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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웅을 낳았어,

후기 육아일기

by 벌판에 서서


내가 영웅을 낳았어,

글쎄 처음 아기를 갖기 전부터 난 영웅을 바랬나봐. 난 , 내 스스로는 그런지 몰랐지.

그저 똑똑하고 반듯하고 잘 생기고 마음이 곱고, 이 세계에 뜻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기도했지, 그 외에도 내가 무언 중에 바란 것은 수도 없이 많을 거야. 난 그것이 보통의 사람의 바람이라고 생각했고, 머리 좋고, 공부도 잘하고 적당히 잘생기고 또 활달하면서도 사려 깊고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그러면서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남에게 배려심 있는 그런 사람을 원했지.

사실 그런 사람 이상을 원했을 거야

근데 말이야. 그런, 내가 바라는 걸 몇 개라도 가지고 있으려면 그게 영웅의 자질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야.

근데, 난 내가 바라는 걸 한 개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 모든 걸 가진 아이, 한두 가지 포기한다면 아주아주 사소한 것 한두 가지는 포기할 지언정 모든 면에서 남보다 뛰어나면서도 그걸 가지고 잘난 체하지 않을 정도의 품성을 바랬지.

깊이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제 보니 내 아이가 영웅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거지.

난 그저 훌륭한 인간이 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그 아이에게 때려 부어 바랬는데… 그것들을 뭉뚱그린 방향으로 흘러갔던 거야.

근데 내가 간과했던 것이 있어.

그건 아이의 성장을 생각할 때, 열매나 꽃만 생각했던 거지. 씨앗이 땅속에서 얼마나 긴 어둠 속에서 자기를 부수고 또 빛을 향해 온몸을 던지며 나와야 하는지를 몰랐던 거야. 막연하게는 생각했을 수 있지. 그렇지만 그것은 먼 이론적인 생각에서 그쳤어. 내 삶의 모습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지.

성장을 위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순간이라도 실감할 때는 정말 자기 전체가 타버리는 것 같아.

땅 위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도 아직, 아직 한참이 남았어. 적절한 햇빛을 받아야 하고, 또 찬 밤의 어둠을 정기적으로 받아들여야 해. 그리고 지루한 반복, 해를 보고 어둠을 맞이하고, 해를 보고 어둠을 맞이하고,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노력, 노력을 해 가야해.

1. 임신

아기를 가지기 전, 시기가 되었고 조건이 갖추어졌지만(남편을 맞이했고 보금자리를 만들었다는거야) 금방 아기가 찾아오지는 않았어.

난 막연히 나도 영웅의 생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했고 더 밝은 빛으로 내 아이가 나를 찾아와 자기의 길을 가면서 나의 인생도 빛내 주리라 생각했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어. 그냥 막연히 상상한 거야. 마치 자기를 공주라고 생각하고, 언젠가 왕자가 찾아와 자기를 데리고 가서 웅장하고 멋진 궁전에 가서 팡파레 같은 삶을 살게 할 것이라는 기대하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봐.

난 아기를 키우는 구체적인 생활 같은 것은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말하자면 기저귀를 갈고 모유를 먹이고 아이와 놀아 주고… 뭐 이런 것들? 또 그런 것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들 있잖아. 훌륭한 사람 되라. 바른 사람이 되라. 뭐 이런 것. 그것은 누구나 하는 말 아니냐고? 픽 웃을 거야.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뭐. 내 시선은 왠지 거기에 가 있었다는 거야.

아이를 안고 모유를 먹이거나 어르면서 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훌륭하게 커라~ 하고 어루만졌지. 그 때는 그것이 어미로서 할 커다란 도리이자 순수한 기대라고만 생각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가 그것을 모두 듣고 있었다는 거지. 아니, 아이뿐 아니라 옆이 있던 아이의 수호신, 아이에게 가피를 내려주시는 모든 신들이 내 기도를 진정으로 들어주셨다는 거지.

아이가 어렸을 때 겪은 어려움들… 이런 것들에 난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지만, 사실 그런 과정은 신들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한 과정이었다는 거야.

