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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 8

by 벌판에 서서

< 아버지들 >

대화자: a, b, c, d.

주된 대화자는 a

b, c, d는 부가적 대화자

대화자는 50대 초반. 남녀는 무방함.


a: 우리 아버지는 평생 자기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 자신의 억울함, 설움을 풀 길 없어 헤매고 다녔던 것 같아. 자기가 받은 멸시와 하대를 풀 사람이 필요했겠지. 아마 본인은 자기가 그런지 몰랐을 걸? 엄마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 아버지의 비극이 시작된 기점이라고 봐. 아버지가 다리를 저시고, 부모를 원망하고, 그 부모의 인정을 받기 위해 평생 힘을 쏟은 것은 아버지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은 되었을지언정 주위를 불행하게 하지는 않았어. 자기의 한을 밖으로 풀려는 쪽으로 인생의 발걸음을 옮긴 것. 그것이 우리 가족의, 아버지의 비극의 시작이야. 자기보다 낮은 존재를 만났고(아버지 생각에) 그 존재는 그렇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엄마는 자동인형처럼 아버지 머릿속에 있는 그림대로만 움직여야 했던 거겠지.


b: 나는 아버지 하면, 증오심이 떠오르거든. 지금도 아버지 돈을 타서 쓰지만 고맙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어. 내가 돈이 없고 아버지가 돈이 있으니까. 사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는 것도 싫어. 그런 사람이 돈이 많은 세상이 싫어. 될 수 있으면 그 사람과는 관계하고 싶지 않거든.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아서 쓰게 돼.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돈을 아까와하거든. 돈을 달라고 했을 때 한 번에 준 적은 없지. 사실 이런 이야기도 하기 싫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버지에게 가는 자체가 싫어. 그냥 남남으로 살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아버지이니까 때가 되면 찾아가야 하고 또 돈이 없으면 달라고 해야 하니까 정말 이런 처지가 싫지. 그래도 아무 연고도 없는 고아보다야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나으니까. 아내는 아버지를 그 영감탱이라고 부르지. 나는 그래도 별 말할 것이 없어. 아버지는 아내에게 그 영감탱이 이상은 아니니까. 내 아내에게는 아니지만 내 어머니에게는 아버지는 야비한 사람이었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쫒겨 나셨어. 잘못은 둘 다에게 있었지. 아버지는 당시 돈 버는 재미에 한참 빠지기도 했고 여자 재미에 한참 빠지기도 했지. 아버지가 빠진 여자들은 모두 술집 여자야. 아버지는 여자에게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 딱 그런 여자가 좋았던 거야. 당시 어머니는 벌써 우리 네 형제를 낳은 상태였기는 하지. 아버지의 관심은 동물에 가까운 것 같아.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 소유의 재산 이상의 관심을 받아본 기억은 없어.


c: 무능한 아버지, 자식에 무관심한 아버지 그것이 우리 아버지에 딱 맞는 표현이라면 될 것 같아. 무능하고 무관심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관심이 있지. 그게 내 눈에는 남들보다 자기 자신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 나이가 들어 이제는 아버지를 경멸하지는 않지. 그렇지만 마구 무시하게 되는 심정을 어쩔 수 없지. 아버지의 무능과 무관심에 대해 우리 식구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들이 많지. 특히 내 결혼식 날, “식장이 어디지? 몇 시지?”하고 물었다는 거야. 물론 그때까지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것에 대해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고, 아버지 스스로 알고자 하지도 않았어.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어머니에 의해 어머니의 시선으로 이야기된 일화야.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능하고 무관심한 것을 이런 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무시했어. 무능한 남편과 억센 어머니, 그것이 나의 부모상이야.


d: 우리 아버지는 자상하셨지. 내 앞을 막는 장애물들을 치워주려고 노력하셨어. 내가 편히 앞으로 갈 수 있도록. 내가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 눈길을 같이 따라가 손잡아 주고, 주저 없이 도와주셨어. 난 아늑하고 따뜻하고 편하게 자랐지. 그렇게 살아온 내가 며칠 전 어떤 드라마에서 “희고 나약한 약골의 사내”라는 대사를 들었어. 그 대사가 내 가슴이 꽂히더라고. ‘난 이제 희고 나약한 약골의 인간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평생 마른 자리만 골라 디딘 내 모습이 그렇다는 걸 알겠더라구.

아버지는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 주고 보살펴 주었지. 좋았어. 그런데 청소년기에도, 대학에 가서도 그렇게 하셨어. 나를 세상으로 밀어넣지 못한거야. 내 손을 놓지 못하셨지. 사실 나도 그 손을 놓지 않았어. 때로 답답해하면서 손을 뿌리치기는 해 봤지만, 손을 놓고 혼자 서서 보는 세상은 무섭고 막막했어. 곧 아버지에게로 달려들어 다시 손을 꼭 붙잡았지. 그 속에서 편했어. 그때, 나를 부러워하는 너희들을 보고 자부심과 으쓱한 마음도 있었지.

