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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의 순간

제주도 재생에너지 전력수요 100% 달성.

by The Surplus Square

1.2022년 5월 8일, 캘리포니아

2022년 5월 8일, 오후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끝없이 내리쬐는 햇살 아래 수평선처럼 펼쳐진 태양광 패널들이 반짝였고, 살랑이는 바람은 풍력 터빈의 거대한 날개를 조용히 돌리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만큼은 캘리포니아 전역의 전기는 온전히 자연에서 온 힘으로 충당되었다. 캘리포니아 시민들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한 장면이 마침내 현실 속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오후 2시 50분, 캘리포니아 전력망 운영센터 모니터에는 믿기 어려운 지표가 찍혔다. 재생에너지만으로 전력 수요의 100%를 넘게 공급하는 경이로운 기록이 세워진 것이다.


조용하지만 혁명적인 이 성취를 마주한 캘리포니아의 전력 엔지니어들과 정책입안자들은 잠시 숨을 죽인 채 그래프를 지켜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마치 미래의 한 조각을 손으로 만져본 듯한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한 관계자는 “한 시간 해냈다면, 머지않아 더 긴 시간도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그 날을 기다린 시민들은 트위터(현재 X)에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는 글을 올렸다. 그날의 햇빛과 바람은 단순히 전기를 만들어낸 것을 넘어, 에너지 전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의 등불을 환하게 밝힌 셈이다.


https://www.npr.org/2022/05/07/1097376890/for-a-brief-moment-calif-fully-powered-itself-with-renewable-energy?fbclid=IwY2xjawJtz-pleHRuA2FlbQIxMAABHoUScdQT17cOFW_HT8HYD4HjyjpRmPfI_FDEdNyHiyZlNtI7dsL0ZFyELzDr_aem_OQo0sGovMYZGqtfUD13fNw


2. 2025년, 달라진 캘리포니아의 전력 지형

캘리포니아에서 재생에너지는 이제 더 이상 주변적인 에너지원이 아니다. 2025년 현재, 이 주의 전력 공급 양상은 불과 몇십 년 전과 견줘보면 판이하게 달라졌다. 절반이 넘는 전력이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와 대형 수력, 그리고 극소수 남은 원자력 발전으로 생산되고 있다. 사막 지대에는 태양광 패널이 바다처럼 깔려 있고, 산악지대 능선마다 거대한 풍력 터빈들이 늘어서서 회전하고 있다. 한때 전력의 중추를 담당했던 천연가스 발전소들과 석탄 화력발전소들은 이제 대부분 보조적인 역할로 밀려나 전력 무대의 뒤편으로 물러서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오랜 정책 노력과 투자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2010년대에 캘리포니아는 2045년까지 전력을 100% 청정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야심 찬 법안을 통과시켰고, 그 후 태양광과 풍력 설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이제 봄이면 하루 중 상당 시간 동안 전력 수요를 태양과 바람만으로 충당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실제로 2024년 봄에는 거의 매일 같이 전력 소비의 일부를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는 기록이 이어졌다. 흥분하는 사람도 없고, 그냥 일상이 되버렸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상상 속 그림에 불과했던 장면들이 이제 전력망의 새로운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단지 발전원의 비중만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전력 시스템의 운영 방식 자체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예를 들어, 남아도는 한낮의 태양광 전기를 저장하기 위해 곳곳에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즉 거대한 배터리 설비들이 설치되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캘리포니아의 배터리 저장 용량은 전에 비해 스무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제 해질녘이 되면 낮에 남은 태양의 전기가 이 거대한 배터리들을 통해 흘러나와 전력망을 지탱해 준다. 전력 수요 양상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전기차 보급과 더불어 가정과 기업들은 전기가 남는 낮시간에 전기 사용을 늘리고, 해가 진 이후 피크 시간대에는 일부러 소비를 줄이는 새로운 패턴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이렇듯 캘리포니아의 전력망은 점차 유연하고 영리해지고 있다. 변화의 씨앗이 뿌려진 지 몇십 년, 이제 그 열매가 곳곳에서 맺히고 있는 셈이다.


3.100%의 순간들, 그리고 제주도.

