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겨울 앞둔 차박 라이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by 김태라

2023년 12월 1일. 5년 넘게 타오던 내 차는, 그날 한순간의 실수로 폐차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알바 첫날이었다. 수년간 해오던 영상제작 일에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시기. 영상 만드는 일 빼고 뭐든 해보고 싶었고, 평생 프리랜서로 살아왔기에 출퇴근이 있는 삶을 은근히 동경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고 퇴근 도장 찍고 집으로 돌아가는 삶... 그게 나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서른 후반의 나이, 영상영화 제작 외에는 제대로 된 경력도 학력도 없는 나를 누가 반기겠는가. 알바천국 홈페이지를 몇 페이지를 넘겨도, 나이 먹은 사람을 '경력직 신입'으로 받아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오랜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몇 군데 이력서를 내봤고, 마침 블로그 관리가 업무 중 하나라는 헬스장 인포 포지션에 눈이 갔다. 글 쓰고 영상 만들던 경력이 있으니 이걸로 어필해 볼 만하겠다 싶었다.

첫 출근 날. 일찍 일어나 출근복으로 레깅스도 입고,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도 빗고, 세수도 했다. 설레는 마음에 열심히 준비를 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이미 출발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집에서 가까워 자전거를 타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차에 시동을 걸었다. 초행길에 10미터 전에 우회전을 했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하는 첫날부터 지각을 할 수 없다는 조바심이 내 손이 무리하게 핸들을 꺾게 만들었고, 빠른 속도를 이기지 못한 차는 굉음을 내며 교각을 박았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에어백이 터지고, 차 내부는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머리가 띵하고 온몸이 흔들렸지만, 신기하게도 중고차로 사서 탄지 오래된 차였음에도 에어백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차에서 내려보니 앞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놀라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에서는 피가 났지만, 서른 후반의 나이에 어렵게 용기 내어 도전했던 알바가 더 중요했다. 얼른 보험사에 뒷일을 맡기고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 차는 결국 폐차 처리가 되었다.



그렇게 5년을 함께 했던 친구를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의 나의 올란도를 만났다. 이전에 타던 차는 나에게 그저 굴러다니는 기계에 불과했지만, 올란도는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둥글둥글 귀여운 외모에, 흔치 않은 유니크한 파란색이 나의 취향을 저격했다. 10년이 넘은 차였지만 전 주인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 관리가 잘 되어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파란도'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유독 애착이 갔다. 내가 올란도에 반한 이유 중 하나는 별다른 평탄화 작업 없이도 차박에 최적화된 뒷좌석 공간 때문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던 차박과 캠핑. 항상 로망으로만 간직했던 터라, 차를 사자마자 별의별 차박용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잔뜩 사놓고도 실제로 캠핑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차에서 살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차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후, 날이 좋은 봄에 차에서 사는 것이 가능할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일주일 정도 파란도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일주일 정도 차에서 지내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도 소리에 잠들고, 아침 햇살에 눈을 뜨는 경험은 내가 꿈꾸던 자유와 가장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이 생활을 오래 이어가기에는 파란도의 현재 모습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 내부 높이가 낮아 목이 꺾인 채로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팠고, 뭔가를 제대로 먹거나 휴식을 취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비좁았다. 그래, 결국 캠핑카 개조가 필요했다.

여러 캠핑카 개조 업체를 방문했다. 하지만 캠핑카 개조는 흔해도 올란도를 개조해 본 경험이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비용이 너무 비쌌다. 뒷좌석 시트를 다 드러내고 2인승을 유지한 채 추운 겨울 무시동 히터를 틀 수 있는 정도로 개조를 하는 데에만 부가세 제외 1,000만 원에서 600만 원 사이의 견적이 나왔다. 그 정도 목돈이 없던 나는 이미 개조가 완료된 차를 알아봤지만, 그마저도 2,000만 원부터 시작했다.

차에서 사는 데에도 사람답게 살려면 이렇게 많은 돈이 든다니. 바퀴 달린 집에 살려는 이유 중 돈을 아끼고 싶은 것도 있었기에 이 길이 정말 맞는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과는 다르게 머릿속에서는 나 자신을 설득시킬 논리를 미친 듯이 세우고 있었다.


