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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의 일생(나의 생물학적인 아버지 1)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 5

by 벌판에 서서

아버지는 1920년대에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가는 도시 가까운 시골이었고 일찍 개화된 종가였다. 삼 형제 모두 머리가 좋고 외모도 출중했으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다리를 절었다. 아버지가 다리를 절게 된 사연은 아버지가 전하는 이야기로 알 뿐이다. 사연이 가혹하여서 믿기지 않는데, 시대가 100여 년 전이니 그 내용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한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어린 시절 평상에서 떨어져 다쳤는데 제때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해서 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다리에 얽힌 더 비참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니 안방 문 안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말소리가 들렸는데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할 바에야 아버지가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 말을 할 때마다 울먹이고 때로 엉엉 울기도 하였다. 그런 것을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더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이 평생 아버지 가슴에 박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형과 동생은 대학까지 나왔으나 아버지는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일본인 시계 가게에 들어가 도제식으로 시계 기술을 배우고 그 기술로 평생 생계를 꾸렸다. 이야기로는 당시는 장애가 있으면 대학 진학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형은 상대를 나와 회사에 들어가 부사장까지 하였고,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동생은 수재였다고 하는데 일찍이 병에 걸려 오랜 병원 생활 끝에 돌아가시고 딸 둘을 남기셨다.

공부를 시키지 않은 버리는 자식이었던 아버지는 오히려 형보다 효자였다. 아버지는 아들로서 부모에게 경제적, 정서적 효를 다 하였다. 아버지 20대 중반에 벌써 시내에 2층 시계점을 열어 크게 성공하였고, 번 돈을 큰 가방에 가득 넣어 할머니에게 가져와 방에 탁 놓으며 쓰시라고 했다고 한다. 경제적 여유가 되는 한은 시골 본가에 큰돈 들어가는 일은 아버지가 주로 처리하였다.

젊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을 멋지게 꾸미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기도 하였다. 감각적인 것을 성향이었던 것 같다. 젊었을 적 사진을 보면 친구와 석양이 빗겨드는 바위에 앉아 하모니카를 들고 고즈넉한 포즈를 취한 것이 있다. 잘생긴 두 남자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엄마와 결혼하여 자식(딸, 아들 둘)을 낳아 살았을 때가 인생에서 안정되고 부유한 생활을 하며 뽐내고 살았던 때가 아니었나 한다. 아버지 형제들은 아들을 얻지 못하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들 둘을 얻어 그런 면에서도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육이오 전쟁 후까지도 그리 어렵게 지내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계기인지 잘 모르지만 아버지는 가게를 정리하여 일본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떠나셨다. 엄마와 자식들 셋(언니와 오빠 둘)은 시골 할머니 집에 맡기고 일본에 2년 반 정도를 계셨다고 한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오셨다.

귀국 후 아버지는 온 식구를 데리고 기술 하나만 믿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나는 서울로 올라오기 일 년 전에 태어났다. 그때만 해도 전후 십여 년밖에 안 지난 때라 서울에는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의 남대문시장 시계골목에서 남의 가게에 곁방살이 식으로 책상 하나를 놓고 가게를 시작하였다. 우리 식구는 남산 아래에서 단칸방에 살았다. 허름한 나무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연탄아궁이와 부뚜막이 있고 거기서 문을 열면 단칸방이 있는 곳이었다. 그때 동생이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시계는 아주 고급 물품이어서 시계 한 개를 가지고 있으면 아주 부자 취급을 받았다. 그런 고급 물품을 다루고 고쳐주는 기술이 있는 아버지는 남대문시장 시계 상가에서도 잘 헤쳐 나가셨다. 전쟁 후의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아버지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 같다. 아버지는 눈치 빠르고 사근사근하고 손님들의 요구에 대해 예민하게 잘 맞춰줄 줄 알았다. 아버지는 금방 따로 가게를 내었고 규모도 커졌다. 아버지는 시계 기술이 뛰어나 아버지가 취급하는 품목이나 규모가 상당했다. 시장 사람들에게 신망도 얻어 시장에서 중요 인물로 부상하여 시장의 조합장도 하였다.