난 이제 아버지와 한 몸이 되어 떨어지지 않아. 서로를 아래로 보는 감정이 밑에 깔려 있지만 둘 다 이제 갈라지면 안될 것 같은 공포가 있어. 가끔 아버지 손을 놓고 길을 나서고는 해. 멀리 가지는 못하지.


a: 우리 아버지는 다리를 많이는 아니고 약간 절름거리는 정도야. 언젠가 옷 갈아입으실 때 봤는데, 한쪽 엉덩이에 쏙 들어간 부분이 있더라구. 아버지는 자신의 다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자라면서 아버지가 다리를 저신다는 것을 의식한 적은 거의 없어. 아버지는 다른 존재였지. 어떤 커다란 존재였는데 결코 좋은 존재는 아니었어. 무섭고 호랑이 같은 존재였지. 아버지가 좋다고 생각한 적은 있겠지만 그건 기억에 남아있지를 않아. 아버지가 계시면 집은 아버지 목소리로 채워졌지. 나는 아버지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 아니 호랑이 앞에 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우리 식구 다 그런 셈이었지. 아버지는 우리가 그렇게 벌벌 떨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었던 것 같아. 가끔 엄마만 그런 아버지에게 대들었지. 그래, 대화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지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엄마가 보통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 것 같아. 나 같으면 벌써 도망갔을 거야. 그런데 그게 대드는 것도 절대 용납이 안 되셨던 분이 아버지이지. 그것을 모두 받은 사람은 엄마지. 아니 엄마가 모두 받아 내었지. 그런 면에서는 엄마는 대단한 여자야. 아버지가 무력하고도 바보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는 했지만 그런 속에서 같이 살면서 때때로 대들기까지 했으니가 말이야. 어릴 때는 그렇게 대드는 엄마가 정말 싫었어. 아버지의 그런 상태가 정말 무시무시했으니까. 하늘이 우리 아버지를 내고 엄마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했으니 망정이지 엄마가 없었으면 아버지는 진작에 여자가 도망갔을 거야. 그렇게 잔소리하고 쪼아대고 화를 내는데, 그리고 생활비도 짜게 주면서 돈으로 조종하려는 심성을 가졌는데 어느 여자가 버틸 수 있었겠어. 호탕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엄마 성격이니까 같이 살 수 있었겠지. 엄마도 예민한 면도 있고 아버지의 무시에 늘 상처를 받으셨지. 그래도 엄마는 자기 자리를 벗어난 적은 없어. 어렵고 쓰라린 아버지 옆자리를 돌아가실 때까지 지켰지. 그냥 돌처럼 우리 집안의 중심에 계셨어.

우리 아버지는 우리들을 위해서 자기를 내준 적이 없다고 봐. 내가 모르는 중에 그런 적이 있을라나? 아니 없다고 봐. 다리를 저는 자신에 대해서는 평생 자기 연민을 떨치시지는 못하셨거든. 어떻게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서 보살핌을 받으려고 하셨던 것 같아. 당신들은 부모님을 보살피고 자식들에게는 보살핌을 받고. 나는 평생 부모의 무조건적인 보살핌에 목마름을 느끼거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게 나의 약점이 되어 버린 거야.

아버지는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시면 언제나 우시거든. 나는 아버지가 우시는 이유를 알아. 서러워서지. 그게 얼마나 서러웠을지 짐작이 가지.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평생 부모와 형제를 보살폈지. 그들을 사랑해서라기보다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그들에게서 받으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에서라고 봐. 아버지는 그런데도 부모에 대한 원망은 없어. 부모에 대한 원망을 영원한 어둠으로 억눌러 버린 것이 아버지의 생애를 뒤틀어 버린 것은 아닐까?


b: 우리 부모님 세대는 모두 그런가? 왜 자기 식구보다 다른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특히 자기 부인보다 남의 부인에 대한 체면이 더 중요하다는 그런 것이 있어. 우리 아버지만 그랬던 걸까? 늘 어머니를 무시하고 깔보지만 이웃들에게는 보드랍고 겸손한 태도, 예의바른 태도.

언젠가 우리 집 아랫방에 세든 여자하고 어머니하고 싸움이 났어. 그 여자는 어머니보다 젊고 영리한 타입의 여자야. 싸움을 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만하라고 소리를 치셨지. 어머니는 방에 들어와서 문을 열어 놓고 그 아주머니에게 계속 큰소리로 따졌지. 그 아주머니도 밖에서 말대답을 하고 같이 계속 싸운 거야. 아버지는 그냥 있으면 되는데 어머니에게 계속 조용히 하라는 거야. 아버지는 수돗가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서 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퍼부어 버렸어. 그 여자는 남편은 와서 달래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나는 지금도 어머니 입장이 되면 아버지가 용서되지 않아. 왜 그랬을까? 아버지는 참 바보 같은 사람이지.