캘리포니아의 100% 달성은 특별한 사건이지만, 결코 세상에 하나뿐인 이야기는 아니다. 지구 반대편과 주변 여러 나라들에서도 이미 재생에너지가 수요를 넘어서는 역사적인 순간들이 포착되었다. 각기 다른 자원과 조건 속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이는 모두 인류의 에너지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2018년 새해 첫날 이른 아침에 재생에너지로 거의 전력 전부를 공급한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새벽 6시 무렵, 밤새 북해에서 불어온 강풍 덕분에 풍력 발전량이 독일 전국의 전력 수요를 100% 가까이 충당했던 것이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태양광은 없었지만, 풍력에 수력과 바이오매스 발전까지 더해져 전력을 남길 정도가 되자, 독일 전력 도매가격은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공짜로 전기를 주고도 남아서, 오히려 돈을 얹어주며 전기를 팔 정도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마이너스(-) 가격이 실제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남는 전기는 실시간으로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들로 흘러갔고, 그 순간 석탄과 원자력 발전소들은 출력을 최소로 낮춘 채 조용히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 알아채지 못한 새벽의 짧은 에피소드였지만, 에너지 전문가들은 그 장면을 두고 “재생에너지가 중심이 될 새 시대의 예고편”이라고 평했다.


덴마크에서는 2015년 7월의 어느 날, 거센 바람 덕분에 풍력 발전량이 국내 전력 수요의 100%를 훌쩍 넘는 일이 벌어졌다. 저녁 시간에 풍력이 국내 수요의 약 116%에 해당하는 전기를 생산했고, 심야에 전력 수요가 더욱 줄자 그 비율은 140%까지 치솟았다. 덴마크는 이 남는 전력의 대부분을 해저 케이블을 통해 노르웨이로 보내어 수력 댐에 물을 가두는 방식으로 저장했고, 일부는 스웨덴과 독일 등으로 수출했다. 풍차의 나라답게 일찍부터 과감한 풍력 투자와 정책 지원을 이어온 덴마크였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국내 수요를 100% 넘긴 풍력 전력은 이웃과 실시간으로 거래되거나 저장되며, 국경을 초월한 재생에너지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일은 “100% 재생에너지로도 전력망을 굴릴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남서유럽의 포르투갈도 인상적인 기록을 세웠다. 2023년 늦가을, 포르투갈은 무려 6일 연속으로 재생에너지 전력만으로 전국 전력을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바람이 연일 강하게 불고 비가 충분히 내려서, 풍력 터빈과 수력 발전 댐들이 거의 일주일 내내 풀가동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이어진 약 149시간 동안, 포르투갈의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전력 수요를 계속해서 초과했다. 화력발전소는 단 한 대도 필요 없었고, 오히려 남는 전력이 발생해 스페인으로 수출되었다. 태양광 비중이 높은 스페인과 달리 풍력·수력이 중심인 포르투갈은, 자연조건의 이점을 최대로 살리고 정부의 꾸준한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펼친 덕분에 이런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작은 나라일지라도 풍부한 자원과 지혜로운 정책이 뒷받침된다면 재생에너지 100%의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그리고 2025년 4월 14일, 제주도가 몇 년 늦었지만 대한민국 최초로 재생에너지 드디어 100%의 순간을 경험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기념할만한 순간이며 기대와 과제를 동시에 던져준다.