서울에서 자리 잡고 집을 사기까지 십 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의심이 많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막 집을 사서 이사하기 전 기대하던 큰오빠가 명문중학교에 낙방하였다. 모든 것이 잘 풀려가던 아버지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들이 당연히 합격한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 낯설고 싫은 상황에 화를 내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아버지의 화는 엄마를 향해서였다. 엄마 책임이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는 탓하는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런 표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를 화를 돋구게 하였지만 소리를 질러도 엄마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기가 죽거나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만큼이나 엄마도 자식의 일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엄마의 마음도 까맣게 탔을 것인데 아버지는 그것을 헤아릴 줄 몰랐다. 자신의 화를 뻗어낼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그 와중에 막상 당사자인 오빠의 마음이나 진로는 안중에 없었던 것 같다. 그 즈음해서 오빠는 동생들에게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물건을 부수거나 우리를 때리거나 하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동정과 아픔이 짙어서였을까? 엄마는 사소한 일에 신경질을 내고 물건을 부수는 아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또 동생을 때리는 것에 대해서도 부모로서 개입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빠는 고등학교 입학 후 부터 공부를 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신경을 쏟기 시작하였다. 기타를 배우고 낯선 팝송을 듣고 술 담배를 하는 것들이었다. 사실 악기를 배우는 것이 무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을 텐데 기타를 배우겠다고 하는 것이 아버지의 화를 돋웠다. 한번은 기타를 몰래 사서 숨겨 놓고 있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기타를 마당에 내동댕이쳐 부숴버렸다. 큰아들을 꿇어앉히고 가위로 머리를 깎았다. 우리들은 두려움에 떨며 방구석에서 숨어 있는데, 아버지의 화가 절정을 치달을 즈음 큰아들은 박차고 집을 나가 버렸다. 저놈 잡아 오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온 식구는 밖으로 내쫓겨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어두운 골목을 헤매었다. 사실 찾고 싶지도 않았고 아버지와 큰오빠 모두를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있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떨고 있었을 뿐. 한밤중이 되어서야 하나둘씩 식구들이 들어올 수 있었고 다행히 그때까지 열려 있는 대문을 통해 몰래 도둑처럼 들어와 방구석에 찌그러졌다. 다행히 아버지의 화는 가라앉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아들의 균열의 시작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밖에 나가서도 뛰쳐나간 아들을 찾을 수도 없었고 남편을 이해한다거나 말린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는 그때가 어떤 상황인지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엄마가 어떤 상황인지 이해를 할 수 있었다면 특유의 뚝심과 추진력으로 아버지를 막고 아들을 보호하여 조금이라도 숨구멍을 터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아들의 선택이 조금이라도 비겁하지 않은 쪽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인생관을 심어 줄 수 있었다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큰아들은 그렇게까지 고난의 행군을 맞이하지 않아도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오빠가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갔는데 그것을 우격다짐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와 지켜보기밖에 못 하는 엄마 사이에서 오빠는 가출을 반복하며 들락달락하였다. 무슨 일이던지 주위에서 못하게 한 것은 초기 한 번뿐 그 후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나 길게 끌고 가지 못하고 흉내만 내다가 끝날 뿐이었다. 결국 고등학교도 채 졸업 못하고 방황하였다. 아버지는 격렬하게 엄마 탓을 하며 더 자주 엄마에게 화를 내었다. 엄마는 그 화에 화로 반응하며 격한 싸움으로 몰고 갔다.

싸움, 싸움, 싸움.

오빠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와중에 화를 내는 아버지가 더 괴로웠지 않았을까?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단지 표현을 격하게 한 것은 아버지이고 그 와중에도 내 자식이라는 치마폭이 더 컸던 엄마였을 뿐.

아버지는 큰아들의 추락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구체적 답을 찾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런 일에 답이 어디 있을까만서도 아버지의 대응들이 오히려 아들을 나락으로 더 밀어 넣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윽박지르고 화를 내어 바로잡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항상 악효과만 났을 뿐이다. 오빠가 가출하고 담배나 술에 탐닉하고 동생이나 누나가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때리고 물건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엄마는 오빠 앞에 얼씬한 우리를 나무라고 아들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아들은 그것으로 위로받지 못했던 것 같다.