아마, 그 고통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물론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성숙하지는 절대 못했지, 단지 그 고통에 진실하게 빠져 다른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아팠을 뿐이지.) 난 좁쌀만큼도 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야. 누군가 타인이 나에게 이런 지혜로운 말을 해 주었어도 아마 무슨 개소리냐? 하던지 “너나 잘하세요.” 하던지 너도 나같이 고통을 당해봐라. 하던지 온갖 부정적인 것이 내 쏘았을 거야. 물론 전혀 일 퍼센트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

단지, 왜? 왜? 이렇게 나는 괴로운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었지.

왜? 왜?

나의 괴로움을 알고자 엄청나게 노력한 바는 있었어.

나는 나의 괴로움이 나의 기대와 바람에서 온다는 것은 전혀 몰랐어. 아마 알았더래도 이미 진행된 마당에 어쩔 수 없었겠지. 이미 영웅의 길을 시작한 마당에 다시 인생의 길을 돌릴 수는 없는 거니까.

어쨌든 나도 인간인지라 내 괴로움을 벗어버리고자 엄청난 노력들을 했지. 그렇지만 그 괴로움은 마치 가면을 벗어던지듯 물리적으로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괴로움을 될 수 있으면 외면해보겠다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전략이었어. 작은 괴로움, 잠깐의 외면은 가능하더라구. 마치 단 곶감 빼 먹는 듯한 자주자주 그런 방법을 써먹었지. 그 방법도 시한이 있더라구. 그리고 그 방법을 많이 쓰면 쓸수록 다음에 오는 괴로움은 내가 피한만큼 농축되어 나를 찾아오더라구. 왜 그 불변의 법칙 같은 것 있잖아? 질량 불변의 법직, 열량 불변의 법칙. 뭐 그런 거던가? 그게 그런 거잖아. 열량이 여기서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고 어쨌든 다른 곳에서 발현이 된다는 거. 괴로움도 그런 거 같애. 내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지도 않거니와 언젠가 피한만큼 농축된 것이 나를 치면 그것에 맞아 쓰러지겠더라구.

그래서 더 점점 그 알 수 없는(난 왜 괴로운지 알지 못했지. 전혀. 왜인지 모르니까 더 괴롭고 참기 힘들더라구. 그 당시 내가 이렇게 어려운 것을 원했기에 괴롭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참기가 훨씬 수월했을거야. 그건 내가 자초한 것이라고 알았더라면 참기 수월했을 테지. 그러면서 아마 한참을 되돌이키려고 헛된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거야. 돌아가려고 했겠지. 다시 영웅을 원하지 않는 상태로.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거야. 이제야 알게 된 거지. 영웅을 원하지 않는 삶을 택할 수 있을 때 그것을 택하는 것이 가능하겠어? 아마 나에게는 가능하지 않을 거야. 이 모든 것을 다 알고서 돌아가서 그 시점에서 다시 선택한다고 해도 난 영웅을 삶을 선택할 것 같아. 정말 지독한 일이지.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고나 할까? 모든 인간들이 가진 운명인 것일까? 그렇게 선택하도록 운명지워진 것이 인간인가? 모르겠어.)

어쨌든 난 다음으로 그 원인을 다른 사람들, 특히 부모와 형제들, 주변 사람들에게서 찾기 시작했던 것 같아. 아참~~ 내 아이의 영웅의 삶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 영웅의 삶 첫발을 대 딛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내 이야기만 길어지네~

어이쿠야, 어쩔 수 없어. 이 이야기는 내 시점으로 하는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영웅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는 영웅의 어머니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도 몰라.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해야겠는데, (아직 영웅이 된 것은 아니야. 지금 내가 크게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영웅이 만들어진 상태, 즉 식물로 치자면 꽃이나 열매, 그 상태가 영웅이 아니라 영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진정 영웅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 이야기를 시작한 거야~ 식물에서 꽃이나 열매의 아름다움이나 멋있는 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이나 열매로 가는 과정의 속 면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지.)

그런데 이야기가 삐끌어져 나갔네~. 옆에서 같이 삶을 엮어 나갔던 삶의 운명 공동체였던 내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되었네.

부디, 이 내 이야기가 빨리 끝나고, 영웅이 만들어져가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계속 내 이야기 조금 더 할게.

그때부터(내 괴로움이 타인에게서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타인의 목록에 먼저 올라가는 대상은 나와 가장 많이 삶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거겠지.

