 피해 보상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이나 송전선로가 설치되는 지역 주민들이 실질적인 수혜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밀양 사례에서 가구당 400만원의 보상과 태양광 마을 지원이 사후에 제공됐지만, 사전에 이익 공유 구조가 있었다면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독일에서는 풍력발전소 수익의 일부를 지역 주민에게 배당하거나, 프로젝트 지분에 주민이 참여하는 모델이 활성화되어 있다. 국내에서도 재생에너지 사업자가 발전 수익의 일정 비율을 지방자치단체나 주민 협동조합과 공유하는 이익공유형 모델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보상보다는 지역 사업을 통한 지속적인 수익 창출이 유인책이 될 수 있다. 전력망이 지나가는 경로의 대규모 재생에너지 접속 우선 순위를 높이거나 차단(Curtailment) 회피에서 우선순위를 높이는 방식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영농형 태양광과 같이 농가 소득을 증가시키고 전력 생산을 병행하는 모델은 지역민의 수용성을 높이는 좋은 사례다. 현재, 영농형 태양광은 지역에서의 이익 갈등 이슈에 직면해 있는데 토지 보유자와 임차농 간 이익 조정을 제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공정한 비용 분담과 에너지 정의가 중요하다. 송전망 투자와 재생에너지 확대 비용을 전기 소비자에게 균등하게 전가할지, 아니면 수혜지역이나 대기업에 더 부담시킬지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서울의 전력 자급률은 약 9%에 불과한 반면 경남·전남 등 발전 지역은 송전선과 발전시설 부담을 지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전국 단일 전기요금제가 정의로운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온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를 도입해 발전소가 있는 지역에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대규모 전력 소비지를 중심으로 송전망 투자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또 데이터센터나 반도체 공장 등 대규모 전력 수요시설에 대한 전력계통 영향 평가를 강화해, 필요 시 계통 증설 비용을 해당 기업이 부담하도록 하는 것도 고려된다.


마지막으로, 갈등 예방·조정 기구의 상설화가 필요하다. 송전선 건설이나 대형 발전소 건립은 갈등 소지가 크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중립적인 갈등조정위원회나 전문 기구가 상시적으로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역 대표와 시민사회, 전문가가 함께 참여해 중재와 협상을 이끌어야 하며, 갈등을 사전에 진단하고 예방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분산특구 추진과정에서도 주민·지자체·전문가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운영해 지역 맞춤형 해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기술적 성숙도가 높지 않지만 추후 기술발전에 따라 재생에너지 잉여 전력을 수소나 열로 전환해 사용하는 섹터커플링과 같은 새로운 사업 모델도 주민과 공유하고 합의를 얻어야 한다.


결국 에너지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려면 공정성과 사회적 신뢰가 핵심이다. 특정 지역이나 계층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접근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공정한 비용 분담, 투명한 정보 공개, 주민 참여, 이익 공유, 갈등 관리 제도의 체계화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각 지역과 이해관계자들이 스스로를 에너지 전환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협력할 때, 에너지 전환은 더 견고하고 포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10. 결론: 한 조각씩 확실성을 쌓아 완성하는 에너지 전환 퍼즐


에너지 전환을 둘러싼 우리의 여정은 거대한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한 조각을 맞추면 또 다른 조각의 모양이 보이고, 각각의 조각은 서로 다른 색깔과 패턴을 갖고 있어, 한눈에 전체를 완성하기 어렵다. 이번 보고서에서 살펴본 태양광 발전과 전력망 인프라의 시간적 불일치, 지방에서 과잉 생산되는 재생에너지와 수도권 중심의 수요 불균형, 기업들의 RE100 이행에 따른 전력 수급 문제, 전력망 확충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제도 개선 필요성, 데이터센터·암호화폐 채굴·스마트농업·지역 산업화 등을 통한 유연 수요 창출, 그리고 비용 분담과 정의로운 전환 논쟁까지 모든 이슈는 이 퍼즐의 중요한 조각이다. 각각은 독립적으로 복잡한 문제이지만,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조각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하려면, 모든 조각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 끼워 넣는 세심함과, 전체 그림을 동시에 바라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우선 송전망과 재생에너지 발전의 엇박자 문제는 에너지 전환의 근본적 제약을 보여준다. 지방의 풍력, 태양광 발전은 빠르게 늘어나지만, 이를 수도권으로 전송할 송전선 증설은 물리적 장시간 소요와 함께 주민 반대와 비용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장 등 에너지 집약적 산업이 수도권에 몰려 있어 전력 수요 집중을 심화시키고 있다. 전력망의 시간적 병목을 해소하지 못하면, 정부가 아무리 공격적인 재생에너지 목표를 세워도 공급을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분산에너지 특별법과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처럼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고, 전력망 투자와 인허가 절차의 효율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주민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소통과 공론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수도권 주민들도 전력망 확충의 혜택과 비용을 함께 인식해야 한다. 누군가는 송전탑을 옆집에 지어야 하고, 누군가는 (깨끗한) 전기를 공급받는 구조에서는 상대적인 공정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결국, 전력 인프라는 영역 밖으로 둔 수요자가 큰 비용을 분담할 수밖에 없다.


