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편과의 삶에서 아버지 존재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 3

by 벌판에 서서


결혼.

남편과 같이 사는 삶.

결혼 초기, 또는 결혼생활 내내. 나는 남편에게 바라는 어떤 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상 때문에 상처도 받고, 초조하기도 하고 남편이 미워지기도 하였다. 그 상 때문에 남편이 원수가 되기도 하였다.

우선 나는 남편이 따뜻한 배려를 해 주기를 바랐다.

남편이 나를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랐다.

남편이 나의 의견에 언제나 동조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의 이성이기를 바랐다. 나의 짝으로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다행히 남편은 나만큼 과도한 기대나 바람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단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내가 잘 진입하고 잘 견뎌주기를 바랐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무척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가족에 적응하기 위해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려움의 시작이자 본질이었다.

사실 내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미혼자들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결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부모의 커다란 걱정이었다. 본인 또한 사회에서 약간 아래로 보는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꼭 결혼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 노력의 내용에는 결혼생활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계획이나 설계는 별로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그런 설계를 하려는 자체가 약간 되바라진, 기존의 결혼생활에 대한 관습을 뒤바꾸려는 얕은 허영심이라고 여겨졌다. 물론 결혼 계획을 세우는 처녀, 총각들이 허영된 결혼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대는 결혼에 대한 깊은 분석이나 충고는 별로 없었고 부모님이 살아오신 대로 살게 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절차에 밀려 결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실제 생활에서는 그리 간단하게 결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앞으로 다가올 결혼생활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나 설계는 그 당시 결혼하는 쌍들에게는 잘 모르는 암흑 같은 세계를 더듬어 몇 가지 예측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지금 여기서 결혼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갔는지’에서 거기에 드리워진 내 아버지의 그림자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내 아버지의 그늘을 피해 내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것을 선택했다. 아마 그러한 목적이 나를 추동하고 밀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결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누구도 잘 믿지 못했고 그 어떤 새로운 세계에도 과감히 발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내가 속한 세계가 너무도 나를 괴롭히고 또, 그 세계가 참혹하다고 생각했기에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나를 자유롭고 나답게 만들리라는 것을 믿었었다. 결혼 후 내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내 생활에서 경험하고 내린 나름의 결론이 있었다. 어둡고 참혹한 내 집안과 달리 내가 대하는 밖의 세계는 나에게 환하고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을 펼쳐줄 때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부모님들로부터는 저 바깥세상의 어딘가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늘 받았지만, 어두운 집안에 비해 바깥 세계는 너무도 환하고 좋은 것을 나에게 주었다. 마치 물이 흐르듯 나의 마음은 자연스레 바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결혼하려고 한 그때의 나의 감정 상태는 그러한 나의 집안을 가진 내가 너무 부끄러웠고 내 집안에 대한 것은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러한 어둠이 나를 스스로 밖으로 나가게 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갈 수 있도록 충분히 부추겨 주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먼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별다른 미련 없이 내 집을 떠나 새 세계에 발을 덥석 들여놓았고 그 새 세계가 바로 결혼 후 가진 남편과 그 가족이 있는 세계였다.

나는 나의 새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속했던 아버지가 존재하는 세계와 싹뚝, 작별하였다고 여겼다. 아버지는 저쪽 세계에 있을 뿐 나는 나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결혼 후의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은 한마디로 내가 예측하고 바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 후의 세계란 ‘내가 바라는 세계, 동화에서처럼 그래서 그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는 세계. 내가 그리고 있는 행복이라는 동산을 구현하고 있는 세계일 것이라 여겼다. 그런 허상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있었기에, 또 내가 속한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혐오와 질력남이 있었기에, 나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덥석 들여놓았던 것이다.