일단 과거 결혼하기 전 내 가족, 특히 나의 부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분석하였지. 그런데, 그 과거라는 것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내 기억에 의존해서(그것도 나의 시각으로 몹시 왜곡된.) 되돌려 떠올렸던 거야. 그때 그것이 나를 어떻게 왜곡시키고 변형시켜서 내가 현재 이렇게 괴로운 것일까? 하고 늘 생각을 떠올렸어. 기억의 과거로 돌아가 되살리고자 노력했지. 나에게 남아 있는 아주 단편적인 기억들에 의존해서 그들을 평가하고 원망하려고 했지만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파편 한두 조각에 불과했어. 그 파편에 의지해서 내린 해석은 나를 시원하게 해주지 못했고 당연히 별로 큰 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했지.

차라리 젊어서 기억을 떠올릴 때보다 중년이 지난 지금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이 더 많다고 봐. 그때는 부모님들도 살아계셨고 형제들도 모두 자주 왕래하던 때라 그때 현실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기란 더 어려웠고, 그 현실의 모습이 겹쳐져 과거의 모습은 더욱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던 것 같아.

그래서 그때는 그때의 그들의 모습이 진실된 모습이라고 거의 생각하고 기억들을 한켠에 치워두고 살았지.

막연한 괴로움 때문에 현재 같이 사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리라는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어. 난 애써 그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현실을 좋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었지.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괴로움은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그대로 그 괴로움이 찾아올 때는 그대로 견딜 수밖에 없었어. 때로는 몸으로 그 현상이 찾아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도 했지.

그 어두운 막연한 괴로움이 순간 찾아와 나를 휘어잡을 때가 있지. 그 속에서 마치 움직이지 않는 망망 바다에 작은 배를 타고 아무리 노를 저어도 그 자리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팔을 허공 속에 휘젓고 있는 그런 가라앉는 느낌이었지. 그것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 몰라. 그 순간은 온 세계가 암흑인데, 그것이 어떻게 지나가고 어떻게 찾아오는지 나는 지금도 몰라.

단지 지금은 그것이 나를 거의 덮치지 못한다는 것만 알고 있지. 그것을 지금은 그리 두려워하지도 않아. 그건 이 괴로움의 길이 영웅의 길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에 많은 도움이 있었을 거야.

그럼 이쯤 해 두고, 너를 임신했을 때로 돌아가 볼까?

그때,

난 아이를 가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몰랐지. 사실 누구든지 첫 아이를 가질 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도 그랬지. 당시에는 다 아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도 대부분 같을 거야.

그런 와중에도 내 아이가 영웅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어. 지금 와서 영웅이라고 칭하는 것이지 난 내가 원하는 아이가 영웅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지. 아니 영웅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그 영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인생을 사는 것인지는 몰랐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세상을 구하고 아니 세상에서 뜻있는 일을 하는 멋있는 사람을 원했는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존재가 영웅이라는 거야.

난 그 당시 그 댓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아니 혹독하다기보다는 그보다 더하지. 내 모든 것, 아니 내 아이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추호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우수하게 태어나면 그 모든 것이 술술 주어진다고 생각한 거야. 난 그냥 밥만 잘 먹이고 나쁜 짓만 안 하면 그저 영웅이 탄생한다고 생각한 거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여하튼 그러한 임신 과정을 거치고 내 영웅인 아이가 태어났어.

임신 동안에 난 행복하지 못했고, 그것이 내 아이의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도 몰랐지. 그냥 무지의 상태였던 거야. 그냥 난 생물학적인 임신만 아주 조금 알고 그것을 거의 전부를 안다고 생각한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야.

제일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임신인지 알지 못했을 때 내가 느꼈던 불행감, 어두운 감정들이야. 나중에 그런 것이 아이가 생길 당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고 엄청 마음이 아팟지. 그런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난 그렇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물론 웃겠지. 불행이 뭐 자기 생각대로 왔다가는 거냐고 말이야. 근데, 이 불행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에서 오는 나의 감정이 대부분이어서 그것은 생각하면 내 생각 하나 바꾸는 데서 많이 개선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되거든. 그런데 난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결혼 생활에 당황을 넘어서 이거 잘못된 구덩이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끊임없는 자책과 실망으로 어둠 속에서 울고 있었거든. 그때가 바로 임신이 된 초기였던 거야.

아이를 낳고, 아이가 내가 알 수 없는 행동이나 부정적인 심리를 보일 때 난 이때를 돌이켜 볼 수밖에 없었어.