https://www.yna.co.kr/view/AKR20250416072800056


4. 바람·햇빛과 춤추기 위한 유연성 자원

이제 전력망 운영의 화두는 단연 유연성(flexibility)이다. 바뀐 전력 환경에서 전력망은 더 이상 언제나 일정한 출력을 내는 발전기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 대신 시시각각 출력이 변하는 바람과 햇빛의 리듬에 맞춰 춤추듯 대응해야 한다. 갑자기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잠잠해지면 수백만 가구에 전기를 공급하던 출력이 순식간에 줄어들 수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출렁이는 에너지 흐름 속에서도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려면, 필요할 때 신속히 전력을 보탤 수 있고 남으면 끌어안아 저장할 수 있는 새로운 역할의 자원들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여러 종류의 유연성 자원들이다. 우선, 가장 전통적인 유연성 자원으로 천연가스 발전소를 들 수 있다. 현대식 가스 발전 터빈은 출력 조절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일종의 전력망 소방수 역할을 한다. 갑작스레 구름이 몰려와 태양광 출력이 떨어지거나, 무풍으로 풍력 발전이 줄어드는 경우 가스발전기는 재빨리 출력을 올려 부족해진 전력을 메워준다. 태양이 진 후 저녁 시간대나 한밤중 풍력이 잠잠한 시간에 여전히 가스 발전이 가동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완전히 재생에너지로 대체되지 못한 과도기 동안, 가스발전은 여전히 즉각 대응용 백업으로서 소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다만, 가스발전 역시 석탄보다는 적지만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징검다리 자원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 가스발전을 수소터빈으로 전환하는 형태가 제안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기술 혁신이 더 많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중요한 유연성 자원은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즉 대용량 배터리 설비이다. 태양광과 풍력이 넘치는 시간에 남는 전기를 저장해 두었다가 부족한 시간에 꺼내 쓰는 시간 이동의 마법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들이다. 이전에는 한낮에 남는 전기가 그저 버려지거나 생산 자체를 줄여야 했지만, 이제는 거대한 배터리 팩들이 남는 전력을 받아 충전해둔다. 그리고 해가 진 뒤풍력 발전이 주춤할 때 그 전기를 다시 방출하여 전력 공급을 메운다. 배터리 기술은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가격도 많이 내려가 전 세계적으로 설치가 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도 몇 년 새 거대한 배터리 농장들이 여럿 들어섰고, 그 결과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완충하는 핵심 열쇠가 되고 있다. 배터리는 전력망의 보조 배터리나 다름없어서, 전력을 저장했다 필요할 때 내놓는 능력은 재생에너지 시대에 점점 더 귀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전기를 충분히 저장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라는 통념에서 “충분히 저장해서, 활용할 수 있다”가 구현된다면 재생에너지 100%로 가동되는 전력시스템도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물론, 아직은 신뢰성, 경제성 측면에서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기술혁신과 경제성이 이어질 때,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세 번째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수요반응(Demand Response)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가스발전이나 배터리가 공급 측면의 유연성이라면, 수요반응은 전력 소비를 능동적으로 조절하는 수요 측면의 유연성이다. 이는 일상의 많은 전기기기들을 지능적으로 제어하여 전력 수요 곡선을 바꾸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수만 대의 가정용 에어컨이 전력망 신호에 따라 한꺼번에 설정온도를 몇 도 올리거나, 대형 냉동창고들이 압축기를 잠시 가동 중단한다면 그 순간 전력 수요가 크게 줄어든다. 물론, 산업용 대형 부하가 생산계획을 전력 수급 상황에 따라 조절한다면 매우 훌륭한 수요자원이 될 수 있다. 조금 더 상상하면, 미래의 공장은 자율 로봇 제조 기반으로 이뤄질 것이다. 이 때, 중요한 제약 혹은 요구사항은 전기 공급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생산 스케줄을 변동하는 것이다. 전기를 쓰지 않고 다른 시간 데로 작업을 옮기는 형태만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이미 대형 사업장, 공장의 경우 수급 상황에 따라 사용 전력량을 조절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확대되고 보다 보편화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우리 다수는 자동차를 탄다. 전기차의 전체 비중이 10%를 넘어 20%, 30%를 차지하는 시점이 온다면, 전기차의 배터리팩은 꽤 훌륭한 전력저장, 발전 설비가 될 수 있다. 전력이 남아도는 시간대에는 전기차들이 자동으로 충전을 시작하고, 남는 전기를 소비하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전기 소비자들이 전력 공급의 리듬에 발맞춰 사용 패턴을 바꾸는 것이 바로 수요반응이다. 스마트 계량기 보급과 IoT 기술 발전으로 이제 가정이나 공장도 전력망 신호에 실시간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나라에서 수요반응 프로그램이 운영되거나 도입될 준비를 하고 있다. 수요반응은 전력망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배터리라고도 불린다. 생산 측면의 저장은 아니지만, 쓰지 않고 아껴둔 전기는 그만큼 저장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경제성, 신뢰성 측면에서 양수발전 역시 매우 훌륭한 전력저장 시설이다. 다만, 지형적 제약이 있고 우리는 양수발전에서도 여건이 좋은 국가는 아닐 뿐이다.)


결국 태양과 바람이 빚어내는 변덕스러운 리듬에 맞춰 전력망이 안정적으로 춤추기 위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유연성의 도구들이 필요하다. 유연성 자원들은 재생에너지의 일시적 출렁임을 흡수하는 완충재 역할을 하고, 그 덕분에 전력망은 안정과 친환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이러한 유연한 대응 수단이 충분치 않다면, 값은 싸도 버려야 하는 전기가 많아지고 아무리 재생에너지 설비를 늘려도 활용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전력망은 더 많은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뿐 아니라, 더 영리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조저장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 눈에는 발전기가 늘어나는 모습만 보이지만, 그 뒤에서 함께 성장하는 유연성 자원들이야말로 100% 청정에너지 시대의 숨은 주역이라 할 수 있다.