크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가 괴롭고 힘든지는 우리도 알 수 있었다. 엄마도 괴롭고 아팠을 것이나 자신의 아픔을 내쏘지 않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아들에 대한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사업에 큰 고비가 있는 일이 일어났다. 믿었던 친구에 배신당하여 가지고 있던 가게와 고가의 물건들을 몽땅 날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는 배신 당한 시계 장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다른 사업들을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니셨다. 집에까지 그 사람들을 데리고 오시고 의욕을 보이셨는데 누가 보아도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우리 집 아랫방에 거처를 정하고 아버지와 사업을 하였다. 결국, 그 사람은 사기꾼이었고 아버지도 같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잠깐 감옥에 다녀오신 후 아버지는 오랜 시간을 재기하지 못하시고 집에 계셨다. 다행히 작은아들이 일찍 취업하여 그 월급으로 생활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엄마가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오빠의 월급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고 나도 싸구려 운동화 밑창이 떨어질 때까지 사계절을 신으며 학교 다녔다. 나의 대학 3,4학년은 지독한 방황기였으나 부모님은 그런 상태를 알지 못했다. 본인들 앞의 생활고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인생 어느 시기보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심리적으로도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즈음 아버지는 무기력하고 가족들에게도 무관심했다. 아마 우울증 초기 단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때로 대낮부터 아버지는 바닥에 널부러져 꼼짝 하지 않았다. 식구들은 아버지에게 풍경처럼 보였던 것 같다.

그런 상태에서 조금씩 꿈지럭거리며 나가서 일거리를 찾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집간 언니가 아버지와 소통하며 부동산 중계업이라도 하시게 하고서 부터 조금씩 바깥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언니는 우리 형제 중 유일하게 어린 시절 아버지의 행복하고 밝은 시기를 같이 보낸 자식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 우리가 다 결혼하고, 아버지 60대 초반에 다시 조금의 재산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예전의 인맥이 어찌어찌 작동하여 도움을 받고, 거기에 아버지의 적절한 수완이 가세해서 다시 일어서셨다. 아버지는 삼 층 짜리 다가구주택을 구입하여 나오는 월세들을 받아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월세를 받아 생활하시면서 아버지는 집안에 주로 계시게 되셨고 엄마와 긴 시간을 같이 지내시게 되었다. 아버지의 나이가 많아지고 밖으로 향하던 관심이 집안으로 돌려졌다. 집에 오래 계시면서 특히 엄마의 집안일에 트집을 잡게 된다. 엄마에 대한 잔소리와 간섭이 말년의 엄마를 몸도 마음도 힘들게 한 것 같다. 엄마는 허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아버지의 말을 수용하였고 나머지는 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더 아버지를 약 오르게 하여 더 큰 소리로 화를 내게 되었으나 아무리 화를 내고 하여도 듣지 않고 엄마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가 버렸다.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여 집에는 아버지와 엄마만 같이 사실 때였다.

아버지는 성격이 세심하고 자기 의견이 강해, 나이가 들어서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대부분 나이 든 남자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처지를 간파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자기 기준을 강요하거나 맞지 않으면 안 보는 방법을 택했다. 아버지는 사람들과 교류가 점차 줄어들고 집에서 엄마와 같이 있게 되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아버지는 자기의 기준에 엄마가 맞춰주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을 때는 화를 내며 훈계하였다. 그때는 이미 엄마도 아버지의 기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앞에 있을 때는 어느 정도 맞춰주었으나 금방 엄마는 엄마의 식대로 살아가기 마련이었다. 엄마는 그런 것에 대한 의식도 전혀 없었고 화를 내는 아버지가 그저 좋지 않은 성격의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싫어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듣지 않는 아내에 대해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가능하다면 물리력도 써서 엄마를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생활비를 안 주고 힘들게 하고, 열쇠를 주지 않고 나가서 나가지를 못하게 하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엄마의 생각이나 방식을 바꿀 수는 없었고 아버지는 엄마가 일부러 자기에게 반대하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아서 그런다고 생각하였다. 두 사람은 다른 방향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 방식으로 생활하였다.

그런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아버지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시고도 몇 해를 혼자 사셨다. 집 앞에 식당에서 밥을 시켜 드시면서.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 모두 아버지를 보면 싫고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늙고 나약해진 아버지인데도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옛 감정이 솟았다. 가끔, 나 혼자 명절에 아버지를 찾아 뵙고는 했는데, 가서 채 한 시간도 있지 못하고 나와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들이 돋아올라 기분이 컴컴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에도 우리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잠깐씩 찾아뵐 뿐 중환자실에서 고독하게 앓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우리 형제들 모두 모였다. 오히려 아버지 영전에 향을 피우면서 우리끼리 그동안 마음들이 풀려 낙낙해졌었다. 그 강한 아버지에게 뒷덜미를 잡혀 산 것 같은 세월에서 이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돌아가신 후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버지가 엄마를 먼저 보내고 홀로 고독에 몸부림치며 엄마를 그리워한 메모를 보고는 울컥하였고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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