그때 내 시각의 크기는 그것이 전부여서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 아쉬운 부분이었던 거지. 내 아이에게 이렇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았다면 난 그렇게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았을 거야. 내 시각을 극복하지 못했으면 타인에 투쟁을 해서라도 극복하려고 했겠지. 나도 내 자신이 투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것을 몰라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 번 내 아이를 위해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도 모른 채 무지하게 흘려버린 시간들이 원망스러웠던 거지.

그런데, 말이야.

아이는 정말 내가 바라던 대로 영웅으로 태어났던 거야.

그 모든 나의 실수와 좁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영웅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그대로 그 아이를 낳게 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아니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내가 이런 아이를 바라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라는 거지,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 내 정신에 살아 있는 기본 가치관은 그렇다는 거야.) 그런 영웅 아이를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될 거라는 거지.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난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를 보며 아이가 훌륭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어.

그런 걸 낙천적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아이를 열심히 키우면 무럭무럭 자라서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거의 백 퍼센트 확신했지.

처음 아이를 키울 때만 해도 그냥 소중한 존재라는 것, 내가 보살피는 아주 여리디여린 존재라는 것, 앞으로 이 세상의 소금이 되는 좋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

2. 나락

그때만 해도 내가 읽은 갖가지 이야기, 동화들에 나오는 영웅들의 삶을 내 아이가 살아내어야 한다는 그 지독한 과정은 전혀 알지 못했어. 그 지독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래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예방접종이 되어 있었으면 그렇게 나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심정을 때때마다 맛보지는 않았을 거야. 그 나락은 깊이가 깊기도 하고 때로 낮기도 하고 때로는 끝이 없을 것 같지만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 그리고 큰 도약을 하려면 그 도약보다 더 깊은 나락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은 알지 못했지. 만약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먼 - 먼- 옛날의 이야기이거나 힘든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아니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냥 그런 이야기는 어떤 책이나 틀 속에 갇힌 교훈적인 이야기이라고 생각했을 뿐 나에게는 전혀 다가오지 않았어.

나락으로 떨어질 때에도 그것이 고난이라는 생각보다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였지.

단지 이 불행이 지나가면 언젠가 그 반대가 되는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꼭 부여잡고 그 나락으로 떨어졌지.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 떨어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거야. 왠지 나에게는 언젠가 행운이 올 것이고 운이 확 트이리라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어.

그러한 믿음을 한 번도 놓쳐 본 적은 없어. 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항상 나는 운이 좋았고, 앞으로 좋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나락으로 떨어지다가 그 끝이 오면 곧바로 아, 이제 좋아지는 시작이구나 하고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이 계속될수록 아, 나락이 시작될 때 오히려, 아, 이것이 희망의 시작이구나, 좋아지려고 나빠지고 있구나. 더 높이 상승하기 위해 떨어지는 그 시기구나. 하고 난 올라가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렸지.

한 가지 내가 간과했던 건,

내 아이의 나락에 있어서는 내가 경험했던 나락보다는 그 아이의 나락이 낮을 것이고 솟아오를 때는 더 크게 솟아오르리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아이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내가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없었어.

반복해서 떨어지고 그 나락으로부터 그 나락만큼 솟아 오른다는 것을 경험하고서도 어쩔 수 없었어.

아이가 나락으로 떨어지려고만 해도 난 손을 잡고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지. 그 당시는 그것이 중력을 거슬러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행동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 같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난 내 삶도 팽개치다시피 하고 그 아이 삶에 개입하여서 떨어지지 못하게 잡았지.

결국 떨어지더군. 그 속도가 늦어질 뿐. 아니, 나락 앞에서 우물주물하다가 더 공포심만 커지고 헛된 시간만 소비한 것이더군. (이제야 조금 알게 된 것이지만.)

내 아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어둠은 나에게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정말 큰 어둠으로 느껴졌어.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는 내 아이는 영웅이었고, 그 영웅에게 나락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거든. 그 나락은 영웅의 반대로 가는 방향이라는 생각, 왜 왜 그런 어둠이 내 아이에게 (백설같이 하얀 아이에게) 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고 용인할 수도 없었어.

그러한 배신감과 내 아이가 겪는 어둠에 대한 부모가 느끼는 증폭이 더해져서 아이보다 내가 더 힘든 시기를 겪게 되었지.

그리고 내 아이가 나락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느리고 괴로웠어.