'월세 30만 원 x 24개월 = 720만 원... 그러니까 2년만 살면 그렇게 나쁘지 않아!'


물론 유류비, 식비 등 더 많은 추가 비용이 있었지만, 나의 뇌는 그런 것들을 예산표에서 과감하게 삭제하며 희망 회로를 돌렸다. 가장 저렴하게 견적을 내준 곳은 김해에 있었다. 거리가 멀어 부담되었지만, 올란도 개조 경험이 가장 많아 믿음직스러웠다. 결국, 그곳에서 개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문제는 수중에 600만 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봄에 개조 업체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여기저기서 한도를 끌어다 쓰고 '카드깡'으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올해 8월에 제대로 터졌다. 2024년 6개월 동안 헬스장 알바를 한 것을 마지막으로 계속 수입이 없던 터라, 그동안 카드로 쓰고 간간이 갚으며 살아오던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카드값을 갚을 돈이 없었다. 연체가 시작되었고, 모든 카드 사용은 정지되었으며, 카드사에서 집에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는 지경이 되었다. 한도는 계속 떨어져 0원이 되었다. 일단 어떻게든 생활하고 영화 제작 일은 계속했지만, 파란도 개조 비용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크라우드 펀딩을 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파란도에서 사는 모습을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 후원자들에게 리워드로 제공하고, 개조가 완성되면 집들이도 열어 집에 대한 토크쇼도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자부하며, 부푼 기대를 안고 후원 페이지를 디자인해 지인들에게 보여주니 반응도 좋았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텀블벅 수수료 20%를 제외하고 최소 400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게, 목표 금액을 500만 원으로 설정했다. 텀블벅이라는 사이트에 가입하고, 가슴 뛰는 설렘과 함께 후원 페이지를 올렸다. 프로젝트 제목은 나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지었다.


'집 없는 삶 실험: 노숙자가 되는 길에 함께 해주세요.'


사람들이 한 번쯤은 클릭을 하겠지. 그중 한 명은 후원해 줄 거야. 그렇게 사람이 모이면 어쩌면 모금이 가능할지도 몰라!

부푼 마음을 안고 시작하긴 했는데, 막상 주위에 홍보를 하려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분명 리워드가 있는 프로젝트였지만, 본질적으로는 후원 형태이기에 마치 구걸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의 도전에 자긍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주위에 홍보했다. 프로젝트 페이지는 한 달간 세상에 노출되었고, 지난 11월 10일에 마감되었다.





총 후원자 수 26명, 모인 금액 2,149,000원.


기대와는 너무나 다르게, 나의 지인 외에 텀블벅을 통해 유입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텀블벅은 목표 금액이 달성되지 않으면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되는 형태이기에, 바퀴 달린 집 개조 비용 모금 프로젝트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바퀴 달린 집에서 지낸 지 2주가 되어간다. 지금까지는 개조 없이도 어떻게든 살고 있다. 밤이 되면 두꺼운 패딩과 침낭으로 몸을 꽁꽁 싸매면 꽤나 따듯하고 아늑하게 잠들 수 있었다. 심지어 잠은 또 왜 이렇게 잘 오는지, 집에서 살 때보다 더 깊은 잠을 자는 기분이었다. 물리적인 집이 주는 답답함 대신, 낯선 공간에서 오는 묘한 해방감이 나를 감싸는 듯했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막연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니 친구들은 내가 한국의 겨울을 너무 무시한다고 했다. 6.25 한국전쟁 때, 잘 훈련되고 중무장한 미군들도 한국의 혹독한 겨울 추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고. 심지어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보다, 동상으로 얼어 죽거나 다친 사람이 훨씬 많았다고.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다음 주부터 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진다고 한다. 겨우 가을 끝자락의 온기에 기대 버텨왔던 내게, '진짜'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섬뜩한 전조였다. 나는 이 겨울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게 자유야? 개고생이야?" 집 떠난 39세의 오열기