재생에너지의 지역 간 수급 불균형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남부 지방의 풍력과 태양광 발전량은 이미 해당 지역 수요를 넘고, 장래에는 더 많은 잉여 전력이 발생할 전망이다. 과거에는 단순히 남는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낼 송전선을 더 깔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것만으로는 갈등과 경제적 비효율을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데이터센터, 스마트농업, 암호화폐 채굴 등 징검다리 수요를 지역에 유치해 잉여 전기를 활용하는 방안이 제안됐다. 이들 산업은 전력 소비 시점을 조절할 수 있어 남는 전기를 흡수하고, 필요하면 즉시 가동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도 조건이 있다. 스마트농업은 초기 투자비와 시장 리스크가 높아 장기적 정책지원과 기술개발이 필요하다. 암호화폐 채굴은 투기성, 규제 리스크, 에너지 투명성 논란을 안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을 요구해 초기에는 가스발전 등 화석연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책 설계자는 이들 유연 수요가 재생에너지 확대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제도적 틀과 인센티브를 정교하게 짜야 한다.

기업들의 RE100 이행과 관련해서는, 재생에너지 시장과 제도적 인프라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업 경쟁력이 위협받을 수 있다. 글로벌 공급망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기준과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중요하게 본다. 우리 기업이 RE100에 참여하지 못하면 수출 시장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PPA 계약을 체결하려 해도, 전력망 용량 부족과 전력망 이용요금 구조, 규제 장벽 등 현실적인 장애물을 마주한다. 한전과 정부는 RE100 전용 전력망이나 전력시장 제도를 개선해 기업이 원하는 만큼 재생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도록 돕고, 동시에 전력망 안정성을 보장하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또한 전력망 확충과 에너지 인프라 사업을 둘러싼 갈등 조정과 비용 분담 문제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의 핵심이다. 송전선이나 변전소 건설로 피해를 보는 지역 주민들에게 충분한 정보와 보상이 제공되어야 하고, 이익 공유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발전소와 송전선이 들어서는 지역에 더 큰 재정적 지원과 지역 발전기금을 제공하고, 발전 수익의 일부를 주민에게 돌려주는 모델을 제시한다. 전기요금 체계도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의 비용과 혜택을 반영하도록 개편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에서 더 많은 전기를 소비하면서도 요금은 전국 평균에 묶여 있다면, 지방 주민들이 느끼는 불공정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역별 차등 요금과 망 이용료, 대규모 전력수요 기업의 계통 부담금 등 다양한 방안을 조합해 공정한 비용 분담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농업·산업 부문의 유연 부하화 역시 중요한 퍼즐 조각이다. 스마트팜과 전기화된 농기계, 열·전력 저장 기술을 활용해 농업 부하를 전력망 상황에 맞춰 조절하면, 남는 전기를 흡수하고 피크 부하를 줄일 수 있다. 산업 측면에서는 공장들이 에너지저장장치와 가상발전소에 참여해 수요를 조절하고, 전력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 개발과 투자, 시장 제도, 가격 신호가 모두 뒷받침되어야 한다. 암호화폐 채굴처럼 논란이 있는 산업도 잘 설계하면 유연 부하로 활용할 수 있다. 텍사스 등지에서 채굴업체가 자발적으로 급전 지시에 참여해 전력망 안정에 기여한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다만, 재생에너지 과잉 시에만 채굴을 허용하는 정책과 더불어 철저한 인허가 및 총량 관리가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전환 과정의 징검다리이자 유연 부하의 확장 측면에서의 고려사항이지 정책의 주안점이 돼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조각을 맞추는 과정에서 정부, 산업계, 지방자치단체, 시민사회가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정부는 투명한 정보 제공과 이해관계자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고, 갈등 조정기구를 상설화해 중립적인 조정 역할을 해야 한다. 갈등 조정기구는 가급적 높은 층위에 위치할 필요가 있으며, 조정의 과정과 결과를 투명하게, 접근성이 용이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기업은 재생에너지 사용 확대와 에너지 효율 개선을 위한 혁신에 투자하고,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는 지역 특성에 맞는 에너지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운영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닌 이익을 최대화하며,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에 대해 비교적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 시기다. 하지만 공감대만으로는 부족하다.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불확실성과 어려움을 해결할 구체적 방안과 실행력이 필요하다. 각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고 나면, 비로서 우리는 다음 조각을 맞출 수 있다. 병목 지점을 해소하고, 수급 불균형을 줄이며, RE100과 같은 기업 과제를 해결하고, 농업·산업·IT 부문의 유연 부하를 확대하고, 정의로운 전환 원칙에 기반한 갈등 조정과 비용 분담 모델을 마련하는 것. 이 모든 작은 성공과 확실성이 쌓이면, 우리는 탄소중립 사회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될 것이다. 결국 에너지 전환의 퍼즐은 단순히 기술과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공정성,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함께 고려하는 종합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접근을 통해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길만이, 우리의 에너지 미래를 개척하는 방향이다.