사실, 내 인생의 나락에서 내가 느끼는 괴로움은 그냥 순수한 괴로움 그 자체여서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고 봐.

그런데 내 아이의 나락을 바라보는 내 상태는 그 나락이 증폭되어 다가오고(물론 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나만의 왜곡된 세계였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기만 한 것이지만, 그 내 몫의 시선이고 그 시선이 변하기까지는 그 괴로움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엄청난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던 거야.) 또 한 가지 더한 것은 배신감이 더 나를 세계 강타했다는 거야. 내 아이는 그런 경우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에 대한 배신감. 내 희망적인 믿음이 송두리채 뽑혀 나가고 심연 같은 어둠이 다가오는 그런 느낌이야. 그것이...

자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느껴볼 수 없는 그런 것이지.

그러한 행동을 해석해보자면,

자식이 구렁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도와주고(도와준다는 것은 어불성설, 단지 지켜봐준다고만 해야하겠지.) 지켜봐 주지는 못하고 그 나락 옆에서 나 혼자 더 큰 구덩이를 파고 혼자 스스로를 떨어뜨린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 당시에는 이런 것을 추호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내가 판 나락으로 떨어지고 떨어지면서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알 수 없는 존재를 원망하고 치를 떨었지.

그래도 저 깊은 구덩이 속에서 가느다랗기는 하지만 질기게 가지고 있던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솟아올랐어.

아이를 낳고,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생각하며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였을 거야. 그래도 그때 생각했던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어.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 바닥에 닿을 때까지 아래로 향하는 연속에서도 언젠가 꼭 그 나락이 끝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어. 깊이 떨어질수록 더 위로 올라가는 탄력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도 아무래도 없어지지 않았지. 물론 내 아이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내 몸을 받쳐주어서라도 떨어지는 것을 막고 싶었지만, 내 아이가 나락의 바닥에서 위로 올라올 때의 행복감은 내가 반등할 때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감을 가져다주었지.

아이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언제나 아팠어. 여러 번 계속될수록 영웅에게는 나락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그 나락이 예측가능한 어려움이기만을 바라게 되더라고. 예측 불가능한 것일 때에는 온갖 부정적인 예측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때는 내 자신감이나 긍정적인 생각이 아무런 쓸데없는 장난처럼 생각되지.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지독한 지옥이 아닐까 싶어. 이제 영웅의 길은 포기해야 하고, 평범한 범인이 되기에도 모자란, 평생 보살펴주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예측이 곧바로 나를 지옥으로 데려갔지. 그 지옥에서 나오는 길은 오로지 나의 노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거야. 그런데 난 나의 노력으로 안 되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외부적인 요인으로 내가 이렇게 지옥의 고통을 맛본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것은 나의 망상이 만들어 낸 세계일 뿐이었는데.

영웅은 그대로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인데.

난 그 영웅의 길을 영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아래로만 떨어질 뿐인, 내 멋대로 어둡고 절망적인 길이라고 상상하고 내 상상 속의 세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거야.

3. 영웅의 길 떠남

내가 일생을 살아오면서(지금까지 살아온 삶 말이야. 앞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나도 모르지만.) 제일 힘들고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은 바로 내 아이가 나를 떠나려고 할 때였어. 난 내 머리를 뽑아 신을 삼아 줄 정도로 내 아이에게 내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그 아이는 그게 싫다는 거야.

그것이 바로 자기를 구속한단 거야. 머리로는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지만 ‘난 그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어불성설이다’하고 생각했지.

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 내가 볼 때, 그 아이는 가장 어려울 때 나를 떠나 자기 혼자 노력해 보겠다고 하는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물론 그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지만 말이야.) 더욱 내 도움이 필요하고 나와 같이 손잡고 이 인생의 험한 파도를 헤쳐가야 한다고 생각되었던 거지. 난 그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고. 사력을 다해 붙잡는 나를 떨치고 사력을 다해 떠나더군.

한동안 난 ‘왜? 왜? 왜?’를 멈추지 못했지.

내가 내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조금의 사심도 섞이지 않은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고, 그 아이 입장에 서서 도와주려고 하는 부모로서의 큰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했거든.