그런데 가끔 나도 아버지 같은 행동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을 때가 있어. 그래서 그때 그 아버지가 더 용서되지 않고. 내가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느샌가 그런 태도가 되어 있는 내가 발견될 때가 있거든. 어쨌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니까. 내 자식보다 남의 자식을 챙기고 있는 나. 어느새 내 식구보다 다른 사람 시선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지지.

나는 그런 아버지가 늘 싫기도 하고 마치 남과 같았지. 내가 어려움에 처해도 차갑게 남과 같은 눈으로 대할 것 같은 아니 실제로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자 하는 몸짓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 자기의 힘든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말은 많이 했지만. 어린 자식이 그걸 알아서 어째야 한다는 건지.


a: 언젠가 아버지가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갔었어. 난 방의 구석에 박혀서 아버지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아득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어. 아버지가 나간 후 정적만이 흐르는 그 집의 그 분위기가 지금도 손에 잡히는 것 같아. 아랫목에서 휑해진 마음으로 우리 형제들은 앉아 있었지만 마음에 흐른 것은… 흐른 강물이 남긴 상처를 이겨나가기는 너무 힘겨운 인생이었어. 가슴을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 상처가 벌겋게 벌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거야. 그런 채로 살아 있었지. 그런 상태로 자식들을 놓아두었지.

그날 밤, 아버지가 나가면서 열었던 대문이 열린 채로 그대로 그 밤까지 있었고 그 문으로 다시 아버지가 가방을 끌고 들어왔지. 와서 신세 한탄을 하더군. 아버지는 한탄 끝에 엉엉 한참을 울었어. 마루에서 혼자 넋두리했지만,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그런 어조였어. 그 이야기를 온 식구가 다 들었으니까. 안도의 마음은 작았던 것 같아. 나는 왜 아버지가 울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구. 경멸의 감정이 컸던 것 같아. 미움의 감정도 있었어. 짓눌러 버리고 싶은 감정도 있었어.

지금 와서 다 늙은 80세가 된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어. 제대로 거동도 못하고 온갖 신체기능이 말을 잘 안 듣는 그런 아버지지만 두 눈 똑바로 쳐다보고 물어보고 싶어.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결혼을 했냐고.


d: 그런데 지금 너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자식에게 잘하는 아버지잖아. 그건 왜 그런 거지? 어떤 면에서 네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덕이라고 해야 하지 않냐? 네가 가진 투지나 삶의 경쟁에서 젖 먹던 힘까지 낼 수 있는 저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너의 그런 아버지로부터 경험이 큰 역할을 한 건 아냐? 그렇지 않으면 너처럼 그렇게 이 춥고 황량한 사회에서 꿋꿋하게 버틸 수 없지 않았을까? 너는 크고 덩치 좋은 호랑이 같은 면이 있어. 그건 아버지의 그런 말도 안 되는 양육 방식 때문에 생긴 거 아냐?

너네 아버지가 포악한 호랑이였다면 우리 아버지는 토끼야. 아직은 어떤 토끼인지는 모르겠어.

언젠가 네가 우리 아버지가 식구들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울었던 적 있었지. 네가 나에게 보인 눈물이지. 그때는 머쓱하기도 하고 너의 거친 상처를 보고 안온한 행복을 느끼기도 했지. 그러나 그때가 이미 삼십 년 전이야. 너는 네가 가질 수 없는 것에 안타까운 불행감에 몸부림치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길은 마음을 흔들 정도로 쓸쓸했지. 나는 따뜻하고 편안한 가정이었지.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너의 괴로움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그래서 인생이 주는 고통의 깊이를 너의 반만큼도 내려가 보지 못했다는 얕음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감정이 있어. 겉으로는 늙었는데 정신의 깊이는… 늙기만 했지, 무력해진 그런 것이지. 깊이와 넓이 그런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지. 편안히 살다가 이미 인생의 황금기가 낭비되고 말았다는 허무감. 정신적 고통 속에서 몸무림치며 한세월을 살아낸 너에 대한 부러움.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고 이 나이에는 그런 고통을 견뎌낼 체력도 이제 남아있지 못하다는 것. 이 심정. 이 심정이 너에게 그동안의 고통에 보상이 되지 않을까?


a: 너의 그런 고백이 나에게는 정말 위로가 되는군. 사실 이런 아버지 이야기도 부끄럽고 상처가 되어서 그동안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지. 이제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나도 내 식구들과 어느 정도 따뜻해진 것 같은 자신감? 안도감? 그런 것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아. 그동안 살아온 것을 정리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욕구 같은 것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기도 부끄럽고 아픈 이야기였는데 그것을 네가 그렇게 해석을 해 주니까 갑자기 자신감과 행복감이 생기는군. 사실 네 말이 맞기도 하고 그게 큰 소득이라면 소득이겠지.