참고문헌


매일경제, “AI 데이터센터·에너지고속도로 … 미래산업 인프라에 50조 투입” (2024년).

월간수소경제, “버려지는 재생에너지 전력, 수소로 저장한다” (2024년).

에너지데일리, “[해설] 전력망 특별법 시행 임박…‘에너지 고속도로’의 기회와 과제” (2024년).

이투뉴스, “영농형 태양광은 농가소득과 재생에너지 확대 동시 충족” (2024년).

환경일보, “재생에너지 확대, 주민참여는 필수” (2024년).

뉴시스, “수도권 데이터 센터 공급 급감…개발 제한·지역 반대 영향” (2024년).

단비뉴스, “강력한 탈탄소 정책과 기후정의 함께 가야” (2024년).

에너지프라수머, “[칼럼] 이재명 정부 탄소중립의 미래, ‘기업 살리는 길’로” (2024년).

전기신문, “올바른 에너지정책, 차기정부에 바란다” (2024년).

프레시안, “전력망 확충, 주민참여와 비용 분담의 공정성이 중요하다” (2024년).


International Energy Agency (IEA), Electricity Market Report 2024.

IEA, Renewables 2024.

IEA, World Energy Outlook 2023/2024.

National Renewable Energy Laboratory (NREL), Battery Energy Storage Systems: Applications and Operational Benefits.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EIA), “Data centers and cryptocurrency mining in Texas drive strong power demand growth” (Today in Energy, 2024).

Institute for Energy Economics and Financial Analysis (IEEFA), South Korea’s Energy Transition: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MIT Center for Energy and Environmental Policy Research, Long‑Distance Transmission and Renewable Energy Integration.

Brattle Group & GridLab, California’s Virtual Power Potential (Technical Appendix, 2024).

Clean Energy Ministerial, Battery Storage Unlocked: Lessons Learned from Emerging Economies (2024).

U.S. Department of Energy (DOE) / California Energy Commission, Accelerated Deployment of Irrigation Pumping Demand Flexibility (project overview, 2021–2025).

Institute for Energy Economics and Financial Analysis (IEEFA), South Korea’s Economy Risks Missing Out on Global Transition to Renewables

Energy Policy Research Group, University of Cambridge, In Search of Good Energy Policy(2019)


keyword
작가의 이전글좋은 에너지 정책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