5. 재생에너지 시대를 위한 시장과 제도의 변화

이제 남은 과제는 기술 이상으로 제도와 시장의 혁신이다. 전통적인 전력시장은 대규모 화력이나 원자력 발전소처럼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공급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는 구조였고, 가격 신호도 주로 연료비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가 전력 공급의 중심축이 되자 이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태양과 바람은 인위적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없는 공급자원이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전기가 넘칠 때와 부족할 때가 뚜렷해졌고,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전력시장 운영 방식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필요해졌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전력시장과 정책적 장치를 재설계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우선, 태양광·풍력 발전량이 많은 시간대와 그렇지 않은 시간대에 정확한 가격 신호를 주기 위해 실시간 전력거래를 세분화하고 활성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격 결정을 1시간 단위에서 5분 단위까지 세밀하게 하고, 전력 부족 시 가격 상한을 높여 희소가치를 제대로 반영하는 식이다. 연료비 가격이 전기가격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수요와 공급, 상황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새로운 가격결정 방식이 실시간 가격의 기준이 된다.


또 전력이 남아돌 때 가격이 0원 밑으로 떨어질 수 있도록 허용하여 발전사업자들이 자발적으로 출력을 낮추거나 저장에 투자하도록 유도한다. 이 러한 시장 가격 신호는 남는 전기를 저장하거나 소비를 늘리는 유인, 부족한 전기를 끌어오는 유인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 태양광이 많은 낮에 전기요금이 거의 공짜가 되면 산업체들은 그 시간에 가동률을 높이고, 소비자들은 전기차를 충전하며, 잉여 전기는 배터리에 저장된다.

반대로 해가 지고 수요가 몰리는 저녁에는 전기요금이 상승하여 저장했던 전기를 방출하고 추가 발전기를 돌릴 경제적 동기가 생기지요. 재생에너지의 등락에 연동되는 가격 신호를 분명히 함으로써, 시장 스스로 수급을 맞추도록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가격이 세분화되고, 가격을 결정하는 지점(물리적인 지역)이 많을수록 복잡성은 커지겠지만 경제적 효율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에너지 가격 신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태양광과 풍력이 너무나 값싸게 많은 전기를 쏟아낼 때 정작 필요할 때 가동될 발전소들이 적자를 견디지 못해 문을 닫는다면, 전력 공급의 안전망이 사라져버린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용량시장(capacity market) 혹은 용량요금제이다. 쉽게 말해, 실제로 생산한 전력뿐 아니라 필요할 때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도 가치를 매겨주는 시장이다. 여러 나라에서 발전소나 저장장치가 대기 상태를 유지해주기만 해도 별도의 보상을 해주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제도적 변화도 빠질 수 없다. 분산 전원 시대를 맞아 전력망 운영 규칙과 인프라 투자 방향이 바뀌고 있다. 예컨대 옥상 태양광이나 마을 풍력처럼 작은 단위의 발전기가 수십만 개에 달하는 세상에서는, 송배전 운영체계와 요금제도 과거와 달라진 원칙이 필요하다. 전기를 일방향으로 흘려보내던 전통적 방식 대신, 쌍방향 흐름을 관리하는 스마트 그리드 기술이 도입되고 있고, 배전망 단계에서부터 지역 단위로 생산과 소비를 조율하는 마이크로그리드 개념도 등장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활용은 분산화된 여러 자원의 운영과 거래를 더욱 신뢰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동인이 된다.


전력회사의 사업 모델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최대한 많은 전기를 팔아 이윤을 내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전력 공급의 안정적 관리와 서비스에 무게중심을 두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전력 소비자들 역시 더 이상 수동적인 고객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수요반응이나 가정용 태양광·배터리 등을 통해 적극적인 참여자로 거듭나고 있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를 법제화하고 장기적 비전을 제시함과 동시에, 새로운 기술과 자원을 위한 유인책과 규제 완화를 병행해야 한다. 시장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한편, 시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취약 부분은 정책으로 메워야 한다. 때로는 전력 위기가 닥칠 경우 공공이 개입해 수급을 조정할 수 있는 비상계획도 필요하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결국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쓴 이야기는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다수 선진국(미국, 유럽)과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공공재’ 성격의 전기라는 개념이 지나칠 정도 중력과 같은 개념으로 박혀 있고, 한전은 비싸고 더러운 전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200조가 넘는 부채에 재무적으로 완전히 망가진 상황이다. 연료비에 연동되어 전기가격이 결정되는 상식적인 요금체계는 여야, 보수-진보할 것 없이 정치적으로 부담되는 제도이며, 조금씩/꾸준히 오른 산업용 전기요금은 기업들 입장에서는 “부담이 된다”고 아우성이다.