또 한 가지 나를 괴롭힌 것은 저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아무런 빛도 없는 곳으로, 내가 그동안 비춰주던 희미한 등불도 없이 뛰쳐나가 버렸다는 거야. 그것도 내가 잡는 바람에 길도 어딘지도 모르고 단지 잡아두려는 나를 피해 온 힘을 다해 뛰어가 버린 거.

한동안 소리쳐 불렀어. 어둠 속을 나도 온 힘을 다해 뛰어 따라갔지만 난 곧 소리치는 것도 뛰어 따라잡으려는 것도 멈추어 버렸지.

내 소리와 내 따라가는 동작이 내 아이의 길을 더 잃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말이야.

그 아이는 일단 나를 피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격렬하게 쫒아갈수록 더 무작정 길도 없는 곳으로 피해 간다는 것을 그 와중에도 알았던 거야.

내가 내 아이의 길을 막는 주범이 되었다는 자괴감, 내 도움이나 손길을 바라지 않는 내 아이에 대한 안타까운 생각. 이런 것들이 나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지.

어둠 속을 바라보며 그 어둠 속 어디엔가 있는 내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찟어지는, 아니 찢어지는 것 이상이 뭘까? 지독한 허무감 속에서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망연히 넋을 놓고 나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며 앉아 있었던 것이 얼마의 시간인지 알 수 없어.

여러 가지 감정들 중에서 특히 강했던 것은,

‘왜? 왜? 왜? 갑자기?’하는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들.

또 하나는 내가 내 아이를 구속하는 존재라는 것, 그것이 나를 아프게 했지. ‘내가 뭘 구속했지? 뭘?’하는 끊임없는 자책들.

또 한 가지 큰 것은, ‘지금 어느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가’하는 걱정. 검은 뭉게구름처럼 나를 덮쳐오는 걱정들. 어느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그 허우적거리는 구조의 몸짓마저 사그러져 버리고 만 상태는 아닐까?’ 하는 걱정들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지.

걱정과 그리움 속에서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아마 죽음이 그런 것일까?

내 아이가 무작정 나를 떠났을 때(무작정 떠났다는 것은 순전히 내 기준의 시각일 뿐)

내가 느낀 상실감, 걱정이나 그리움은 내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그 어느 감정보다 큰 것이었지. 마치 내 모든 것이 거대한 검은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는 것 같기도 했고, 아이 그것보다 더 지독했어.

난 망망대해 움직이지 않는 바닷물 속에 갇혀 있었어. 작은 조각배에 몸을 의지하고 캄캄한 밤 속에 별도 달도 뜨지 않는 어둠 속에서 또 저 멀리서 어둠들이 나에게 밀려오고 밀려오는 그런 상태였지. 그 어둠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상태였던 거야. 그것은 괴롭고 무서운 것이었어.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가치가 없고 내가 그 어느 것에도 다가갈 수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이곳이 어느 곳인지도 모를 그런 심정으로 앉아 있었지.

아마, 그런 것이 우울증에 빠져 자기 몸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일 거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잠을 잘 수도 없었어. 어떤 때는 잠을 자려고 잠자리에 누우면 어둠이 나에게 밀려와 안 좋은 온갖 생각들이 밀려 들어오는 거야. 그러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힐 것 같아 온 집안을 돌아다녔지. 밤 두 시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은 적이 많아. 아파트 유리창에 붙어 서서 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지. 그 한밤중에서 소리를 내고있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대부분 싸우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우울증, 그런 것일 것이라는 자각이 나를 움직이게 했어. 참 아이러니하지? 아니, 아이러니가 아닌가?

나에게 우울증이 덮쳤다는 자각이 나를 번쩍 정신이 나게 한 것 같아.

이 상태에서 조금 더 진행된다면 난 내 힘으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더 심하게 나를 잡아챈 것 같아.

우울증에 빠지면 안 된다는 나 스스로의 경고가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동력이 내 아이에로 향하는 그리운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을 나에게 돌려주는 힘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다시 길을 찾아 돌아오는 가를 생각하면 인생이 참 고마운 것 같아. 아찔한 위기의 순간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동력을 발견하고 그 동력을 기준 삼아 다시 인생의 방향을 잡고 노력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혜택인가? 아니면 그동안 내가 쌓은 공덕의 보답인가? 그동안 진솔하게 살아온 내 인생 나침반의 도움인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지만 역시 고마운 마음이야.