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이면에는 이제는 예전에 만들어진 잘못된 인생 지도가 있으면 고쳐서 길을 가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


d: 그래, 나처럼 편안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기를 찢어버리는 용기로 삶에 뛰어들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삶의 폭을 넓히기가 쉽지 않지. a 같은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삶의 파도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적응력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삶에 대한 통찰도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뼈아픈 경험이었겠지만… 아니 경험이라기보다 불구덩이에 던져져 거기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었겠지.

그런데 나 같은 편안한 삶이 그것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편안한 환경에서 자란다는 것은 인생 전반부 이십 년 정도의 축복인 것 같아. 그렇지만 거기에 안주할 경우가 더 많지. 물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는 사람.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의 확률도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근데,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의 맹점은 a 너처럼 후일에도 그 상흔에 시달린다는 것. 그 상흔을 극복하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 어려움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다른 인생 지도를 그려야 하지만 그것이 잘 안된다는 거지. 지금까지 인생의 추위에 맞서 싸우다가 이제 겨우 따뜻한 곳으로 이동했는데 다시 추운 길을 나서라는 것이 정말 어렵고 어려운 일이거든. 그렇지만 그때 나서지 않으면 점점 더 나서기 어려워지고 편안한 상태의 지도에는 맞지 않는 인생 지도로 삐그덕거리며 살아가야 하거든. a 너의 고민도 바로 그거 아니야? 지금은 살만하고 편안해졌는데 뭔가 너의 삶의 지도가 잘 맞지 않는다는 직감. 불안감. 그런 것 아니야?


a : 그래, 정확해. 돌아보면 지금까지 잘 걸어왔다는 걸 알겠어. 순간순간 진실하게 살아왔던 것이 내가 방향을 잃지 않고 오게 한 것을 알겠어. 정말 치열하게 괴로웠고 막연한 인생길에서 마구 손을 저으면서 여기까지 왔어. 이제 돌아보면 그럴듯한 지나온 길이 보이고 그 길이 그 길 위에 있을 때처럼 처절하지 않다는 것을 빠져나와 보니까 알겠어. 길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거든. 입구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냥 그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한 때도 많았지. 관성으로 걸어갔던 적도 많았지. 돌아서 걷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 그때마다 ‘내가 진실로 그것을 원하는가?’ 물어보면 아니었기에 계속 어둠 속을 걸었어. 정말 캄캄해서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절망 속에서 스스로 위로했지. 가장 어두울 때가 이제 반환점이라고. 이제 굴의 가운데까지 온 거라고. 계속 가다가 보면 이제 출구가 보일 것이라고. 밤이 깊어야 새벽이 온다고.

그리고 정말 캄캄한 상태가 지나면서 오히려 앞이 보였달까. 캄캄한 것에서 점점 아주 조금씩 밝아졌을 때는 내 다리에도 힘이 들어갔지. ‘길이 틀린 것이 아니구나’하는 자신감도 생기고. 굴속에 있을 때는 왜 나만 이 어둠 속에서 이렇게 괴로운가 하고 원망도 하고, 밝은 곳에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지. 어떤 때는 죽도록 부러웠어. 그럴 때는 내가 가진 것을 헤아려 보면서 위로했지. 걸을 수 있는 두 다리와 출구로 향할 수 있는 직관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재산인가를 생각했지.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지금 이곳까지 왔어. 지금 나는 출구를 바라보고 있어. 앞이 환하지. 누구보다 밝은 세상을 보고 있어. 뒤를 돌아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그런데, 출구를 보니, 출구를 나오면 탄탄대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거든. 아니야. 출구는 다시 아무런 길로도 이어지지 않아.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로 가득 차 있어. 캄캄한 동굴에서 나오던 방향 그대로 계속 직진하고자 하는 관성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직관의 소리가 아우성치고 있어. 나는 또다시 오리무중의 황량한 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거야. 어디로 발을 디딜지 모르겠어. 저 안개 속에. 그래도 나는 이곳에 그대로 머물지는 않을 거야. 그건 나도 알아.

인생길이 다시 오리무중이 되어버렸어. 어디로 가야 할까? 다시 더듬거리고 있어.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길을. 잘못 디디면 그냥 진창에 빠질까봐 조심조심 발을 디디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고 휘저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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