나를 위해 존재할 것이라고 여겼던 세계, 아니면 내가 건설할 수 있다고 여겼던 세계, 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이 모든 것은 내 환상이었을 뿐이다. 그렇다. 그것은 한 조각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두 나의 허상이었을 뿐이었다. 그 세계에 발을 디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는 내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또 내가 속했던 세계만큼이나 나에게 어려움과 고난으로 다가왔다. 그 암흑 속에서 나는 이것을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실에 숨이 막혔다. 나의 끈질긴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숨이 막혀 미쳐버렸거나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러한 욕구가 시시로 나를 사로잡았으나, 왠지 나는 미치거나 뛰쳐나가는 것에 대해 마주한 현실에서보다 더한 두려움을 가졌다. 그리고 뛰쳐나갔을 때의 황량함이 이 현실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세계에 새로운 이물질이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 세계는 애써 나라는 이물질을 선의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일 뿐이었다. 나는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 이방인, 다행히 환영받는 이방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 속 아주 안쪽에서는 새로 발 디딘 그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끈질긴 욕구를 가지고 그것을 놓지 않고 잡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어렵게 만들었으나 또한 그것이 나를 살아 있게 하고 나를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겉면적으로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고 그들과 연합 함으로서 이방인으로서의 자세를 칭찬받았다. 경제적 문제라던가 남편에 대한 시어머니와의 애정 관계 같은 그런 것들. 그러한 서로의 합종연횡으로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나에게도 일정의 지위가 주어지고, 함께 누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끈질기게 내 뜻대로 이 세계를 움직이고자 시도했다. 아이를 낳고 그 세계는 아마 조금씩 내 것이 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나 나는 전부 내 것이지 않은 이 세계를 전부 내 뜻대로 움직이고자 투지를 세웠다. 또 마음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때는 엄청난 미움과 분노를 내뿜었다. 아마 그 분노와 미움은 처음에는 시부모를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그 미움과 분노는 남편을 향했다.

나는 남편이 나의 새 세계를 같이 건설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아니 남편이 그 세계를 가져다주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그에게 분노하고 미워하고 수동공격을 하였다. 아마 맷집이 약한 남편이었다면 벌써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끈질긴 공격에도 그냥 버텼던 남편은 아마 나보다 더한 정신적 공격을 하는 시어머니의 공격을 어려서부터 견뎌낸 내성 덕분이리라.

결혼이 결론이 되었던가?

전혀 아니다. 그때는 몰랐다.

일단 결혼하고 나서 왜 주위가 어둡고 행복하지 않은지 몰랐다. 나는 행복하고자 결혼한 것이 아니니 그것에 대해 불만이나 원망은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지옥같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 못견디게 싫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당연히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속하고 싶다는 나의 안주 본능이 작용한 것도 있다. 그런 어둠을 피하고자 나는 안전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선택한 것이다. 결혼생활에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절대 따라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저 깊은 마음속에서는 아버지의 대치물로 남편을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하는 아버지가 아닌, 내 마음속에서 바라던 아버지, 남자이기도 하면서 내 아버지이기도 한 그런 존재, 그런 존재가 남편이기를 바랐고, 그 상에 맞는 면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남편이 자상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집안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명령조의 어투나 무뚝뚝함. 이런 것들이 아버지 상에 대한 단편적인 닮음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로서의 깊은 애정이 변치않고 존재했다.

남편을 끈임없이 깊이 미워하고 남편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여 모호한 안개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남편을 미워하고 남편에게 화를 낸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냥 편안하지 않고 늘 초조하고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그런 생활이었다. 나는 결혼하면서 가장 크게 내 아버지를 데리고 와 남편의 속에 앉히고 남편을 보며 나는 알지 못했으나 그 속에 있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믿지 못하고 하였던 것이다.

결혼을 하면서 가장 큰 아버지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았던 것이다. 남편보다는 아버지를 내 옆에 두고 같이 씨름하면서 서운해하고 화를 내고 한 것이다. 또 내 어머니가 되어 내 자식을 나로 생각하고 키운 것이다.

남편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마 지금도 남편의 본 모습을 다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른다가 아니라 그렇다. 나는 내 아버지를 아직 내 어깨에 올려놓고 짊어지고 있다. 내 안 저 깊숙이 내 아버지를 가지고 때가 되면 그것을 꺼내어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을 덧씌워 본다.

그 속에 또 한 가지가 있다. 내가 바라는 아버지이다. 내가 바라는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욕구가 그 미움과 증오 속에 숨어 있다. 그 내가 바라는 아버지가 증오를 더욱 크게 하고 미움으로 나를 치닫게 한다.


나는 내 목소리로 외쳤다. “내 남편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그리고서는 나는 남편이 그동안, 오랜 시간 동안, 내 옆에서, 그도 나처럼 힘들고 지친 삶을… 고난 속에서… 때론 나처럼 피를 흘리며 며칠을 굶으면서… 고달픈 인생을 항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옆에서 조용히 같이 흘러가고 있는 내 남편의 모습을 언 듯 이나마 볼 수 있었고, 그에 대한 밀려오는 따뜻한 감정과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남자에 대한 나의 판단과 선택(나의 남성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