6.소결

2025년 4월 14일, 제주도의 첫 100% 재생에너지의 순간은 이 거대한 변화의 한 축소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간 그 순간은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제 인류는 그 한 순간을 하루로, 한 달로, 또 일년으로 이어나가야 할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문득 찾아온 변화의 징후를 붙잡고 마음속에 조용한 다짐을 할 수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100%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태양은 내일도 떠오르고 바람은 불 것이며, 우리가 새로운 에너지 활용법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에너지 미래의 모습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록, 원자력 발전은?>

재생에너지의 눈부신 성장 이면에는 기존 발전원들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이 대량의 전기를 쏟아내는 한낮이 되면 전력 도매시장의 가격은 큰 폭으로 떨어지거나 심지어 마이너스(-) 구간으로 진입하기도 한다. 전기를 팔고 오히려 돈을 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전기값이 낮아지는 시간대가 자주 찾아오면, 석탄이나 원자력 같은 전통적인 기저부하 발전소들은 경제적인 입지가 흔들리게 된다.


한 번 가동을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운 이 거대한 설비들은, 설령 전기가 남아돌아도 출력을 빠르게 줄이기가 어렵다. 그 결과 전기가 남는 시간에도 생산을 계속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돈을 물어주면서 전력을 판매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다. 유연성이 없는 발전원은 출력을 낮출 수 없고 이는 경제성이 더 높은 자원의 출력을 낮춰야 하는 상황이 온다.


실제로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진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는, 풍력이 강하게 불었던 날 전력시장 가격이 마이너스(-)가 되는 바람에 원자력 발전소 운영사들이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본 사례도 다수 보고되고 있다. 값싼 태양광과 풍력이 한낮 전력시장을 장악하는 추세가 뚜렷해질수록, 높은 고정비와 경직된 출력을 가진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은 점차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생에너지와의 정합성은 부족하지만) 원자력 발전 역시 안정적 공급원이자 탈탄소 발전원으로 그 필요를 인정받는다. 인공지능의 시대, 전력공급력 확장은 원자력의 새로운 확장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워준다. 그러나 현재의 전력수요 부족에 대한 우려는 2030년까지 빠르게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를 구축해야 하는 일부 빅테크 중심의 이슈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5년 이내 빠른 대응을 요구하며, 이는 기존 발전자원의 활용과 가스발전 추가, 재생에너지원 활용이라는 현실적 수단 중심으로 단기적 대응이 이뤄질 것이다.


오히려 원자력 발전은 노후화된(그러나 최근 전력수요 폭증으로 수명이 일부 연장된) 석탄발전이 대거 문을 닫을 10년~15년 후 상황에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노후 원자력 발전에 대한 교체 수요와 함께 석탄발전 폐쇄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대체 청정자원으로 가능성이 상존한다. 탈탄소 발전의 포트폴리오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추진의 필요성은 인정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새로운 원자력은 유연성을 갖춰야 하며, 이는 SMR 중심으로 논의가 되고 있다. SMR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고 또다른 대안으로 부상할 것인가는 2030년은 되어야 시장에서 확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원자력 발전 기술, 산업 생태계는 기술력을 다지고,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통해 투명성과 신뢰성을 획득한다면 2030년 전후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출을 통한 해외시장 개척과 국민신뢰 강화라는 선순환 고리가 형성된다면 국내에서의 확장과 사용후 핵연료 처리 역시 과거보다는 용이하게 진행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에서처럼 원자력 우선주의는 희미한 개념이 되었고 기술, 경제, 시장, 그리고 사회 관점에서 경쟁력을 스스로 찾아야하는 중요 기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대형 경수로 발전이 신규 착공된다면, 전력수요에 대한 대응 측면에서 원자력에게 새로운 기회가 도래했다는 신호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장 실패의 표상인 미국에서의 원자력이 실제로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는 미약하다. 정책의 의지와 가능성이 과거보다 높아졌다 정도는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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