삶이 고마움의 연속이라는 거지. 그토록 참혹한 상황, 내 아이를 떠나보내는, 그것도 갑자기, 어딘지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던지고 나아가는 그런 상황을 한 걸음도 같이 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구경만 해야 하는 그런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살아남게 하는 그 어떤 원동력이라는 거지.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느 부모보다 내 아이에게 찰싹 붙어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집착을 보인 것은 나라는 생각이 드는군. 이런 생각은 그 한참 후에 내 아이가 그 어떤 구렁텅이에도 떨어지지 않고 그 어둠 속에서도 영웅으로 잘 헤쳐가고 어둠의 길을 오히려 즐기며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일 거야.

그때, ‘그 아이가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돼. 지금 그 아이가 자기 길을 갔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에 와서는. 떠나지 않았다면 엄청나게 끔찍했을 것이라는 거지.

영웅이 자기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됐겠어.

어쨌든,

내 아이가 길을 떠나고서 내가 겪은 일이란, 말도 마.

정말 죽음과도 같은 길이었어. 아니 죽음이었다고 해도 돼.

맞아, 그건 나를 버리는 일이었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하는 일. 내가 신념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살아 온 일(내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내 삶을 맞추고 산다는 그런 일) 그런 나를 버리고 부정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건 죽음이었지. 나의 정신적 죽음.

실제의 죽음이 그와 같은가?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실제 생활에서 맞아들이는 육체적 죽음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에 이것보다 덜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해 보거든? 그 실제에서의 죽음은 아프기보다는 의외성을 가지고 갑자기 다가오는 그런 면이 더 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봐.

그런데, 내가 겪었던 이 죽음과도 같은 상태(아니 나에게는 소중히 여기던 정신의 가치가 죽는 그런 것이었지. 그것은 나를 소용돌이 안에 팽개치고 어둠 속에서 휘둘리게 하는 그런 것이었어. 그리고는 그 한 가운데서는 오히려 조용하고 아무것도 없는 무서운 허무의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 같아. 그때가 가장 공포스러웠지. 물론 그 공포심에 기대어 난 몸부림쳤고 그 몸부림의 방향성으로 조금씩 어디인지도 모를 방향을 가지고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난 어떤 답을 가지고, 또는 판단이나 희망을 가지고 움직였던 것은 아니야. 그냥 살기 위해서 허우적거렸어. 그것이 조금의 동력이 되어서 움직였던 것 같고, 내 경우는 그 움직임이 나쁜 방향으로 진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어쨌든 암흑만이 존재하는 그곳, 손을 휘저어도 허공뿐이고 어딘지도 모를 그곳에서 느낀 감정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감정이야.

그리고,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 허우적거리고 나오려고 했던 건 아니야. 처음에는 무력하게 어둠에 내팽개쳐져 있었을 뿐이야.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를 받아들이고서야 조금 편해졌지. 또 다른 나를 받아들인 것은 죽음의 길에서 발견한 내 인생의 최고의 보물이었지. 나의 중년과 노년은 그 보물이 지켜주고 보살펴주고 자부심을 주고 행복을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죽음을 겪고 그 죽음을 통해 난 보물을 얻었지. 사실 이것이 내 영웅 아이의 가장 큰 선물이었던 거지.

후일 안 일이지만 내 아이는 나를 떠나 자기의 길을 가면서 나와 같은 상황은 겪지 않았던 것 같아.(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추측컨대, 나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방향성으로, 앞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대로 채워가고 있었던 것 같아.

그 길은 그 아이가 가야 할 길이었고, 그 아이가 영웅으로 태어났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영웅이 아니었으면 길을 떠나지도 않았을 거야.

4. 후일담

난 계속 여기서 살고 있어.

내 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아니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인가?

이제는 내 아이의 내면 속에는 돌아오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그건 마치 멀리 고향을 떠난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마음이라고 추측하고 있어.

내 아이가 돌아올 수 있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

단지 신화 속의 영웅은 자기의 과업을 이루고서는 꼭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그것처럼 내 아이도 자기의 과업을 이룬다면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지.

내가 내 아이가 영웅이라고 믿는 것과 같이 내 영웅은 언젠가 영웅이 될 것이라고 믿어.

그 영웅의 길에 내가 아주 옆에 있지 않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거든.

그것이 언제가 될까? 초조하게 기다리던 옛날에 비하면 지금도 간절하게 그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를 좀 먹어가지는 않는 기다림이라는 것이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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