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업무 분석 결과
올 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모르는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지 궁금해 시작한 대학원 생활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중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업"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직업적으로 무엇을 잘하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에 대한 고민을 이토록 오래 깊게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같은 해에 석사과정에서 박사과정으로 이름만 달라졌을 뿐인데 "박사"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인지 어떤 주제가 주어졌을 때 훨씬 더 근거 있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는 중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게 이런 말일까 싶다.
이러쿵저러쿵 가십에 휘둘리며 살아온 가볍기 그지없던 시절도 있었고 눈꼬리와 어깨를 치켜들고 뽕으로 살던 시절도 있었다.
40이 넘어가니 세상이 귀찮아진다고 생각했는데 귀찮은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이 나에게 원하는 역할로부터의 자유로움을 갈망했고 굴레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끊임없이 해온 나는 과거의 나를 벗어버리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것 같다.
그중 하나가 직업에 대한 일이다.
20대에는 디자이너라는 직업군에 속해 있었는데 10년을 향해가던 무렵 "재미없어서"디자이너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주어진 소스들을 결합하고 재 배치 하는 것이 디자이너일까에 대한 고민, 그리고 디자이너보다 편집자, 코더(당시에는 디자이너가 html과 css, flash, action script를 다루었다)에 가까운 업무들. 게다가 약간의 기획력이 요구되는 일상까지.
늘 내가 창작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이너가 맞나? 하는 생각이 있었고 누가 나에게 직업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면 "웹디자이너요"라고 말하는 게 왠지 껄끄러웠다.
그렇게 30대를 맞이하기 직전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동시에 "교육기획"이라는 분야로 이직했다. 그렇게 시작된 기획자의 길은 웹디자이너의 경력을 버리지 못하고 흐름처럼 자연스레 웹기획자로 이어졌다.
하지만 또 그 일을 하는 내내 누가 직업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기획자요"라고 말하는 게 껄끄러웠다. 분명 기획자인데 내가 무슨 기획을 하는 거지? 하는 생각에 답을 정의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고 Si 시장에서는 꽤나 잘 팔린 기획자였다. 그렇게 웹기획자에서 UIUX가 트렌드인 양 UIUX기획자로 소개되었고 20년 쯔음이 되니 컨설팅과 제안으로 포지셔닝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20년이 넘게 일을 했는데 내가 하는 역할은 알고 있으나 내 직업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늘 고민스러웠다. 일을 못해서라기보다 그냥 진짜 본질적인 내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UIUX기획자라 하기엔 조금 더 광범위하게 일을 하고 기획자라 하기엔 불분명한 카테고리인 것 같고, 컨설턴트라 하기엔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 편견으로 스스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필요 없게 된 건 양양으로 이주를 하면서 "대표"라는 역할을 맡게 되니 내가 뭘 하든 간에 (약간의 찝찝함을 가슴속 깊이 묻어둔 채) 그냥 "대표"로 살면 되었다. 하지만 그깟(?) 대표라는 이름은 회사가 없어지면 없어지는 "역할"일 뿐이었다.
그러다 앞서 이야기한 대학원에 진학하며 갑자기 또다시 나의 직업에 대한 물음표가 강력하게 뚫고 나왔다.
웹디자인 8년, 기획자로 14년, 석사는 교육공학과, 박사는 스마트경험디자인학과 심지어 랩은 Area design management lab, 지금은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찾아 헤매는 중...
얼핏 보면 얼레벌레 끼워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얼레벌레 끼워 맞추려면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했다.
박사과정이라는 것은 나에게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따라붙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도대체 "무슨 전문가?"인지 모르겠어서 내가 이 학과에 이 전공으로 이 랩에 왜 왔는가에 대해 계속 자문했다.
가장 쉽게 설명되는 단어가 "컨설턴트"인데 왠지 그간 만난 컨설턴트들 때문인지 내 직업으로 "컨설턴트"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았고 "대표"라는 건 전문가가 아니라 역할의 문제이므로 회사가 없어지면 사라질 단어라 역시 내키지 않았다.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지난 경력은 묻어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는 거라 착각한 나머지 "공간운영해요" 라던지 "로컬사업해요"라는 세상 두루뭉술한 단어들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다 나의 지난 20년, 그리고 지역에서 활동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지 2년, 대학원에 진학한 지 1년까지 총 23년의 시간을 연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가지 섹션을 아우를 수 있는 직업을 키워드로 뽑으면 무엇이 있을까?
조건은 이랬다.
창직은 아닐 것
진짜 내가 해온 일이며, 내가 해야 할 일일 것
쉽게 이해할 직업은 아니어도 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일은 아닐 것
동시에 박사 논문이 결국 나의 전문분야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지점이 될 거라 여겨져 박사논문을 쓰게 된다면 어떤 주제여야 할까도 고민했다.
관심분야는 명확히 있는데 장기적으로 유효할 것인가에 대한 자문과 나의 직업과 미래를(물론 장담할 수 없지만) 고민했을 때 연관성이 있을 것.
그렇게 한 달을 넘게 고민 중에 우연히, 정말 우연히 컨설팅 의뢰가 들어와서 견적서를 작성하느라 정말 오랜만에 "소프트웨어노임단가표"를 찾아보게 되었다. 일하는 동안 질리게도 보아왔는데 여기서 갑자기 내가 하는 일을 정확히 설명하는 단어를 찾았다.
이 전체 직군들 중 당연히 내가 보아야 하는 것은 기획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항목이었으니 다른 분야를 검토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정확히 들어맞는 일은 워딩에 한 번도 관심 가져 본 적이 없는 "업무분석가"였다.
이것은 유레카를 외칠만했다. 이게 뭐라고 23년 된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산업별 역량체계(Sectoral Qualification Framework)에 따르면 #업무분석가 의 일은 다음과 같다.
업무분석가
(정보기술> IT컨설팅 및 기획> 업무분석)
업무분석가라는 단어를 발견하기 이전에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최근에 회사 명함 디자인을 바꾸었다.
그간에는 UIUX Consulting이라는 설명과 함께 있었는데 왜인지 내놓기가 싫어 Business Strategy / Project Management / eXperience Design이라는 설명을 넣어 바꾸었다.
명함을 바꾼 건 직업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 전이었는데 이미 나는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정의 내리지 못하던 것을 정의 내리고 보니 23년의 시간이 연결이 되는 중이다.
쓰고자 하는 논문의 방향도, 근거도 훨씬 명확해진다.
결론은 이렇다.
이게 뭐라고
이상하고, 우습고, 재미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를 나의 23년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겠지...
왠지 모르게 속이 다 시원한 기분 그대로 브런치에 남겨둔다.
10년 후에 다시 보면 또 재미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